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경남 산청군 시천면>
 
 

 저는 베트남 건터시의 작은 시골 집에서 살다가 대한민국 경남 산청군 시천면 서촌길의 성진환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을 모시고 한국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고, 음식도 안 맞고, 풍습도 달라서 하루하루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베트남에서 시집온 저에 대한 호기심과 편견, 그리고 저를 보는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생활을 시작한 지 7년이 흐른 지금은 아들과 딸 남매를 둔 억척스러운 엄마가 되었습니다.

 두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한국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있는데 시집온 첫해 겨울에는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이곳은 천왕봉과 가까운 지리산 자락 아래 마을이라 더욱 추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온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적응이 됐으니 사람 몸이 참 신기합니다.

 낯선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에, 그리고 부모가 될 준비도 없이 첫 아이를 임신하자 두렵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어릴 적 즐겨 먹던 고향 음식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김은 그래도 가장 먹을 만해서 임신 후에 참 많이도 먹었습니다. 계속 음식으로 고생하다 보니 엄마 등 친정 가족이 떠올라 눈물을 자주 흘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이를 낳았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시부모님께서는 저를 위해 진심으로 사랑을 쏟아주시며 이것저것 도와주고 챙겨주셨습니다. 거기다 딸을 키우는 기쁨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도 조금씩 줄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다가 둘째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갈 때 장애인인 남편이 함께 갈 수 없어 대신 시어머님과 가야 했습니다. 제 곁에서 다른 남편들이 하는 것처럼 손을 잡아 줄 수 없어 서운했습니다. 또 남편은 다른 아빠들처럼 아이들과 자주 놀아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목마를 태워주고 말타기를 하거나, 손 잡고 놀이공원 가는 일은 우리 가족에게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다른 아빠들과 아이들의 다정한 모습이 부러워 마음이 아픈 적도 여러번이었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아이들에게 못하는 것이 많았지만 어떤 아빠보다 더 깊이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또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빠이고 가슴 따뜻한 남편입니다. 저는 예전에 남편의 장애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도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가슴 따뜻한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키우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가을에 송이버섯을 채취하고 겨울에는 곶감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입니다. <지리산산청곶감>은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됐습니다. 이 곶감은 도넛형의 건시 곶감인데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명품 곶감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도 시부모님과 함께 늦은 가을에 감을 따서 깎은 후 차가운 바람에 말려서 조물락조물락 일일이 손질합니다. 그러면 모양이 예쁠 뿐만 아니라 당도도 높아집니다. 이렇게 만든 곶감은 정말 달콤하고 맛있습니다.

 또 가을 송이버섯도 얼마나 맛있고 따는 일이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한국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지만 그중에 송이버섯과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은 정말 맛있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에 온 시간이 꽤 흐른 지금은 시어머니를 통해 다양한 한국음식들을 배워 많은 한국요리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한글교실 선생님들에게서 한국말을 배운 덕분에 한글을 읽고 쓰는 실력도 제법 늘었습니다. 이젠 두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가끔 읽어 주기도 합니다. 내년에 제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숙제를 봐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준이 못돼 최근엔 한국어 능력시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농협이 든든한 언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산청군농협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여는 다문화여성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에서 한국어교육·노래교실·생활법률·민간요법·자녀교육법 등의 프로그램에 참가해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모든 선생님들이 우리들을 친동생같이 따뜻하게 대하고 상담도 해줘 즐겁습니다.

 5월에는 농협 다문화여성대학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2박3일 일정의 서울 나들이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몸이 불편한 남편 곁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어 나들이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서울 나들이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꼭 서울 나들이에 동참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여행복’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나들이 가기 며칠 전 남편이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나오다가 계단을 잘못 디뎌 발목을 삐었습니다. 그때 뼈에 금이 갔습니다. 지체장애가 있는 남편은 걸음이 불편해 큰 병은 아니었지만 입원까지 해야 했습니다. 저는 남편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팠고 더구나 서울 나들이도 못 가 한층 더 슬펐습니다. 하지만 6살 딸아이도 서울 나들이보다 아빠 다리가 빨리 낫기를 바랐고 3살 된 아들도 아빠 다리에 “호” 불며 “빨리 나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빠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아이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우리 가족의 가장이며 기둥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 나들이는 다음에 또 기회가 올 수도 있으니까요. 아직도 석고 붕대를 하고 있는 남편은 더운 날씨 탓에 힘들고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을 친구 삼고 있으니 답답할 것입니다. 지금은 남편이 하루 빨리 나아 바깥출입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 생활 7년. 저는 비록 베트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저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딸아이처럼 한국을 배우는 나이가 8살에 머물지 않고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얼마 전엔 운전면허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손으로 원고를 직접 쓰지만 컴퓨터도 배우고, 간장·된장·고추장 등 어려운 전통 발효음식 담그기도 시어머님한테 배워 한국의 주부로 멋지게 성장할 것입니다.

 끝으로 시아버님과 시어머님, 너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저에겐 속상하고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이제 한없이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 더 이상 힘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어머님은 잘하지 못하는 며느리를 위해 음식을 해주시는 등 다정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이젠 더 이상 베트남 식구들 생각으로 눈물 흘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곳이 저의 제2의 고국이자 고향이라고 몇번이고 다짐하며 우리 가정의 행복한 미래를 꿈꿉니다.

   
  [최종편집 :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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