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충북 진천군 덕산면>
 
 

 6년 전 저는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캄보디아에서 왔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저는 어려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한국말을 하며 적응을 해 지금은 어느 정도 살 만한 상황이 됐습니다.

 저는 캄보디아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 집안의 6남매 중 넷째로 자랐습니다. 머리가 비교적 좋은 저는 공부만 하고, 주말에나 조금씩 일을 도왔습니다. 농사일과 집안일은 주로 엄마와 오빠, 동생들의 몫이었지요. 저는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고 믿음직스러운 딸이었습니다. 선생님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며 농담을 잘해 친구들 사이에서는 개그맨으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렵 한국이라는 나라는 잘살고 월급도 많아서 가기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접했습니다. 드라마를 봐도 한국 남자들은 모두 잘생기고 여자에게 자상하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해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한국 남자와 선을 봤습니다. 15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를 잘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곧바로 결혼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은 상상만 해도 기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한국 땅을 밟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사람들이 무슨 말은 하는지 답답했고,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 말 한마디 갖고 버텼습니다. 말이 안 통하니까 무조건 웃고 밝은 표정만 지었습니다. 그때부터 웃는 게 습관이 되어 울고 나서도 눈물을 닦고 웃었습니다. 말보다 사람의 표정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고향에 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고향 생각을 하고, 잘 때는 고향 꿈을 꾸면서 웃고 행복해하다가 잠에서 깨면 허탈해 울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한국에 사는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삼형제 중 막내인 남편은 무뚝뚝하고 무표정하며 화가 나면 곧바로 드러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성격 때문에 매일 고민했습니다. ‘평생 어떻게 같이 살지?’

 우리 집은 고추 농사를 많이 짓습니다. 여름만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추를 따고 다른 일까지 해야 하니 너무 힘들어 지칠 때가 많았습니다. 땀이 비 오듯 하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온종일 일을 하면 팔다리가 빠질 정도로 아프기도 합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가보면 남편이 농사를 짓는 경우는 저 한사람뿐인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은 매번 출석해 공부하는데, 저는 농사일 때문에 결석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마음 놓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무척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1년이 지나 첫째가 태어나고서는 더 힘이 들었습니다. 밭일과 집안일에 아이 양육까지 겹쳐 숨 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엄마가 되어보니까 진짜 어려움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멋진 엄마가 되고 싶어서 아기가 잠잘 때 한글을 읽거나 글씨를 배웠습니다. 한글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을 남편에게 물어보면 남편은 설명을 하다가 화를 내며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책을 덮고 다시는 한글 공부를 안 하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어려움은 계속됐습니다. 60대의 시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을 특별히 챙겼습니다. 시어머니랑 사는 저는 늘 긴장하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랑 싸울 때도 큰 소리가 나면 안 되고, 속상할 때도 어머니 앞에서는 표정관리를 하며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데 집을 나가면 갈 곳이 없었습니다. 가족 모임이나 명절 때 저는 완전히 바보였습니다. 다들 웃고 이야기하며 즐거운데 저는 구석에서 음식을 차리거나 설거지를 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남편의 가족들만 보이고 우리 가족들은 안 보이니까 명절이 오히려 싫었습니다. 내 속마음을 알아주거나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말만 잘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 따가웠습니다.

 “이주여성들을 너무 믿지 마라.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다.” “돈이 생기면 고향 부모한테만 갖다 주고 여기 가족은 신경도 안 쓴다.” “공부도 많이 시키지 마라. 많이 알면 도망간다.” “한국 남자들 피 빨아 먹으려고 결혼한다.” 등.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는 할 말을 잃었고 한국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 참고 버틸지 저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 때는 이곳 생활을 다 청산하고 친정엄마 곁에 가서 살면 참 행복할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요즘 캄보디아에서도 한국말 하나만 잘하면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외국인 엄마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큰 상처인데, 제가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온몸을 던져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책임감 때문에 떠날 수 없었습니다. 엄마의 빈자리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난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한국어능력시험 4급에도 합격했습니다. 말을 잘해서 어디에 가더라도 칭찬을 받고 캄보디아에서 온 친구들에게는 좋은 상담사가 되어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지나온 삶도 한번 돌아봤습니다.

 저는 그동안 어렵고 힘든 것을 시어머니, 남편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제 책임도 컸습니다. 공부만 하고 엄마 품에서 살다가 세상에 나와 사는 자체가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사실 말을 못 알아듣고 시원시원하게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 저와 함께 사는 시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저와 결혼해 늘 챙겨주고 가르쳐야 하는 남편은 또 오죽했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바꾸면 모두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잊어버렸던 행복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너무 멀리 바라보면 힘드니까 오늘 하루만 생각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우리 큰아들은 말도 잘하고 똑똑해서 어린이집에서 여러번 상을 받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빠를 많이 닮아 잘생긴 데다 노래도 잘 부릅니다. 저는 요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배우며 재미를 찾곤 합니다. 덕산농협에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때마다 따뜻하게 대해 주는 농협 직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덕산은 저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좀 더 배우고 직장을 잡아서 당당한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멀지만 한걸음씩 걸어가겠습니다.

   
  [최종편집 :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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