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시 파평면 덕천리>

   
 

“콰르릉! 콰르릉! 덜덜덜 찰찰찰”

신혼살림을 차린 지 열흘 남짓,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새벽 4시가 채 안된 시간. 창문 밖 큰 길에 탱크가 10여대 지나가자 방구들이 덜덜덜 울렸다. 방안 장식장의 그릇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흔들리는 소리에 나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옆에서 곤히 잠든 신랑을 흔들어 깨우며 다급하게 외쳤다.

“자기야! 자기야! 지금 그렇게 잠을 잘 때가 아니야. 빨리 짐을 싸서 피난을 가야 된다니까!”

자다가 흔들어 깨우는 각시의 다급함에 비몽사몽 일어나 앉은 신랑은 밖의 탱크소리를 듣자마자 더 알아볼 것도 없다는 듯이 나를 팔뚝으로 쓰러뜨렸다. 이내 잠에 취한 음성으로 “으~음 난 또, 별거 아냐. 자기 더 자. 며칠만 지나면 금방 익숙해질 거야”라며 금세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쿵쾅 쿵쾅’ 뛰는 가슴은 진정될 줄 모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까지 벌벌 떨고 있는 각시에게 이 무슨 황당무계한 조언인가. 우리의 신혼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파평은, 현재 군사보호지역에서 많이 완화되었지만, 28년 전 처음 이곳에 내려올 때만 해도 여기저기 출입금지 철조망이 걸려있고, 늦은 저녁이나 새벽녘이면 가끔씩 대남방송이 들렸다. 밥고리(도시락)를 이고 가는 아낙의 모습보다는 완전 군장한 군인들의 행렬을 더 많이 볼 수 있고, 정겨운 시골정취 보다는 6.25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휴전상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전방 마을이었다.

서울서 태어나 20여 년 넘게 학교와 직장 모두 도심의 한가운데로만 활보하던 내가 이런 곳에 삶의 둥지를 틀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사랑의 콩깍지가 이렇게 만들었다.

잠실에 살던 자동차 엔지니어인 그이를 만나 연애할 때만 해도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시작해서 큰 평수의 아파트로 넓혀가는 평범한 생활을 상상했던 내게 그이는 결혼하기 1년 전쯤 뜻하지 않던 제안을 해 왔다. 빡빡한 서울 생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10여년 내로 자기 사업체를 갖기 힘들다며, 나만 응해 준다면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로 살아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그래도 2세 교육을 염두에 두고 7년 후엔 다시 서울로 되돌아오자”는 단서를 달았다. 그렇게 흔쾌히 이곳 파주에서의 삶을 시작하였고, 한순간 남들이 내 나이를 물으면 얼른 생각이 안나 대답을 늦출 만큼 열심히 사노라니 어언 28년이란 세월을 뒤로 한 것도 이 글을 쓰느라 새삼 헤아려본 연수가 되었다.

이 땅에 가정을 거느린 부모가 모두 그렇겠지만 농번기인 지금, 숨쉴 시간조차 쪼개서 쓸 만큼 바쁜 삶 속에 이 글을 쓰느라 정리해보며 되짚어보니,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겹치기도 하고 토막토막 떠오르는 파노라마 영상이 되어 지나가기도 한다. 영 마음만 앞서고 흥분되어 짧지 않은 세월의 끄트머리에 아스라이 묻혀있는 추억의 첫 타래를 찾느라 애를 쓰며 글을 쓴다.

결혼에 앞서 1년 전 내게 제법 비장한 제안을 했던 그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에 잔돈푼까지 모두 모아 대지 240㎡(73평)의 허름한 함석대문 농가를 구입해 간판을 달고 방 한 칸을 부속실로 꾸민 후, 대충 농기계 부품을 채워 농기계 수리 센터를 차렸다.

