<60·강원 동해시 송정동>
 
 

 성격과 취미가 비슷한 우리 부부, 밤이면 각자 동아리방에서 취미생활을 하고 낮이면 밭에서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서로 “찰떡궁합 천생연분이야” 우스갯소리로 위로도 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논밭을 더 늘리지는 못할 망정 줄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부모님의 뜻에 따르다 보니 이젠 일인 다역도 맡게 되었고 삶의 새로운 가치도 알게 됐다.

 오십대 초반에 이십년 이상 근무하던 회사를 명예퇴직한 남편에겐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힘든 고통이었다. 취미생활과 운동을 해 봐야 하루의 일부분에 불과했고, 이마를 맞대며 함께하는 행복도 서너달 지나자 한계가 느껴졌다.

 식전부터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일하시던 부모님을 한 호밋자루라도 도와드렸더라면 농사일 순서라도 알았을 텐데…. 회사에서 몇 푼 번다는 유세로 삼십년 이상 대가족 생활을 하면서도 농토 주위를 서성거리지도 않다가 뒤늦게 바통을 받고 보니 관리가 소홀한 논밭은 야생동물의 놀이터로 변했다.

 그러나 이젠 농군 경력 10여년이 지나 씨 뿌리고 가꾸는 시기도 알고 무농약 인증까지 받게 되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는 유통 시기를 놓쳐 농작물을 갈아엎기도 하고, 중간상인의 헐값 매매로 며칠씩 농사일을 놓기도 했다. 흙투성이가 된 작업복을 씻으며 ‘언제 포기할까’ 끊임없이 망설였지만, 이제는 새벽이면 작물이 부르는 소리에 밭으로 나가 비지땀을 쏟을수록 보약 마시는 느낌이 든다.

 주어진 일마다 다부지게 임하면 작은 꿈이라도 성취한다는 사명감으로 생활하는 우리 부부는 각자 농협 조합원 가입과 농업인 경영체 등록을 했다. 기술을 익히고 일지를 쓰고 정보를 쌓으면서 조금이라도 소득이 높은 작물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밭 언덕에 감·매실·살구·자두·호두 등 과일나무를 심었다. 과수목은 심어 놓기만 하면 튼실하게 자랄 줄 알았는데, 관심을 내려 놓으니 영양실조로 비실거리고 잡초 넝쿨에 휘말려 중병을 앓는 환자 같았다.

 그러다 동물들의 배설물이 나무에 질 좋은 양분이라고 하여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사슴·닭·오리·거위·칠면조 ·기러기 새끼를 키웠다. 넓은 축사는 풀 하나 없이 말끔해지고 득실거리던 벌레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한여름 나그네들에게 가로수 역할을 했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동물농장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교육 현장이 되었다. 물론 소득에도 쏠쏠한 도움을 주었다. 단순히 거름을 얻고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동물들을 들였지만, 사료 제공, 축사 청소, 전염병 예방 등 잔손길은 작물을 기르는 것만큼 번거로웠다. 그러나 녀석들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생각하면 결딜 만했다.

 처음엔 몇마리였던 녀석들이 몇년 지나자 사십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녀석들의 식솔도 거느리기 어려운데 반갑지도 않은 동물들이 공생하려 들었다. 겨울철에는 축사 근처에 쥐와 두더지가 득실댔고 각종 새들이 자기 집처럼 몰려들어 포식했다.

 삼년 전 겨울, 우리는 살쾡이(삵) 때문에 잠시 실의에 빠진 적이 있다. 키우던 가축 마흔두마리를 몽땅 살쾡이한테 도적당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두마리 줄어들기에 지인들의 손장난인 줄 알았다. 그러다 밤마다 흔적 하나 없이 몇마리씩 없어졌다. 틈새를 철판과 돌로 막고 그물망까지 씌워 봤지만 끝내는 몽땅 잃고 말았다. 시끌벅적대던 축사가 며칠 사이에 텅 비었다. 그 모습은 죽마고우를 떠나보낸 것 같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딱한 사정을 안 지인이 철망에 고기를 달아 고기를 잡으면 문이 닫히는 기구를 설치해 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삼일째 되던 날 살쾡이란 녀석이 축사 안에 들어가 있었다. 덩치라고는 새끼 기러기만한 살쾡이는 이마에 억센 털이 있고 고양이를 닮았다. 저 작은 것이 어떻게 피 한방울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 많고 큰 동물들을 서리해갔단 말인가. 복수라도 하고 싶었지만, 천연기념물이라기에 야생동물보호단체에 연락했더니 깊은 산속으로 보내줬단다.

