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필리핀의 작은 시골마을 다바우에서 2남5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오토바이 운전을 하시고, 어머니는 농사지은 채소를 시장에 내다 파셨다. 형제들은 모두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찾던 중 마닐라에 있는 금융회사에 운 좋게 합격했다. 기쁘고 들뜬 마음도 잠시. 막상 직장에 다녀 보니 가족 생각에 외로운 데다 직원들과의 인간관계 등 힘든 점이 많았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인지라 차츰 동료들과 정도 들고 일도 잘 적응해 가던 중 사촌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이 만남이 내 운명을 바꿀 줄 꿈에도 몰랐다. 일을 마치고 두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사촌언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피곤해서 잠이 들어버렸다. 밖이 시끄러워서 일어나 보니 낯선 아주머니가 자신은 국제결혼회사에 근무한다며 한국사람 한번 만나 보겠느냐고 물었다. 한국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탁하면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다.

 담양이라는 시골에 살고 있다고 밝힌 남자가 영어로 “헬로. 하우 아 유!”라고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 또 성경책까지 들고 있었다. 그때부터 긴장이 풀리고 방안에 둘만 있는데도 오래전부터 만나온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담양 남자는 나를 안아주며 볼에 뽀뽀를 해 줬는데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향해 웃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지만 결혼에 대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헤어졌다.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나를 향해 웃던 담양 남자 생각이 나서 결단하고, 친구들과 함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는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부모님께는 전화로 알렸는데 아버지가 심하게 화를 내셨다. 나를 사랑하셔서 화를 낸다는 것을 알기에 아버지께 남편이 교회 다니며 착한 사람이니까 저를 믿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남편의 비자 날짜가 다돼 우리는 헤어졌다. 몸이 떨어지니 불안하고 보고 싶어 빨리 한국에 가고 싶은데 비자 발급이 너무 복잡하고 더디었다. 3개월 동안 준비해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남편 고향인 전남 담양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어떤 집에서 살게 될까? 가족들은 어떨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됐다. 시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남편은 시어머니와 여동생이랑 함께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가족이 됐으니 진심으로 대하면 점점 좋아질거라 마음먹고 편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미소는 어디서든 통하리라 생각하고 항상 웃었다.

 시어머니께서 국제학교에 보내 주셔서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며 여행도 많이 다녔다. 아는 글자들이 늘어나니 간판을 읽으면서 집에 오는 길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공부가 끝나면 국제 친구들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도 먹으러 갔다. 남편과 함께 교회도 갔는데 교회 어르신들이 많이 사랑해 주셨다. 들었던 말 중 가장 기쁜 말은 “딤딤, 남편 얼굴이 항상 어두웠는데 네가 온 뒤로 많이 밝아지고 행복해 보여”라고 말해 주었을 때다. 한국에서 결혼생활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힘들고 그로 인해 화병까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 집은 반대였다. 어머니는 항상 내 편이셨고, “고맙다 아가야, 네가 우리 집 복덩어리다”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 심지어 남편하고 싸울 때도 어머니는 내 편이다.

 시집온 지 5개월이 되도록 아기가 안 생겨 스트레스를 받다가 기다리던 아기가 생겨 기뻤지만 입덧이 심해 학교도 그만두고 멀미 때문에 여행도 못 다니게 돼 한편으로 슬펐다. 임신했다고 하니 모두들 맛있는 음식을 사 주고 축하해 주며 귀하게 대우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태교를 했다.

 2009년 2월 한국에 온 지 10개월째 되던 날에 면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담양 여성회관에서 필리핀 이주여성들을 위한 일자리를 제공한다며 영어 필기시험과 면접을 본다는 것이었다. 40명 중에서 9명만 뽑는다고 하니 긴장이 되고 더 떨렸다. 포기하고 있는데 나를 가르쳐 주신 방문선생님께서 합격했다며 축하해 줬다. 가족들도 모두 기뻐해 주고 나도 너무 기뻐서 춤을 췄다.

 그해 4월 창평초등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말을 잘 안 듣고 질문할 때 당황스러웠고, 내 앞에서 싸울 때 난처했다. 학생들 앞에서 울기도 했으며 창피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끝까지 참고 열심히 가르치다가 아기를 낳는 달이 되어서 3개월간 쉬게 되었다.

 2009년 7월19일 0시25분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예쁜 예진이를 낳은 날이다. 아기 낳고 어머니가 정성껏 끓여 주신 미역국과 뼈국물을 많이 먹었다. 그리고 아기 돌보기, 빨래, 청소 등을 모두 아가씨랑 시어머니랑 남편이 해줘 참 편했고 고마웠다. 3개월을 쉬고 아기를 아동 도우미에게 맡기고 다시 영어강사 일을 시작했다. 아기 낳았다며 나라에서 돈까지 주었다. 일년 계약직이기 때문에 다시 시험을 봐 운 좋게 합격해서 일을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시댁은 분위기가 조용했지만 이제는 항상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외국에서 시집온 친구들이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다. 이웃 마을에 사는 친구가 이혼하려고 한다기에 내가 친구의 남편을 만나서 친구 마음을 알려줘 이혼을 막은 일도 있었다. 내 생각에는 가정의 문제이니 스스로 해결하라고 방관하지 말고, 면사무소나 여성회관 등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오해를 풀도록 도와주면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곳 담양은 슬로시티로 지정돼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데 내가 안내해 줄 때가 많다. 운전면허도 따서 노인회관을 찾아 춤추고 노래하는 봉사활동을 다닌다. 필리핀 친정에도 다녀왔고, 또 갈 예정이다. 시어머니께서 “내 딸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실 때는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얼마 전 결혼한 아가씨도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지 모른다. 한국말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 한국어시험 3급에 합격했다. 시집오거나 이주해 오는 여성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다. 서로 틀린 게 아니고 다르다는 것을 잘 이해시켜 주는 좋은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우리 어머니, 남편, 딸과 함께 진정한 한국인으로 한국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겠다.

   
  [최종편집 : 2011/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