자동차만 수리하던 그이가 농기계를 수리하느라 적응하는 기간은 힘들었지만, 돌아가는 기계의 원리는 같은 이치인지라 이내 어려움을 극복해 내었다. 그렇다 손쳐도,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28년 전 농촌은 한층 더 현금회전이 어려웠다. 이른 봄부터 타작이 끝나는 가을까지 한 사람이 몇 십만 원 씩 외상을 하는 통에, 수리를 하려면 부속을 계속 사야 하는데, 가게를 차린지 얼마 안 되는 그이에게 중간상인이나 대리점에서 외상 줄 리는 만무하였고 그 결과 자금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만 갔다.

그런 와중에 결혼을 했으니 그이가 내게 풍족한 예물을 해 줄 능력이 안 됨을 아는 나는 “내가 빚내 손에 끼고 목에 걸면 무엇 하겠느냐”며 예물을 생략하고 될 수 있는 한 간소하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는 나 역시 꼭 필요한 혼수품을 제외하고는 통장으로 가져와 공장 운영에 보탰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독하게도 살았다 싶다. 그동안 딸, 아들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형편이 여의치 못해 백일, 돌상 한번 차려주지 못한 채 절약, 아니 거의 안 썼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게다. 지금까지 쓴 가계부가 20여 권이 있다. 지금 가계부는 피곤하고 귀찮아서 안 쓴 빈칸이 많다면, 초기 가계부는 쓴 돈이 없어서 거의가 빈칸이었다.

그렇게 살기를 7년, 드디어 2,550㎡(773평)의 논 한 뙈기를 갖게 됐다. 남편 이름이 등재된 등기부등본을 손에 펼쳐든 날의 감격이란. 그 순간,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던 친정어머니께, 결혼 3년 만에 돌아가셔서 자랑할 수 없는 아쉬움과 만감이 교차했다.

농기계 수리업이 농번기에는 몇 곱절 바쁘지만, 그 바쁜 시기에 시간을 쪼개 처음 장만한 논에 모내기란 걸 하고, 난생 처음으로 논에 들어가 빠진 모도 심었다.

삼복더위에 피사리도 하고, 초봄에 받았던 영농교육의 교본을 들여다보며 무슨 비료는 언제 주어야 하는지, 언제쯤 무슨 병이 돌 시기이니 신경을 써야 하는지, 중간 물 떼기는 언제하며, 너무 가물어 논바닥이 마를 때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 때고, 낮이고 밤이고 들여다보길 수십 번.

갓난아이를 키우는 정성으로 애태우며 돌본 끝에 황금물결을 이룬 논에서 벼를 수확을 하던 날, 너무도 기쁘고 뿌듯한 나머지 콤바인이 논바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떨어뜨려 주는 빵빵하게 채워진 벼 포대를 무거운 줄 모르고 번쩍 안아서 논둑 가장자리에 옮겨 쌓았다. 수확한 볏가마니를 세어보다 이웃집 아저씨가 “이사람, 날이 저물었다고 남의 논벼까지 베어온 것 아니야? 처음 짓는 농사에 어찌도 이렇게 많이 소출을 냈어? 라고 감탄을 해주어 늦은 밤까지 이어진 타작마당이 전혀 힘든 줄 몰랐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벼를 수확하면 곧장 물벼 채 미곡종합처리장으로 직행하면 되지만, 당시만 해도 길 가장자리에 멍석이나 망을 깔고 일주일쯤은 햇볕에 자연건조를 해야 할 때였다.

덕분에 내 생에 난생 처음의 여러 가지 기록들을 갖게 되었다. 다 말라가던 벼가 비가 와서 다시 축축해져서 속상했는가 하면, 이슬만 걷히면 널고 해거름에 걷어 모으다보니 손톱 밑의 살이 다 떨어져 말할 수 없이 따갑고 아팠던 기억들. 하지만 볕에 잘 말려 방아를 찧어 서울 사는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햅쌀밥 먹어보라고 반 가마씩 나누어 줄때에는 그 기쁨과 뿌듯함이 대기업 회장님이 부럽지 않았다.

남보다 몇 곱절은 바쁘게 살며 열심히 살아온 결과 이젠 논이 1만2,000㎡(3,700여 평)이 됐고, 아래층에 공장이 딸린 2층 집을 새로 짓고, 중형승용차까지 갖게 됐다.

