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경기 의왕시 학의동>
 
   

 아침에 농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수한 꽃들과 신선한 공기가 나를 반깁니다. 매의 발톱 모양을 닮은 매발톱꽃, 하늘을 바라보며 활짝 핀 천상초, 뿌리가 새우를 닮은 새우란, 짙은 보라색의 정렬적인 자란 등 많은 종류의 들꽃들이 농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느라 분주합니다. 그 앙증맞은 들꽃들은 나의 친구들입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대학까지 마친 ‘서울촌놈’입니다. 남산 근처의 제3한강교(한남대교) 주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남동에 있는 단국대 뒷산에 가서 냉이와 쑥을 뜯었습니다. 그것으로 친구들과 소꿉놀이도 했습니다. 이 기억이 흙을 만져본 유일한 기억이네요. 제 인생의 1모작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 결혼과 동시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로 건너가 5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훌륭한 농부가 되는 꿈을 가진 소박하지만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나처럼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촌놈입니다. 꽃과 나무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미국에서의 생활은 나의 가치관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귀국 후 30대 초반에 처음으로 경기도 땅을 밟고 귀농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귀농이란 표현도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콩 한톨도 심어 본 적 없는 서울 깍쟁이가 시골에서 새 삶을, 그것도 신혼살림을 시작하려니 부딪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네요. 어린아이처럼 시골 생활을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웠습니다. 밭 고르기, 잡초 뽑기, 호박씨 심기, 고추 모종 심기 등 처음이라 어설픈 농사일이지만 나름대로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심은 상추 등 각종 채소들이 밥상 위의 한켠을 차지할 때의 기쁨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희열 그 자체였습니다. 낡고 초라한 집에서 시작한 귀농 생활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으나 젊음의 열정으로 즐겁게 살아왔고, 현재까지 20년 넘게 경기도 의왕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20년 전의 낡고 초라한 집은 109㎡(33평)의 아파트로 바뀌었습니다. 제 인생의 2모작입니다.

 의왕시로 들어온 첫날, 저는 결심했지요. ‘3년 안에 서울로 안 나가면 나는 김혜순이 아니다’라고. 당시 의왕시는 개발이 전혀 안 된 시골이었습니다. 낡고 자그마한 마을버스가 40분에 한대씩 다니는 정말 살기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또 대부분의 주민들이 3대, 4대에 걸쳐 살고 있는 이씨네, 박씨네 집성촌이었습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에게는 관심도 없고 눈길도 잘 안 주더군요. 시골 사람들의 텃세를 처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하려 하면 사사건건 방해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큰아이가 초등학교에서 전교어린이 회장으로 선출되니까 저도 알기 전인데 어머니회 회장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었다고요.

 우리는 동네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외지인에 대한 벽을 허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농장(식물원) 하우스를 지을 때도 서울의 큰 업체에 맡기지 않고 동네 사람들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동네 모내기 날은 농장 문을 닫고 모내기에 나갔습니다. 새참도 가져가고 동네 애경사에는 꼭 참석하는 등 동네 일에 솔선수범했습니다. 동사무소 취미교실에 야생화 강좌를 무료로 개설해 가르치며 동네 사람들과 함께했고, 농업인의 날 행사에 야생화 작품전도 열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열리는 농어업인후계자 전국대회나 후계자 부인회에도 열심히 참석해 일을 도왔습니다.

 2007년 남편이 경기도의 ‘농업전문경영인’으로 선발되어 경기도지사 인증패를 받았습니다.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농업인이 된 것 같아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책임감이 더 생겼고 더 겸손해져야겠다는 각오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는 남편이 의왕시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고 그로 인해 동네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20년 넘게 살다보니 이곳이 저의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서울에 볼일이 있어 나가도 빨리 공기 좋은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만 든답니다. 서울촌놈에서 경기도촌놈으로, 의왕댁이 되어가고 있나 봅니다.

 화훼농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재작년 심한 태풍으로 하우스가 파손되었고, 소득이 되는 분화용 식물들도 다 망가졌습니다. 또 겨울에는 화재로 인해 하우스가 불타버리는 큰 아픔도 겪었습니다. 하우스는 다 타버렸고, 식물은 추위에 얼어 있고, 이제 농사를 접어야 하나 하는 절박한 상황.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넋을 잃은 상태에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힘을 합치고, 여러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 의왕농협 관계자들의 관심 속에 하우스가 복구되어 다시 제자리를 잡아 나갔습니다. 이제는 다 지나간 먼 이야기가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다니 세월의 힘이란 대단한 것이네요.

