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단성면 호리>
 
 
내 어린 시절처럼 새파랗고 풋풋한 고추를 바라보며 오늘도 하루를 시작했다. 초록 빛깔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고 들어 왔지만 그 사실을 이리도 뼈저리게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올 줄 몰랐다.

이 비닐하우스 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록달록 빨그레한 딸기로 물들었었다. 향기로운 딸기 수확으로 난 새로운 희망을 찾았고, 이젠 고추 재배로 그 희망을 더욱 북돋고 있다.

여명이 밝아 오기 전, 시리도록 푸른 새벽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새벽을 가슴 가득 마시고 하우스를 향하는 내 발걸음은 언제나 힘차다.

부모님 모시고 농사지으며 농촌에서 뜻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 내 꿈이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고 아들 셋을 낳았다. 아는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집 가까운 곳에서 닭 3만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평소 꿈꾸던 나의 첫 사업이라 열심히 일했다. 어렸던 아들도 닭 키우는 일을 도왔다. 난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곤 한다.

“이놈들, 헬스장 안 가고도 튼튼한 근육 만든 건, 다 이 아버지 덕분이다. 아버지 멋있제?”

사춘기였던 큰아들은 몸에 밴 닭똥 냄새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 괜찮슴니더. 닭을 키운께 닭똥 냄새가 나지예, 소 키우는데 닭똥 냄새가 나겠씸미꺼?” 하고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랫마을부터 닭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죽은 닭을 실은 경운기가 우리 마을을 지나다니면서 우리 닭들도 하나둘 쓰러져 갔다. 하룻밤 자고 나면 200마리, 다음날은 300마리, 매일매일 닭들이 죽어 나갔다.

죽은 닭들을 보며 밤을 꼬박 새웠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닭 키우는 일을 접었다. 빚만 1억2,000만원이 남았다. 암담한 현실이 꿈만 같았다. 실의에 빠져 몇년을 방황했는지 모른다. 이런 나를 지켜보는 가족들도 힘들어했고 결국 아내와 이혼을 했다.

그때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 2학년, 그리고 일곱살이었다. 한창 엄마 손길이 필요했던 아들들은 스스로 알아서 밥 챙겨 먹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게다가 나를 챙기기까지 했다. 나를 바라보고 사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난 다시 용기를 냈다. 1992년, 두번째 느타리버섯 재배를 시작했다. 닭 키울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 밥을 안치고 하우스를 둘러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우스 165㎡(50평)짜리 한동 수입이 1,000만원을 넘어섰고 그 많던 은행 이자도 조금씩 갚아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버섯 포자 때문인지 밤마다 세녀석의 기침 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마도 없이 키우는 미안함 때문에 괴로웠고, 한잔씩 마시던 술의 양은 점점 늘어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버섯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결국 버섯 재배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빚은 어느새 1억5,000만원을 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없는 것일까.

1996년, 농촌 생활을 정리하고 버스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버스 운전기사 생활을 10여년 했다. 마음은 편안했으나 농촌에서 흙 밟고 살아가고자 했던 내 본능은 감출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리라. 죽기 전에 한번만 더, 농촌으로 돌아가리라.’ 이런 생각이 버스 기사를 하던 10년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용기 내는 데 10년의 세월이 걸린 것 같다.

이 시기에 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다. 아내가 데리고 온 딸과 아들. 그래서 난 다섯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는 늘 나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었고 다섯명의 아이들은 에너지를 주었다. 2008년 버스 기사를 그만두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전한 작물은 ‘지리산 약초 딸기’였다. 가까운 수곡마을 일대가 딸기 특화지역이기도 하고 평소 딸기를 좋아했던 것도 한몫을 했다. 달콤한 딸기 향기를 맡으며 아내와 함께 일하니 기쁨은 두배였다.