이젠 정말 부러울 것이 없는 만족한 삶을 이곳에서 일구어낸 내가 대견했다. 이렇게 결론짓고 나면 그까짓 것을 자랑하려 펜을 들었나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논 1만평의 농사이야기가 아니라, 인근 3개 면, 수십만 평의 농사를 책임지는 진정한 촌부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하고 싶다.

우리가 짓는 논농사는 부업이고, 주업은 농기계 수리 센터이다 보니 인근 300여 농가의 농사를 다 간섭하고 걱정하는 형국이 됐다. 음력 정월대보름만 지나고 나면 본격적인 농사철을 대비해서 준비를 하느라 농기계 수리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날씨가 아직은 영하의 차가운 기온에 머물러 있을 때라 노지작물은 멀었 지만, 하우스에서는 시설채소들을 재배하느라 하우스를 다시 세우고, 비닐을 씌운다. 겨우내 세워두었던 트랙터와 경운기 수리를 시작으로 힘이 약해진 농기계들은 엔진 전체를 손보는 작업을 하고, 소모된 배터리며 타이어도 교환해주어야 하고, 엔진오일 및 동파된 라디에이터 교환에 부동액 보충까지 바빠지기 시작한다.

꽃샘바람과 싸워가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농민들과 보조를 맞추어 일을 시작하다 보면 어느새 춘삼월이 되어 볍씨 파종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부터 눈코 뜰 새 없는 영농철을 맞아 농민의 기상시간에 맞춰 새벽 5~6시에 공장 일을 시작해서 농민보다 훨씬 더 늦은 밤 10~11시까지 맡겨놓은 농기계를 수리하게 된다.

물에 빠진 솜이 점점 물을 빨아들여 결국은 가라앉듯이 2월부터 서서히 시작된 일이 6월쯤이나 되어야 한숨 돌릴 여가가 생길 정도로 몸에 피곤이 누적되는 일과와 싸워야 한다.

참으로 여러 농가와 인연을 맺고 일을 하다 보니 많은 애환이 따른다. 서로 자기의 논밭에 작물을 심고 거두는 게 급해 짧은 농번기에 공장 앞마당 가득 대기하고 있는 농기계중에 서로 ‘먼저 수리를 해 달라’ 동시다발적으로 보채는 것도 조절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고령화된 농촌 일손 때문에 새로 산 농기계 작동 법을 금방 잊어버리고 ‘잘 안된다’며 논밭으로 불러 댈 때가 더 곤혹스럽다.

너무 낡아 버려야 함직한 기계도 “어이, 이사장 기술 좋으니께 이번만 쓰고 바꿔보게 잘 좀 고쳐줘 봐.”라고 떼를 쓰기도 하신다. 또 수확한 밭작물을 먹어보라고 갖다 주면서도 “값이 너무 폭락해서 씨앗 값도 못 건진다”며 맥없이 한숨지을 땐 ‘고맙게 잘 먹겠노라’는 인사도 민망한 채 같이 마음이 아프다. 애써 키운 농작물이 천재지변의 피해를 당한 소식엔 함께 안달이 나기도 한다.

햇볕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병충해 방제를 하느라, 농약을 치다가, 제초작업을 하느라, 예초기 작업을 하다가 등등의 사고들로 병원신세를 진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병에 나섰다가 주름이 깊게 팬 얼굴과 소나무 등걸처럼 투박하고 거칠어진 손을 맞잡을 때면 굳이 내 어머니, 아버지가 아님에도 마음이 찡하고 아리다.

그래도 가을이면 찹쌀이며, 귀한 서리 태 콩으로 만든 파란 두부까지 ‘기계 잘 고쳐주어 한해 농사 잘 지었다’며 건네주는 정이 듬뿍 담긴 손길들이 있어 7년만 살고 서울로 되돌아가자던 약속도 잊은 채 어느새 28년이란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는가 보다.

