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부귀면 >
 
 

저는 11년 전에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아지백코바 굴바르친이라고 합니다. 현재 전북 진안에서 남편, 세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13년 전, 고향에서 한국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알고 지내게 됐습니다. 그분들에게 남편을 소개 받았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생소한 나라였습니다. 고민 끝에 결심을 하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왔습니다.

남편의 첫인상은 편안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완전 골짝에 있는 농촌이었고 젊은 사람들은 찾아볼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웠지만, 남편의 느낌이 좋았고 조건을 보고 온 것도 아닌 만큼 한국어를 배워서 저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경찰도 되고 싶고 아나운서도 되고 싶고, 꿈이 많았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글을 잘 쓴다고 작가가 되라고 조언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무렵 소련이 붕괴되어 가고 싶은 모스크바대학에 가지 못했고,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 있는 공과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석사·박사 다 하고 싶었지만, 운명인지 상상도 못했던 국제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 그것도 농촌에 와서 아이 낳고 사는 일이 정말 두려웠지만, 늘 남편이 옆에서 힘이 돼 줬습니다. 시어머님은 따로 사셨지만 음식도 자주 해 오시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입에 안 맞는 음식이 걱정되셨는지 어느 날 저에게 물어보시더라고요. “너희 나라에서는 뭘 먹냐?”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양고기요.” 라고 대답하자, 시어머님은 다음날 염소를 통째로 잡아 오셨습니다. “양이 없으니 ‘꿩 대신 닭’이라고 이거라도 먹고 기운 내라”며. 저는 너무나도 감격해 시어머님이 가신 후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과 식구들이 많이 도와줬지만, 고향 사람이 주변에 없다 보니까 너무 외로웠습니다. 앞으로 올 후배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어를 빨리 배우기로 마음먹고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수십개씩 단어를 외우고 문법·동화책을 동원해 가며 지독하게 공부를 해 3개월 뒤에는 대화가 가능했고 1년 뒤에는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말이 통하니 조금이나마 외로움을 덜 수 있었고, 이주여성들의 통역도 해 줄 수 있게 됐습니다.

세아이를 낳으며 6~7년 동안은 아이 키운다고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그 이후 날이 갈수록 다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왔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며 제가 할 일이 줄어들자, 저는 이 농촌에서 젊은 나이를 허무하게 보낼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데리고 읍내 문화센터를 오가며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한국어가 가능한 만큼 운전면허에도 도전해 한번에 필기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외국인도 할 있구나’ 하는 자신감에 한국어능력시험(6급)도 봤는데, 당당히 합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격증 도전이 계속되는 동안, 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농촌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007년, 남편이 고추 농사를 접고 오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오이는 고추와 달리 매일 수확을 해야 하더라고요. 아이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 놓고 남편하고 둘이 오이를 수확·선별해서 포장해 두면 농협에서 가져갔는데, 그러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오이를 보며 농사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동네에 오이 농사를 하는 집이 우리밖에 없어서 동네 어르신들과 오이를 나눠 먹었습니다. 동네 할머니들께 오이를 드리면 그분들이 김치를 담가 되가져오시고, 그것을 계기로 그동안 서먹서먹했던 분들하고도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한가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일본에서 온 선배 언니가 남편과 농사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오사카 시청에 근무했던 공무원이었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물어봤습니다. “농사짓고 사니까 한국에 온 게 후회되지 않으세요?” 그분은 대답했습니다. “농사는 저에게 꿈이에요. 농촌에서 이룰 꿈이 있어서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저는 그동안 농촌을 절망의 땅이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너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든 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꿈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저도 남편한테 도시로 이사 가자는 말을 다시는 안하고, 여기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009년 봄, 우리 가정을 잘 아는 부귀농협 지도과장님이 저에게 “농사도 좋지만 한국어도 잘하고 이웃들하고도 잘 어울리니 8월까지 한달에 한번씩 농협대학에서 ‘다문화 성공사례’ 강의를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한국어도 되고 컴퓨터 자격증도 몇개 가지고 있어 강사로 활동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아서 받아들였습니다. 농협대학 강사 활동은 이후 소문이 나 요즘도 간간이 다른 기관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옵니다.

그해 7월 진안군 보건소에서 영어통역요원을 구한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고향은 러시아어권이지만 대학교에서 영어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년의 보건소 근무를 마치고, 올해 6월부터는 새마을운동본부 진안군지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위로부터 슈퍼우먼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주말엔 남편의 농사일을 거들 수 있으니 삶이 행복합니다. 아이들도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이 공부 잘하면 도시에서 교육시킬 것을 권하지만 저는 농촌에서 학교 보낼 것입니다. 살다 보니 도시라고 다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성공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이들에게도 한발 뒤에서 여유를 가지고 꿈을 키우는 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농촌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는 저 자신과 남편의 노력도 있었지만, 말없이 뒤에서 응원해 주고 도움 주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 보답으로 저도 배운 것을 주변에 많이 나눠드리고, 특히 농촌을 꺼리는 이주여성들에게 농촌에도 밝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습니다. 이 글이 이주여성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최종편집 : 201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