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 달성군에서 유기농 블루베리와 쌈채류를 재배하는 농민이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주는 신지식농업인상과 농협중앙회로부터 새농민상을 수상했다. 내가 생산하는 농산물은 대구광역시로부터 유기농 명품 농산물인증을 받았다. 그러나 상보다는 유기농업에 바친 내 삶을 더 인정받고 싶다.

 할아버지는 산골에서 넓은 땅에 농사를 지으셨고, 아버지는 교직에 계셨다. 장손인 나는 할아버지 밑에서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지도 못한 채 농사일을 맡았다.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가업이던 농업을 본격적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해마다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 물에 잠긴 토마토·오이·수박 등의 농작물을 하나라도 건지려 아침부터 밭에 나가 이것저것 챙겼다. 물이 다 빠져나간 후엔 하우스 비닐을 새로 씌우고, 씨앗을 다시 파종해야만 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해복구에 매달리는 일이 해마다 반복됐다.

 새벽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해도 수입은 거의 없었다. 일꾼들에게 일당을 주려면 오히려 돈을 꾸러 다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돈을 꾸러 갈 때면 으레 듣는 말이 있다. “너는 일꾼을 부려서 일해야 할 만큼 많은 땅을 소유한 부자구나.” 부자로 보는 남들의 시선이 너무 싫었다. 종갓집 외아들로 태어나 누나와 여동생을 출가시키고, 교편을 놓으신 뒤 지방 정치를 하시는 아버지 뒷바라지를 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아들딸 등 일곱 식구를 부양하느라 내 어깨는 점점 무거워졌다.

 하지만 열심히 일했고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던지 어느 해에 풍작을 이뤘다. ‘아! 이 정도면 일꾼들 일당은 나오겠구나’ 했다. 하지만 나만의 풍작이 아니었다. 가격은 말 그대로 ‘똥값’이었다. 힘들여 수확한 채소는 하루 만에 시들어 폐기물이 됐고, 나는 ‘이 불안정한 유통구조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땀 흘려 재배한 농산물이 가치를 인정받을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폐기되는 현실이 참담하고 슬펐다.

 불안한 유통구조를 개선할 능력이 없다면 이 유통구조를 뛰어넘을 나만의 경쟁력이 필요했다. 남이 달릴 때 같이 달리면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남과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도 경쟁이 되지 않는다면 아예 남들과 경쟁 자체를 하지 말자.’ 나는 똑같은 농산물이 아닌 ‘나만의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알리고자 경쟁력을 키우기로 했다. 20년 전 유기농업에 발을 디딘 이유다.

 유기농업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재배 작목도 쌈채소로 바꿨다. 작물이 병충해로 말라 죽어도 농약을 뿌리지 않았다. 이런 나를 남들은 바보라고 했다. 일년에 농작물을 1㎏조차 수확하지 못해도 풀을 뽑고 거름을 줄 뿐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 자신이 농작물에 대한 확신이 없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도 내가 키운 농작물을 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관행 농법보다 4배가 넘는 비용을 들여 농작물을 키웠지만 절반도 안되는 가격에 팔 수밖에 없었다. 유기농산물이라면 약간 상품가치가 떨어져도 인정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기농으로 재배해도 상품성은 농약을 친 농산물만큼 우수해야 한다는 게 시장의 논리였다.

 유기농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이처럼 열악했지만 나는 유기농산물의 상품성을 높이고자 온 힘을 다했다.

 하늘과 토양도 배신하지 않았다. 자연은 건강한 유기농산물을 선물했고, 나는 자신 있게 시장에 내갔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농산물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오히려 농약을 친 농산물보다 상태가 더 좋으니까 믿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정직하게 생산한 농산물이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외면당하는 법이다. 나는 유기농인증을 받았다. 여기에 포장까지 제대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나는 유기농업을 더 연구하고, 더 많은 종류의 농작물을 유기농법으로 생산해야 할 책임감과 필요성을 느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수익이 없는 일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포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유기농업의 중요성과 유기농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해 나갔다. 그렇게 ‘대구광역시 친환경농업연구회’가 출범했고, 나는 회장을 맡아 열심히 뛰었다.

 그런 성과를 거뒀지만 유기농산물은 여전히 제때 팔리지 않아 거름으로 썩어 갔다. 나는 주문자생산 방식에 뛰어들었다. 인터넷 장터와 연계해 소비자로부터 주문을 받아 수확하는 것이다. 농작물은 뿌리가 잘린 채 하루가 지나면 폐기물이 되지만, 밭에서 하루 이틀 더 크는 것은 괜찮다. ‘선 주문, 후 생산’은 유통에 대한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나는 학교마다 찾아가 어린이들의 급식을 유기농으로 바꾸도록 교장선생님께 요청했다.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교장선생님들도 지속적인 방문과 설득을 통해 유기농산물의 가치를 알게 되면서 마음을 돌렸다. 그렇게 유기농산물의 급식 납품도 하나둘 늘려 나갔다.
현재 농장 옆에서 작은 식당을 6년째 운영중이다. 식당을 통해 유기농업이 우리 미래와 우리 몸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소개하고 있다.

 2009년 겨울, 나는 갑상선암 선고를 받았고 임파선까지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병마와 싸워 이겨냈다. 수술 후 지금은 많이 회복돼 농사일과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내 이름 ‘황경동’ 석자가 브랜드가 된 유기농산물로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싶다. 한국의 유기농업을 대표하는 신지식인으로서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고, 농민의 생활이 좀 더 안정될 수 있게 돕고 싶다. 또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외국산 농산물의 위협이 시시각각 닥쳐오는 상황 속에 농민들이 농업을 지킬 수 있도록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

   
  [최종편집 : 2011/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