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오 61·충북 괴산군 괴산읍>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가 복싱체육관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운동을 익혔다. 그렇게 배운 어설픈 실력은 항상 ‘사고뭉치’라는 수식어로 따라붙었다.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던 난 주먹질이나 일삼는 탕아가 됐다.

남들보다 결혼을 늦게 한 나는 1980년 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그래도 탕아를 내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주었다. 하지만 땅 한평 없는 내가 무엇으로 처자식을 먹여살릴까 막막하기만 했다.

무위도식하는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여동생 내외가 노지로 재배하던 10α(300평) 표고버섯 밭을 넘겨줄 테니 키워 보라고 했다. 농사라곤 한번도 지어보지 않아 겁이 났지만 딸린 식구들 때문에 사양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처음 시작한 표고버섯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표고가 하얗게 올라오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참나무에 흰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웠다. 통통한 표고들을 보면서 지금껏 방황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왜 진작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좋은 일엔 마(魔)가 낀다고 했던가. 누군가 잘 자란 표고만을 골라 따 가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다 자란 것만 골라서 훔쳐 가더니, 나중엔 미처 크지도 않은 것까지 싹쓸이해 갔다. 하늘은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만을 안겨 주실까. 지난날 내가 저지른 업보 때문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고민 끝에 표고밭을 옮기기로 하고 재배방법도 바꾸기로 결심했다. 체계적이고 내실 있게 농사를 지어보자는 생각도 들었다. 표고를 키우기 적합한 자리부터 물색했다. 그러다가 괴산읍 제월리의 밭 6,600㎡(2,000평)가 눈에 띄었고, 밭주인을 찾아가 임대해 달라고 부탁했다. 밭주인은 건달처럼 떠돌던 내가 표고를 재배하겠다는 말을 처음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간곡히 부탁하자 내 청을 들어주었다.

밭에 10α(300평)짜리 시설하우스 6동을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종균까지 넣으려면 적어도 3,000만원은 있어야 했다. 고민하던 차에 정부에서 표고 농가에 자금을 저리로 융자해 준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융자받기 위해선 그동안 농사(표고 재배)지은 실적이 있어야 했고, 만약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했을 경우 변제 능력(재산)이 있는 보증인을 세워야 했다.

모든 게 절망이었다. 하지만 막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아들딸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웃마을에 사는 친구를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는데, 고맙게도 선뜻 보증을 서 주었다.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표고 재배가 실패로 끝난다면 그 부담을 친구가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20년 우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각오했다.

융자금이 나오자 비닐과 철골·재배목을 구입하고, 한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작업은 아내와 내가 했다. 하지만 융자금은 하우스 시설자재를 구입하고 나니 바닥이 나고 말았다. 재배목과 종균 대금은 또다시 친구에게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돈으로 재배목에 종균을 넣고 그 재배목을 하우스 안에 세우는 작업을 해야 했다. 50㎏이 넘는 재배목을 혼자서 들어 세우려면 허리가 휘청거렸지만, 내 하우스가 생긴다는 사실에 힘이 절로 솟았다.

하우스가 들어서자 가슴이 뿌듯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선배 농가들의 말을 받들어 하우스 4동에만 종균을 넣었다. 한꺼번에 종균을 다 넣으면 수확 시기가 겹쳐 일손이 부족할 우려도 있었지만, 버섯가격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출하조절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나머지 2동은 가을에 넣는 저온성 재배를 선택했다.

다행히 첫해 시세가 좋아 융자금 이자를 갚고, 친구에게 빌린 돈도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 이듬해 봄부터는 사계절 수확이 가능했다. 표고를 따는 날은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니 살만했다. 옛날처럼 술 마시고 돌아다니던 철없는 짓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친구에게 빌린 돈과 정부 융자금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지역에는 표고를 재배하는 농가가 다섯집이나 더 있었다. 나는 그들과 협의해 표고 운반용 1t트럭을 구입하고, 영농법인(작목반)도 설립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영농법인 설립 허가가 나온 날, 동료들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영농법인이 설립되니 정부지원이 늘어났다. 농협에선 자체 트럭으로 서울까지 운송해 주고 자재도 실어다 줘 큰 도움이 됐다.

표고 농사가 순항하는가 싶었는데, 또 한번의 시련이 닥쳤다. 2004년 3월5일, 아침부터 내린 눈이 폭설로 바뀌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농장으로 향했는데, 눈 무게를 감당 못한 하우스 지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부랴부랴 지붕에 쌓인 눈을 쓸어내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하우스 전체가 넘어갈 게 뻔했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절체절명의 위기. 대나무 끝에 낫을 매달고 하우스 안에서 비닐을 긋기 시작했다. 낫으로 그어 나가면 ‘퍽’하고 엄청난 눈이 쏟아져 내렸다. 생살을 찢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었다. 하우스가 넘어가는 피해는 막을 수 있었지만, 수확하던 표고가 눈 속에 파묻혀 모두 얼어버렸다. 손실이 자그마치 2,000만원이 넘었다. 그래도 난 다른 회원들에 비하면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숱한 시련들을 뒤로하고 표고 재배면적을 늘려 현재는 1만6,500㎡(5,000평) 15동의 하우스에 표고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재배를 시작할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녀석이 군복무를 마치고 나를 돕고 있다. 표고 농사 10년만 지으면 직장생활 20년 한 것보다 나을 것으로 믿는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버는 것을 떠나 모두 농촌을 등지는 시대에 농사를 짓겠다고 달려드는 녀석이 고맙고 대견하다.  

흔히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나무도 마찬가지다. 충견(忠犬)처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참나무 재배목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것들을 쓰다듬는다. 주인이 버리지 않는 한, 참나무는 소담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나의 애정에 보답하리라.

   
  [최종편집 : 201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