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 54·경남 함안군 군북면 >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머슴살이(직장생활)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예전에 가슴에 뿌려 두었던 귀농이라는 싹이 내 몸에서 슬슬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가 마흔두어살 때의 일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하루, 온종일 컴퓨터에 앉아서 주식 시세나 보고 가끔 인터넷이나 보면서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료했다. 머슴살이에 대한 회의가 나날이 깊어갔다.
그러다가 학창시절 읽었던 <갈매기의 꿈>을 다시 만나면서,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몸짓이 결국은 뱃전에 서성이면서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를 받아먹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주린 배를 안고 더 높고 빠르게 나는 방법을 연마하던 갈매기 조나단과 같이 내 삶의 정체성을 찾고자 귀농을 결심했다. 귀농하겠다고 말을 꺼낸 지 3년 만인 마흔다섯살, 내키지 않아 하는 아내의 동의를 받아 2001년 10월26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영운리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귀농의 목표를 ‘자급자족,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성공’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늬만 농사꾼이 아니라 농사로 끼니를 이어가는 농사꾼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농사를 지어 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농협 빚은 가능한 내지 않는다 ▲ 소득 범위 내에서 지출한다 ▲ 가능하면 현금 지출이 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귀농 첫해 여름, 마을에서 들깨 모종을 얻어다 심었다. 그런데 한낮에는 폭 고꾸라져 죽은 듯이 있다가 해거름에는 고개를 좀 들고 다음날 아침에는 꼿꼿이 서 있었다. 그렇게 네댓새 몸살을 앓더니 드디어 새 뿌리를 내리고 제자리를 잡는 걸 보면서 나의 귀농도 그러리라 예감했다.

정말이지 새 뿌리를 내리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 1년여는 아내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늦게 시작한 아내의 학업 때문이었다. 시골서 홀로 살고 계시던 둘째형님과 둘이 살았기에 자연스레 주방은 내 차지가 됐다. 온종일 일하고 세끼 밥에 새참까지 챙겨 먹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고달프고 힘겨운 일이었다. 시골살이는 몸이 마르고, 도시살이는 피가 마른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귀농 가족은 형님과 아내, 닭·오리·거위 따위가 수십마리, 그리고 개 두마리다. 농사는 대체로 형님과 둘이서 짓고 있는데 밤산 2만6,000㎡(약 8,000평), 과수원 6,600㎡(약 2,000평), 밭 2,300㎡(약 700평), 논 4,300㎡(약 1,300평) 규모이다. 간간이 감식초며 간장·된장도 지인들에게 팔아서 얼마간 돈을 벌고 있다. 연간 조수입은 대략 1,500여만원, 많을 때에는 2,000여만원이 되는 것 같다.

귀농한 첫해에는 관행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약대를 잡고 감나무에 농약을 뿌리는데 완전히 농약을 뒤집어쓰고 네댓 시간을 견뎌야 했다. 아무리 마스크를 했다 하더라도 내 몸속에 들어가는 농약을 막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첫해 농사를 지어 보고선 형님과 상의해 다음해부터는 무농약으로 과수농사를 짓자고 말했다.

그런데 무농약 농사가 이렇게 힘겨운지는 미처 몰랐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비탈진 밤산과 과수원, 밭과 논의 풀을 일일이 예초기로 베든지 호미나 손으로 뽑아야 하는데 이 일이 만만찮았다. 무농약이라 해서 봄에 심어 놓고 가을에 거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추출 퇴비를 직접 발효시켜 만들어서 뿌려줘야 하는데 이 일 또한 녹록지 않았다. 농사일 자체도 버거운데 농업용 자재를 손수 일일이 만든다는 것은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힘들게 무농약 농산물을 생산했어도 일반 시장에는 내다 팔기가 어려웠다. 크기도 작고, 모양새도 흠이 많아 소위 상품으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막상 첫해 무농약으로 감농사를 지어 보니 감식초와 목초액·석회유황합제만으로는 열매를 제대로 키워낼 수 없었다. 감이 빨리 익어 물러지기 쉬웠고, 떨어지는 감도 엄청나게 많았다. 관행농으로 하면 10t 정도는 나올 양인데도 첫해는 6t 정도 나왔다. 다음해에는 더욱 처참해 겨우 2.5t만 나왔다. 참담한 실농은 지난해까지 이어져 10㎏ 상자로 아홉상자만 수확해 선물로 보내고선 농사를 접어야 했다.

이런 처절한 실농과 무농약 농사의 고달픔 속에서 잃은 것도 많지만 느끼고 얻은 것도 엄청나다.
무엇보다도 세상일에는 고귀한 일과 비천한 일이 나눠져 있지 않다는 것, 또 여자 일과 남자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다만 힘든 일과 심(心)든 일이 있음을 알았다.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은 나 혼자 잘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됐다. 머슴으로 살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보지도 못했던 반대편 삶의 모습을 경험한 것이다.

귀농 후 잃은 것들로는 편리하고 안온한 삶, 풍족한 월급봉투, 좀 우습지만 사회적인 지위, 그리고 아내가 제일 아쉬워하는 윤기 흐르는 둥근 얼굴 따위가 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귀농 후에 얻은 것들이 참으로 많다.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하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한여름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차가운 샘물에서 씻을 때, 고된 하루해를 접으며 식구들끼리 맛난 저녁상을 대할 때 ‘아, 오늘도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행복의 씨앗이 고통과 고난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또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맑은 공기·샘물·별빛·햇살 따위를 얻었다. 그리고 도회지에선 생각도 못하던 된장·고추장·청국장 따위를 담그고, 온갖 산야초로 차도 만들고 나물도 해 먹을 줄 알게 됐다.

가끔 도회지의 친구들이 묻는다. 귀농을 후회한 적이 없느냐고. 물론 후회를 한 적도 있다.
함께 일하는 형님이 감나무 가지치기를 하다 떨어져 의식을 잃고 119 구급차에 실려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을 때, 또 연약한 동생을 대신해 힘겨운 일을 도맡아 하시다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수술대에 오른 형님을 봤을 때는 후회가 됐다.

그래서 지금의 생활을 100% 만족하며 살지는 않는다. 시골살이하기가 봄·가을은 참으로 좋지만 여름·겨울은 참으로 싫듯이, 힘겹지만 50%의 만족으로 형님과 아내, 셋이서 나름대로 행복을 일구며 아직도 시골에서 살고 있다.  

   
  [최종편집 : 201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