“딸기밭에서 이루어진 사랑은 평생 간다.” 이 말은 내가 그냥 지어내 아내에게 한 말이다. 더운 딸기 하우스일이 뭐 그리 향기롭고 달콤하랴만 아내는 딸기향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우스 11동을 임대하였고 그중 1,320㎡(400평)에 〈설향〉을, 나머지는 〈장희〉를 심었다. 딸기는 맛만큼이나 품종의 이름 또한 고왔다. 〈설향〉! 〈장희〉! 꼭 아련한 추억 속 첫사랑의 이름 같지 않은가? 이름조차 나를 이다지도 행복하게 하다니.

국산 품종인 〈설향〉은 로열티 절감이라는 애국적 이유도 있지만, 육질이 좋고 모양과 저장성이 좋으며 맛이 상큼해서 소비자들이 좋아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맛이다. 갓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설향〉을 추천한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새콤달콤한 〈설향〉의 향연에 감동할 것이다. 게다가 병충해에 강해서 생산자에겐 금상첨화였다.

일본 품종인 〈장희〉는 로열티 문제가 걸려 있고 쉽게 물러지는 단점이 있지만 이 품종을 좋아하는 소비자들도 많았다. 단맛이 강해서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병충해에 약한 편이었고 특히 진딧물과 나방에 약해서 애를 많이 먹었다.

딸기 농사를 처음 지어 보는 나는 다른 생산자보다 맛있고 질 좋은 딸기를 출하하고 싶었다. 생산자 ‘정성남’이라는 이름만으로 경쟁력을 갖춘 차별화되고 인정받는 딸기 말이다. 평생 책과 거리가 멀던 나는 서점을 찾고, 신문과 책을 뒤지며 친환경농법·무농약농법을 공부했고 성공사례를 연구했다. 생소한 전문용어가 나올 때는 딸과 같이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다. 그것을 토대로 발전해 가는 내 자신을 볼 때마다 50 평생 맛보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공부를 하는구나 싶었다.

우리 지역 딸기 맛이 다른 지역보다 좋은 이유는 물 좋고 공기 좋은 환경적 요인 때문이다. 땅에 화학비료를 뿌리기 싫어 우분 퇴비를 사용했다. 한차에 40만원 하는 한우분 퇴비를 11차량이나 사서 딸기밭에 뿌렸다. 돈은 많이 들었지만 딸기 맛은 확연히 달랐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새벽 세시든 네시든 눈이 떠지는 대로 하우스로 달려가 딸기에 물을 주고 하루를 준비했다.

딸기 하우스를 시작하고 3개월 만에 첫 수확을 했다. 첫 출하에 한상자당 5만7,000원을 받았다. 이 감격적인 순간은 몇십년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주말마다 아이들은 일을 도우러 왔고 우리는 딸기 농사로 1억6,000만원가량의 수익을 올렸다. 인건비에 퇴비, 기타 지출을 빼고 나더라도 꽤 많은 수익이다. 이 돈은 흔하디 흔한 돈이 아니라 우리 다섯아이들의 미래이고 우리 부부의 꿈이다.

딸기 재배가 끝나고 그 하우스에 고추를 심었다. 〈아삭이고추〉는 인기작물이었고 소득도 괜찮았다. 지금은 하루에 고추 100상자를 따내고 있고 가격도 안정적이다.

산청군농협 단성면 서부지역 작목반에서는 한달에 한번 회의를 한다. 농사일로 바쁘지만 이 모임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이다. 정보 교류도 교류지만 같이 농사짓는 사람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부부 동반 단합대회를 한다고 한다. 보통 하우스일은 부부가 같이하는지라 부부의 금슬이 곧 농사일의 밑거름이 된다고나 할까? 노래도 부르고, 보물 찾기 게임도 하는데 나에게 다른 게 보물이겠는가.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모두 보물 그 자체인데….

고추 농사가 끝나고 나면 아내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 만나자마자 하우스일을 시작했고 여러 이유로 결혼식을 생략했었다. 늦은 나이에 재혼하면서 무슨 결혼식이냐는 이야기들을 하겠지만 그것은 결혼식이라기보다 우리 아이들과 부부를 위한 축제의 개념이다. 외롭던 두가족이 모여 따뜻한 하나의 가족이 되는, 그리고 희망을 가지게 되는 축제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 다섯아이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린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처음일 수 있다. 인생은 살아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최종편집 : 2009/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