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경기 양평군 양동면>
 
 

 알람시계보다 정확한 토종닭이 새벽을 알린다. 암흑이 물러가면서 부지런한 모든 생물들이 잠에서 깬다. 나뭇잎에 매달렸던 이슬은 햇볕 아래 사라질 준비를 한다. 토종닭들이 아침밥을 달라고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기수를 돌린다. 강아지들까지 점호를 마치고 나면 남편은 출근 준비를 하며 이야기한다.

 “잡초 제거는 내가 할 테니 그냥 둬요. 요즘 진드기가 극성이에요.”

 “알았어요. 맹호부대 용사가 진드기를 혼내 주세요!”

 남편이 고물 자동차를 몰고 집을 나서면 나는 소망농장의 농장장이 된다. 제초제를 쓰지 않는 우리 농장은 잡초와 전쟁을 해야 한다. 그래도 나는 하루하루를 감사로 시작해 감사로 마감한다. 가끔은 조용히 눈을 감고 옛날을 생각한다.

 내가 이곳 양평 끝자락인 작두골로 온 것은 15년 전 춘사월이었다. 당시 작두골에는 인가도 드물고 진달래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남편과 와 보니 아직 집도 없고 컨테이너만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었다. 남편은 낙원이라며 흡족해했지만 나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멧돼지·고라니·오소리 같은 야생동물이 매일 출현해 간장을 얼어붙게 했다. 나는 날마다 남편과 설전을 벌였다.

 “여기가 사람 살 곳이오? 서울에서 기반 잡아 살 만하니까 이런 데로 이사를 하다니 제정신이오?”

 “나는 좋은데 어쩌란 말이오? 정 싫으면 이혼하고 서울로 가요. 위자료는 두둑히 줄 테니까요.”

 서울 강남에 아담한 양옥집 있고 개인택시 있으면 중류 가정은 되었다. 그런데 상의도 없이 집과 택시를 팔고 첩첩산중으로 오다니 도저히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옷가지를 챙겨 친정으로 떠나버렸다. 이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첩첩산중 작두골로 갈 것인가. 결혼을 앞둔 아들, 아직 어린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어느 아침에 까치가 유난히 울더니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월남에서 특호작전이 있던 날, 우리 부대원 160여명 중 겨우 8명만 살아 귀국하였소. 살아남은 전우들은 지금 고엽제증후군으로 고생하고 있소. 내가 어렵게 취득한 개인택시를 포기한 것도 요즘 나타난 증상 때문이오. 귀가 들리지 않아 운전에 어려움이 컸소. (중략) 이제 죽는 날까지 흙과 함께하며 먼저 간 전우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남은 동기들을 불러 막걸리를 나누며 위로하고 싶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남편에게 난청이 있다는 것도, 월남에서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남편이 매년 현충일에 국립묘지에 다녀오면 눈이 퉁퉁 부어 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옷가지를 챙겨 고속버스에 올랐다. 고속버스가 거북이 같다고 느꼈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작두골로 향했다. 집에 다다르자 남편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여보, 왔구려. 잘 왔어요!”

 “미안해요. 그런 일을 왜 이제야 밝히는 거예요?”

 우리는 택시기사에게 돈을 내는 것도 잊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백구가 맹렬히 짖어대는 소리를 듣고서야 기사에게 요금을 냈다.

 작두골에 정착하기로 작정하고 현실을 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부동산에 밝지 않은 남편은 시세보다 비싸게 땅을 샀다. 나머지는 다 빌린 것이었다. 그러니 당장 생활비가 나오지 않아 걱정이었다. 농기구에 비료값도 만만치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트랙터로 논밭을 갈고 주위에 제초제를 뿌렸다. 우리는 삽과 괭이뿐이었고 젊지도 않았다. 더구나 칡넝쿨과 잡초는 우리가 밭을 개간하는 속도를 앞질렀다. 그렇다고 제초제의 독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에게 제초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잡초와 전쟁을 하다 보면 농사를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다시 서울로 갈 수도 없었다.