 아이들은 감사하게도 큰 탈 없이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큰아이는 대학 졸업반이고 작은아이는 대학 3학년입니다. 현재는 남편 명의의 땅도 구입해 우리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우리 부부가 폐쇄성이 짙은 집성촌 마을에서 터전을 이루고 살기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

 13년 전, 교통사고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척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혈관 속의 심한 염증으로 몸의 부분 부분이 마비가 되는 증상입니다. 병명은 ‘류머티스성 루푸스’. 담당의사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공기 좋은 시골로 가서 요양을 하라고 할 정도로 4년의 긴 세월을 아무 일도 못하고 병석에 누워 병든 병아리처럼 지냈습니다. 한달치 약이 쇼핑백 한가득이었습니다. 약을 먹으면 약에 취해 눈꺼풀을 뜨지도 못했지요. 몸은 부어올라 예전의 내 얼굴은 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몸은 거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의 병치레가 지나고 약간의 회복 기운이 보여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때, 남편이 운영하는 식물원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요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이끌고 식물원의 들꽃과 나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식물을 만질 기력조차 없었지만 내 몸이 산소를 향해 움직였나 봅니다. 식물이 내뿜는 산소가 내게로 공급되는 것 같았습니다. 흙 냄새가 느껴졌고 꽃과 나무의 신선한 공기가 다가옴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장에서 꽃들을 보며 머무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갔습니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후, 서서히 회복되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들꽃의 강인한 생명력, 흙의 생기가 연약한 나를 회복시켰습니다. 나에게 생명력과 소망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흙이 있는 농업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야생화 농장을 운영하면서 나는 늘 귀여운 들꽃들 속에서 살게 되는 행운을 누렸고, 들꽃이 좋아 찾아오는 도시의 방문객들과 대화를 하면서 농촌에 사는 기쁨을 나눕니다. 들꽃밭에서 들꽃과의 즐거운 삶이 시작됐지요. 손님들 중에는 퇴직하고 꽃농장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내 경험을 얘기해 주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돕고 있습니다. 꽃을 기르면서 우울증을 치료한 손님, 대화가 없던 가족이 꽃을 가꾸면서 대화를 하게 된 가정, 꽃을 키우며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을 찾은 손님 등 꽃으로 심리적인 치료, 즉 원예치료를 하는 흐뭇한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작년 여름, 나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농업을 위해, 화훼산업의 발전을 위해, 나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한국농수산대학’ 입학을 선택했습니다. 한국농수산대학 개교 이래 최고령 입학생이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와 아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결정했습니다. 큰아이는 학생들과 소통을 위해 스마트폰을 사 주었고, 작은아이는 운동복과 운동화를 사 주었습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농기계수업, 온실 화초재배 등 실제 화훼 실습을 하며 농업의 재미를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덕분에 잃었던 건강도 회복되었고 에너지도 생겨 무언가 해 보고 싶은 의욕이 넘칩니다. 2014년 6월21일, 드디어 1학기를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50세가 넘어 공부를 하려니 힘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농업을 사랑하는 농업CEO로 거듭나기 위해 제대로 배우고자 고된 학업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며 한국 농업의 희망을 찾아보려 합니다. 내 인생의 3모작이 시작되었습니다.

 농업·농촌과는 전혀 관계없던 한 소녀가 3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어엿한 농업인이 되어 우리 농업을 걱정하고 농업의 비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농업이라는 단어가 아주 편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기본이 되는 산업이 농업입니다. 지금 무척이나 힘든 시기이지만 우리는 한국농업이 나아갈 방향을 위해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내 삶을 멋지게 엮어 줄 농업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나는 들꽃들을 만나기 위해 식물원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내 분신과도 같은 사랑스런 아이들, 내 친구들을 만나려는 기대와 설렘이 나의 발길을 빠르게 재촉합니다. 농업·농촌은 나의 희망이고 생명입니다. 남은 내 인생에 파이팅을 외칩니다!

   
  [최종편집 :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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