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까지 책을 보다 새벽에 잠이 들어도, 저녁식사 후 커피를 마셔 잠을 설쳐도, 날씨가 흐려 밖이 환하지 않을 때에도 4시50분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이게 나의 삶이다.

1997년 어느 여름날, 남편은 지금의 축사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분이 축산을 하고 있어서 몇번 와 본 곳이지만 어쩐지 남편 표정이 심상치 않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7명이 영농법인을 구성해 축사를 짓게 된 이유와 앞으로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축사가 완공되면 소를 사 넣고 관리사를 지어 자기는 이곳에서 살 테니, 나는 아이들 데리고 광주에 살면서 가끔 와서 농장이나 둘러보라고 했다. 가축 기르는 일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데다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반대는 했지만, 이미 축사는 거의 완공 상태였고 남편의 의지가 너무 강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부모님과 친구들은 소값이 바닥인데 어쩌려고 소를 키우려느냐고 다들 걱정이었다. 그러나 1998년 8월14일 첫 입식을 시작으로 열흘에 걸쳐 암소 성우 29마리와 송아지 9마리를 입식했다. 막상 소를 입식하고 보니 임신우가 많아 소가 새끼를 언제 낳을지 몰라 도저히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이사를 해야 할지 말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가족회의를 열어 남편과 함께 조그마한 관리사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나에게 닥친 첫 난관은 남편의 교육이었다. 그해 10월 중순, 남편이 3주간 교육을 간다는 말에 소밥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교육 가는 날 아침 영암터미널에 남편을 태워다 주고 집으로 오는데 왠지 모를 불안함에 눈물도 흘렸다. 그날 오후부터 3주간 농장일은 내 차지가 됐다. 다행히 소가 많지 않아서 일은 할 만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스키드로더(운반장비)에서 퇴비 치우는 기구를 빼내려다가 그 기구의 날카로운 부분이 왼쪽 발등을 찧어 잠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세발로 기어 나와 남편에게 알리고 인근 병원을 찾았는데, 발목을 잘라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응급처치만 해서 광주의 대학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절단수술은 피했지만, 아직도 다친 부분이 내 살 같지 않고 발바닥에 껌을 붙이고 다니는 것처럼 감각이 무디고 통증이 남아 있다.

1999년 가을이 되어 시골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우울증이 온 것이다. 고립된 섬에 갇힌 듯한 답답함에 나는 점점 못난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신문을 보다 우울증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럴 수가! 바로 내 상태와 똑같았다.

저녁때 남편에게 신문을 보이며 얘기를 꺼내자 남편은 “내일부터 차 가지고 읍내에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광주에 있는 작은아이에게도 가고, 쇼핑도 하라”고 했다. 특별히 읍내에 나갈 일은 없었지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양축일이 익숙해지고 둘째아이가 고 3이 되던 2002년, 남편과 친정식구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에 입학하게 됐다. 무더운 여름에는 더위가 한창인 오후 3~4시까지 일을 하고 학교에 가야 했지만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매 학기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도 받고, 야간 대학생에게는 어렵다는 조기 졸업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소가 100마리가 넘어 1,200㎡(363평)의 축사가 좁아 2003년 11월 2,200㎡(666평)의 새 축사를 완공했다. ‘소 100마리가 되면 백화점에 가서 남편에게 좋은 양복 한벌 해 주리라’ 혼자 마음먹었던 것을 98마리째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양복 한벌로 어찌 그간의 노고를 위로할 수 있으랴마는 정말 기뻤다. 아직 부채는 남아 있지만 이제 여러가지 면에서 안정을 찾고, 한 가정이 관리하기에 적당한 성우 90여마리, 육성우와 송아지 40여마리를 기르고 있다.

2005년에는 제대하고 복학한 아들의 도움을 받아 농림부 여성농업인 교관반에 등록해 교육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심화과정까지 마쳤다. 전국에서 30여명의 여성농업인들이 모였는데 농업인만이 갖는 순수함과 직업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친해지고 많은 정보도 교환했다.

2009년 이주여성들이 한글 공부를 하고 싶은데 적당한 장소가 없어 고민하는 것을 보고, 마침 읍내에 우리 소유의 작은 집 2층이 비어 있어서 그해 3월14일 ‘영암다문화가족쉼터’라는 이름을 내걸고 개원했다. 현재 이주여성 13명이 등록해 공부중이다. 교사는 자격증이 있는 대학 동문이 일주일에 2회 한글 교육을 담당하고, 주 1회는 오후에 한지공예·음식 만들기 등 취미교실을 열어 정서 함양을 돕고 있다.

이주여성들을 만나다 보니 그들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자녀 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돌봄과 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방법이 무엇일까 고만하다가 군내 다른 읍·면에는 지역아동센터가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면에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모았고, 마침 보건지소가 새 건물로 이사를 하고 비어 있어서 그곳을 군으로부터 빌려 2009년 11월1일 ‘덕진지역아동센터’를 개원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것을 실감해 너무 기뻤고, 지역아동센터를 통해 여러 복지재단과 연결해 다문화가족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도 보람 중의 하나다.

이제 한국의 농업도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농업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별화가 필요하고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축산을 한 지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아 축산에 관한 내용을 <농민신문> <축산신문>과 월간지인 <종축개량> <월간축산>, 인터넷의 축산연구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유용한 정보를 스크랩해 뒀다가 필요할 때 다시 읽어 보면서 누렁이들에게 적용해 본다.

새벽 4시50분에 일어나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남편과 축사로 나간다. 아침 농장일을 마치면 집안일을 하고 10시쯤 지역아동센터로 출근한다. 이주여성과 아이들과 오후를 보내고 저녁 나절 집으로 와 남편과 함께 농장일을 마무리하면 하루가 끝난다. 조금만 늦잠을 자도 하루 일과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늘 시간을 재촉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병행하고 싶다.

우리 농촌으로 시집와서 한국 여성들이 도시로 떠난 빈자리를 채워 주는 이주여성농업인들의 삶에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싶다.

   
  [최종편집 : 2011/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