 남편은 농사지으며 할 수 있는 부업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나는 귀동냥 끝에 토끼사육을 시작했다. 토끼는 번식이 잘돼 개체가 금방 늘고, 동물원에 납품하면 현찰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을 설득해 토끼장을 짓고 성토를 백마리나 구입하니 금방 천여만원이 들었다. 토끼는 엄청나게 먹는 동물이었다. 남편은 종일 화물차로 토끼 먹을 풀을 베어 날랐다. 얼마 안 가 토끼가 새끼를 열마리씩 낳았다. 금방 돈방석에 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장마가 시작되더니 토끼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오는 게 한숨이요 쌓이는 것이 토끼똥이었다. 오소리와 살쾡이마저 토끼를 죽이거나 물고 갔다. 이름은 소망농장이라 붙여 놓았지만 절망이 어른거렸다. 살아 있는 동물을 사육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부녀회에 가입해 마을 뉴스도 듣고 부업거리도 찾았다. 사람들은 우리 마을을 노인과 홀아비와 황구가 많은 삼다(三多)의 마을이라 했다. 많은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밭이었다. 예전에는 그 밭에 콩을 심었는데 근래에는 심지 않는다고 했다. 젊은 아낙들이 콩밭을 매다가 서울로 도망가는 일이 많아서였다.

 이런 옆집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힌트를 얻었다. 텔레비전에서 연신 웰빙 이야기를 하던 때였다. 유기농이 권장되고 안전한 먹거리가 화제가 되었다. 콩밭을 매다 도망갈 새댁도 아니려니와 때마침 불어온 웰빙 바람을 잘 이용하면 되겠다 싶었다. 토끼사육의 실패를 이참에 반드시 만회하고, 빌려서 쓰던 밭을 사고 버젓한 집도 짓자고 단단히 결심했다.

 우선 토끼를 팔아 경운기를 장만했다. 경운기가 있으니 삽과 괭이로 일할 때보다 능률이 수십배 올랐다. 그렇게 밭을 개간하고 콩을 심었다. 콩은 거름을 하지 않아도 뿌리에 박테리아가 번식해 잘 자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빌린 밭에는 경운기로 토끼똥을 옮겨 두둑이 뿌리고 참깨와 들깨를 심었다. 이웃집 할머니는 “참깨는 좀 일찍 심고 들깨는 밤나무꽃이 필 때 모종을 붓는다”고 훈수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대하였다. 장에 갈 때면 양말을 사다 드리고 고기도 한근씩 끊어다 드렸다.

 우리 부부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중년의 힘과 열정을 모두 쏟아부어 개간과 농사를 병행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콩·참깨·들깨 모두 넉넉히 수확했다. 토끼똥으로 거름을 했다는 소문이 나니 금세 팔려나갔다.

 “서울댁, 다음부터는 깨는 기름을 짜고 콩은 메주를 만들어 팔아봐요.”

 “할머니, 고맙습니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했지요?”

 나는 제갈량의 말을 잘 듣는 유비처럼 다음 가을부터 당장 실행에 옮겼다. 참깨·들깨는 방앗간에 가져가 기름을 짜서 유리병에 나눠 담고, 콩은 가마솥에 넣고 삶아 메주를 띄웠다. 서울 지인들에게 선전을 하니 손쉽게 팔려나갔다.

 수년 동안 구슬땀을 흘리니 통장이 만삭의 임산부처럼 불러 있었다. 드디어 빌린 밭을 우리 명의의 등기부에 올렸다. 남편은 농한기에도 공원묘지에 나가 일을 하였다. 남들은 기피하는 일이지만 남편은 고인들의 안식을 위한 일이니 좋다고 하였다.

 우리 부부는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하여 작두골에 작은 소망농장을 일구었다. 귀촌한 지 15년 만에 이룬 결과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 땀은 우리 부부가 흙에 바친 찬가였다.

   
  [최종편집 :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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