 살쾡이한테 당한 뒤 텅 빈 축사가 보기 싫어 다시 새끼를 사들였다. 다행히 번식률이 높아 금세 스무마리 이상으로 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또 한마리씩 없어졌다. 결국 기러기 한쌍이 남았을 때 살쾡이란 녀석이 또 울타리에 들어가 있었다. 야생동물보호단체 담당자가 이번에는 다른 녀석이라고 했다.

 ‘오뚝이 정신’으로 생활하던 나는 농군이 되고 나서 모든 삶이 바뀌었다. 대가족 생활로 집안일만 하던 평범한 주부 때보다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지고 사회생활과 봉사를 하면서 잃었던 내 이름도 찾게 되었다. 농협 부녀회장을 맡아 조합원들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대의원을 하며 농협의 자산과 운영방침도 배우게 되었다. 특히 16기까지 1998명이 수료한 동해농협 주부대학 동문회장이라는 책임을 맡고 보니 통솔력과 봉사의 맛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농산물 지킴이 감시원 일을 하면서 국산과 수입 농산물의 구별법, 원산지 표시제 등도 배웠다.

 막중한 책임감으로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의욕만 앞서는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려고 매사에 늘 조심한다. 식생활 문화가 바뀐 탓인가 할머니가 되어도 김장김치나 장을 못 담그는 회원들이 많았다. 지난봄에는 회원들과 전통 장 담그기 교육을 우리 집에서 하고 조리법을 작성해 나누어 주자 자신감을 얻은 듯 좋아했다. 장이 숙성되면 김장김치를 담가 불우이웃을 돕자고 했더니 모두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6월10일에는 칠십세가 넘은 소외계층 어르신 삼백여명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했다. 사물놀이·합창·민요 등 공연을 하고 작은 선물과 음식을 대접했다. 회원들은 힘든 가운데에서도 “너무 보람 있다”며 뿌듯해했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참기름·깨소금·떡국 떡 판매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매실 따기 등 다양한 체험을 하며 우리 농산물 팔아주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삶에서 얻은 생활의 지혜를 다문화가족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더 큰 보람이다. 농사일과 육아에 대한 교육을 하면 서툰 말투와 행동으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다문화여성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노래를 가르칠 때면 어둔한 발음으로 가사를 익히려고 노력하는 자세만 봐도 뿌듯한데, 5월27일 강원도 다문화가족 합창대회에서 패티김의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불러 은상을 받았다. 거기서 받은 상품과 상금을 몽땅 다문화가족들에게 전달할 때 다문화여성들은 “베트남에서는 이 돈이 한달 월급이에요” “합창은 은상이지만 회장님 하시는 일은 대상입니다” 하며 품속을 파고들어 훌쩍였다.

 언제나 작은 것 하나라도 도움을 주려는 남편을 보면서 부모님 당부 말씀 때문에 농군이 된 요즘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시기라 생각한다. “우리 더 늙더라도 농사만 짓고 삽시다.” 앞가슴에 직업의 명찰을 달라고 하면 ‘유기농 무농약 친환경 농업 경영인’이라고 대문짝처럼 달 것이다.

 올해는 모든 농산물 가격이 너무 싸다. 농산물 가격이 조금만 상승하면 매스컴에서 소비자 발목을 묶으면서 이럴 때는 왜 조용한지…. 그러나 힘없다고 자책하며 의지하려는 농민보다는 우리 농토를 지키는 당당한 농민이 되자고 말하고 싶다. 농민은 재산을 쌓아둔 큰 부자보다 늘 마음의 부자라는 느낌이 든다.

 저녁마다 남편은 서실로, 나는 기타를 메고 동아리방으로 향하는 것은 내일 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힘찬 발걸음이다.

   
  [최종편집 :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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