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군 단촌면>
 
 

새벽 2시, 잠에 취해 있는데 이웃집에서 “비온다”는 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려왔다.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확한 양파는 물기가 스며들면 바로 썩어 버리기 때문에 애써 지은 농사를 한순간에 날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제 작업을 마쳐야 했다는 후회를 할 겨를도 없이 쓰지 않은 비닐 롤을 통째로 트럭에 싣고 부랴부랴 논으로 향했다. 온몸은 땀과 비에 젖어 흙범벅이 됐고 신발은 어디에 내동댕이쳐진지도 모른 채 맨발로 두시간 넘게 전투하듯이 양파를 덮었다. 초여름 새벽이지만 내리는 비에 한기가 엄습해 왔고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질 것만 같았다.

이윽고 여명이 밝아오자 아침밥도 먹지 않고 트랙터를 몰고 양파 논으로 달려갔다. 급한 대로 양파를 사과 컨테이너 상자에 넣어 트랙터를 이용해 실어 냈다. 집으로 가져온 양파는 대형 선풍기를 이용해 물기를 말려 가며 창고에 쌓았다. 탈진할 지경이었지만 전쟁을 치르듯이 일을 마치고 나니 가족 모두가 머드팩을 한 것처럼 흙투성이가 되어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8년 전, 나의 첫 농사는 그렇게 요란하고 힘겨운 귀농 신고식을 치르면서 시작됐다.

농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농사가 쉽다고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할 것 없으면 농사나 짓지’라고 할까. 나도 처음엔 농사를 그리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면 느티나무 아래 삼삼오오 모여 장기를 두거나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농부들을 보면서 ‘저렇게 한가로우니 늘 가난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지’라며 냉소를 지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마을의 어느 누구도 농산물을 내다 파는 일에 걱정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는 의문을 가졌다. 하루는 어머니께 농산물을 어디에 내다 파는지 물었다. 어머니의 답변은 오일장에 내간다는 거였다. 농산물이 거래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언제 장이 서는지 물었더니 이른 아침에 선다고 했다. 그래서 하루는 한차 가득 건고추를 싣고 아침 일찍 시장에 갔다. 한데, 내 일상으로 봐서는 무척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장이 된 후였다.

그때 나는 뭔가 큰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농부이자 내 이웃들을 그토록 마음속으로 게으르다고 조소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들은 새벽에 벌써 시장을 다녀왔고 식전에 많은 일을 한 후 내가 들에 나가는 무더운 시간에는 쉬엄쉬엄 농사일에 임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의 일과는 180도 바뀌었고, 올빼미형 인간에서 아침형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농사일이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 내가 농업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 단초는 중학교 때 은사님으로부터 가나안농군학교 얘기를 들은 것과 대학 시절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해 김선생을 만나며 농업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금융기관에 근무할 때는 잠시 농부의 꿈을 잊는 듯했다. 그러나 잠재해 있던 농업에 대한 열망은 조기퇴직을 종용했고, 이후 영농조합법인에 몸담으며 농산물 가공과 유통에 전념을 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 판매 방식인 홈쇼핑, 코엑스 식품박람회 참석 홍보 등 마케팅의 기본을 빠른 기간에 현장에 접목해 나갔다. 그에 따른 사세의 확장으로 회사는 세계농업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한편으론 직접 땅을 일구는 농부의 꿈이 가슴깊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꿈은 뜻밖에 아이의 교통사고와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빨리 찾아왔다. 농부에 대한 꿈은 가족의 불행 속에서 이루어진 아이러니인 셈이다.

농사 시작 후 아버지께서 하시던 대로 고추·양파·마늘·벼 등 복합영농을 했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힘이 들었지만 수익은 좀체 나지 않았다. 특히 고추는 8월 가장 뜨거운 여름날 따야 했고, 건조기로 밤새도록 말렸지만 더운 날씨 탓에 물러터지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열심히 농사짓는데도 못사는 이유는 뭘까….’ 바로 농촌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따져 봤다. 당장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작목에 매달린다, 이는 특정 작물의 과다생산으로 이어지고 가격하락의 요인이 된다, 계절노동력 수요는 항상 파종과 수확기에 집중된다…. 서툰 분석이었지만 그때 얻은 결론은 논에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논에 벼가 아닌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아마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더라면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일이었다.
일단 사과나무를 심은 이상 기술 익히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사과 관련 지식을 얻기 위해 사과연구소, 농업기술센터 등을 찾아다니며 그야말로 주경야독했다. 사과나무는 열매를 맺기까지 여러해가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필요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환금작물인 고추를 재배했다.

고추는 가격 등락이 여러번 있었지만 그래도 사과가 달리기까지 중요한 수입원이 돼 줬다. 이제 나는 2만3,000㎡(약 7,000평)의 사과원을 운영하는 사과 전업농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지난날의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의성군사과생산자연합회 사무국장을 맡아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내가 농업에 발을 들여놓으며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은 우리나라 평균 국민소득만큼은 수익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젊은 농군으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도시민과 비교해 소득면에서 뒤지지 않아야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세운 목표가 있었기에 무더위나 거센 태풍에 맞서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귀농 7년차인 2008년에는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다.

나에게는 또 다른 희망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진 굴레와 한계에서 벗어나 하나의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며 가는 농촌의 모습이다. 나는 늘 농업은 생명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모태가 되는 작은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들이 자라고 변해 결실을 맺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경이로운 예술이니까.

   
  [최종편집 : 2010/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