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전남 장성군 황룡면>
 
 

 “뭐라도 하나 해봐. 나가서 시정(마을회관)이라도 쓸어 보랑께.”

 내 농촌 생활을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하고 있던 사업이 몰락하고, 몇년을 경제사범으로 복역하고 나온 나에게 남은 재산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해골 같은 얼굴로 밤낮을 일하는 아내와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 그리고 아빠 얼굴조차 낯설게 여기는 세 딸이 나를 잡고 있는 동아줄이었다. 도망치듯 고향에 내려와 농사라도 지어 먹고 살고자 했으나, 가진 게 없던 나에겐 무엇을 하든 힘들고 괴로운 나날들뿐이었다. 내 발 뻗을 작은 땅조차 없어서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나를 보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고개를 쓱 돌리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결국 생활에 대한 의지도, 삶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린 채 나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죽을 생각을 했다. 급기야 자살을 기도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 당시 마을에서 유일하게 나를 도와주려고 애를 썼던 동네 형님이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쌀이며, 잡곡을 가져다 주셨던 형님은 병원에 실려가 누워 있던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렇게 해서 죽는당가? 죽을라믄 OOO를 마셔야제. △△△ 마시고 죽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람 목숨이 그리 쉽게 끊어진당가? 남 탓 하지 말고 나가서 동네 길가라도 시원허게 쓸어 봐. 사람이 어찌 그리 어리석어?”

 그날 얼마나 울었던지. 나만 기다려온 가족들을 볼 낯도 없고, 나 스스로도 너무 부끄러워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퇴원하고 난 후부터 나는 집에 있던 빗자루를 들고 나가 동네 어귀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태풍과 폭설이 내리는 날에도 꼬박꼬박 나가서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며 청소를 한 기간이 3년. 새벽에는 마을 청소, 오후에는 각종 농업교육을 받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자 나는 어엿한 그 동네의 일원, 한명의 농민이 돼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땅을 빌리고 정부 지원도 받아 ‘풀향기 미술관 딸기농원’을 꾸렸다. 내가 지금까지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사회적 농업’의 미약한 시작이었다. 귀농하기 전에 화랑을 운영하며 미술 공부를 했던 때의 경험을 살리려 했다.

 그래서 딸기 농장 옆에 조그만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비닐하우스를 나의 소중한 미술관으로, 생활공간으로, 딸기 판매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또한 농장을 운영하면서 전남대학교 농업 최고경영자(CEO) 과정과 농촌진흥청의 강소농(强小農) 과정 등을 등을 수료했다. 이런 기간을 거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농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사회적 농업’이었다. 내가 꿈꾼 ‘사회적 농업’은 소비자(고객) 중심의 농업이었다. 한마디로 소비자와 함께 공감하고 공유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면 소비자가 농촌 생활을 어느 정도 느끼고, 사회적인 공헌을 한다는 자부심도 느낄 것 같았다.

 나는 농민이 잘 살기 위해서는 농민 스스로가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마음 맞는 농민들과 함께 들녘영농조합을 만들었다. 처음엔 욕도 얻어 먹었고, 시행착오도 참 많이 겪었다. ‘사회적 농업’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영농조합을 운영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말만 번지르르한 농업 사기꾼(?)이 나타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자발적으로 나서서 돕겠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내가 구상한 것들을 실천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우선 조합원들의 농작물 직판 대금 중 7%를 적립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적립금은 사회 환원 차원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쓸 예정이었다. 직판 주문을 하는 소비자들에게는 판매대금의 일부를 적립한다는 것과 그 금액이 장학금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수시로 전했다. 그러자 ‘좋은 일 한다’는 칭찬과 함께 소소한 모금액을 건네는 고객들도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조합원들의 소득이 올라가고 적립금도 꾸준히 쌓였다. 드디어 연말에 그동안 모은 적립금을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형태로 전달했다. 소비자들에겐 적립금의 사용 내역 등을 소상히 알렸다. 자신들이 간접적으로 기부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회적 농업을 위한 사업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성공할 수 있었다.

 들녘영농조합이 안정궤도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시작한 일은 재능기부와 멘토링 활동이었다. 주변 지인들과 조합원들은 미술 재능을 살려 장성군 지역 장애인을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제안했다. 때마침 농원을 찾아온 장성군 사회복지관 선생님 역시 농장을 둘러보다 아이들을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큰 고민 없이 바로 컨테이너를 들여와 장애인들을 위한 미술 교실을 만들었다. 매주 한번씩 장애인들이 오면 하던 농사일을 다 제쳐두고 성심성의껏 색깔 배치부터 도형, 선 그리기 등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사회복지관 아이들을 가르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나는 아내와 상의해 복지관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관리하면서 재배·판매까지 할 수 있도록 비닐하우스 한동을 ‘장성군 장애인 자립 딸기농장’으로 제공했다. 아이들이 오는 날에는 나와 아내가 직접 딸기 모종 심는 방법과 수확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며 함께 농사를 지었다. 수확철이 되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초대한 복지관 선생님들과 다른 친구들 앞에서 딸기를 따는가 하면 포장까지 해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 이 자활농장은 아이들에게 텃밭을 일구는 재미와 노동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경제적인 자립까지 경험해 볼 수 있도록 한 소중한 체험의 장이 됐다. 또 다른 프로그램인 멘토링 활동은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귀농 선배로서의 경험과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운영한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농업·농촌의 현실과 귀농할 때 주의하고 고려해야 할 점 등에 관한 내용들을 올렸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최근엔 귀농을 꿈꾸는 30~40대 젊은이들이 농장을 자주 방문한다. 그래서 지금은 장성군과 협력하여 들녘영농조합 차원에서 귀농에 대한 문의를 받고 있다. 농장 실습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우리 농장에서 실습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최근엔 우리 조합의 귀농 실습 프로그램을 통해 장성군으로 귀농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

 혹자들은 내가 농사꾼인지, 미술 선생인지 모르겠다고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농민으로서 항상 무언가를 시도하고, 뭐 하나라도 더 해보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사회적 농업을 내세운 것은 농산물을 하나라도 더 팔겠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나와 더불어 모든 농민들이 노력하고 고생한 만큼의 보상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이젠 농업도 변화해야 한다. 사회적 농업을 위하여,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위하여. 그것 하나만이 내가 바라는 희망이다.

   
  [최종편집 : 201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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