물론 돈을 벌자고 시작했던 농기계 수리업이지만, 여기 이사장네만 오면 “죽었던 기계도 살려낸다”는 칭찬에 못쓰게 된 기계를 개조해서라도 고쳐주려 더 애쓰고, 소유한 농토에 비해 너무 큰 트랙터를 마음에 두는 농민에겐 적당한 마력의 트랙터를 권하며, 되도록이면 비싼 수입기계보다는 마진폭이 적어도 국산을 권하는 그이가 자랑스럽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신랑 혼자서 밀려오는 농기계 수리를 감당 못해 엔진오일 교환이나 작은 나사 풀고 조이는 것을 도와주던 나는, 차츰 난이도를 높여 대형 트랙터를 제외한 타이어 펑크 수리나 교환, 경운기 라디에이터 교환, 논밭의 흙을 부드럽게 해주는 로터리의 칼날 교체를 비롯해 녹슬어 잘 빠지지 않는 볼트를 잘라내는 산소절단까지 이제는 제법 수리의 한 분야를 감당할 정도가 됐다.

수리를 의뢰하러 오는 아저씨들이 “이젠 지점을 하나 차려도 되겠다”는 농담까지 뿌듯하게 듣는 반 기술자가 되어가고 있다.

고압분무기는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보니 큰 기계에 밀려 다른 농기계 수리 센터에서는 수리를 꺼려하는 농기계다. 특히 인삼 농가는 고압 분무기를 많이 사용하는데 매번 새로이 살 수도 없는 현실을 딱하게 여겨 내가 나서서 패킹 교환이나 피스톤 수리를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으레 “고압분무기는 아주머니가 고쳐 주는 게 더 꼼꼼하고 야무지게 고쳐서 오래도록 잘 쓴다”며 신랑을 제치고 나를 찾는 해프닝까지 벌어져 힘든 가운데 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일이 잦아졌다.

바람 부는 쌀쌀한 날씨에 온몸이 노출된 채 농기계를 몰고 온 농민들에게 “얼마나 추우냐” 며 따끈한 커피 한잔을 건네 드리면 “어딜가서 먹어 봐도 여기서 먹는 커피 맛이 제일 좋다”며 칭찬해 주는 말 한마디엔 도리어 내가 힘을 얻는다.

기계를 고쳐드리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건네 드린 커피를 드실 동안 마주앉아 자식 농사이야기며 농작물 수확을 하기까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차! 기계만 잘 고치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벼 수확을 많이 했냐고” 반문해오는 어르신께 감히 모내기에서부터 추수하기까지의 과정을 일장 연설해 드린다.

무슨 병엔 무슨 약을 써 보니까 좋고, 장마 전엔 중간 물 떼기를 해서 헛새끼를 치지 않게 해서 벼와 벼 사이에 고랑이 훤히 잘 보이게 해야 문고병이 안 생겨 좋을 뿐더러 땅도 빠지지 않아 콤바인으로 벼 수확할 때 유리하다는 이야기까지….

수년 전부터는 제초제의 해악을 알리며, 맹독성 제초제를 살포하면 논둑의 풀은 손쉽게 없앨 수 있지만, 논둑이 쉽게 무너짐은 물론 300여 일씩이나 잔류성분이 남게 되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제초제를 쓸 것이 아니라 풀을 깎아줘야 한다고 환경운동가처럼 부르짖었다. 이러던 차에 파주시에서 “파주시는 제초제를 쓰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선도해 나가는 친환경 시책과 우리의 주장이 맞아 떨어지는 우연도 겪었다.

하지만 일손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 제초제를 뿌리면 손쉬운 잡초제거를 삼복더위와 싸워가며 일일이 예초기로 깎아 주어야 하는 일이 힘들어 “언놈이 그런 시책을 내 놓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어르신들께 “사실은 파주시장이 우리 친척인데 요즈음 벌이가 시원찮은 것 같아 염려하며 예초기라도 판매, 수리를 많이 해서 살림에 보태라며 그런 시책을 세우더라”고 농담을 건네 드리면서 한바탕 웃음을 일구어 내기도 했다.

어르신들 또한 “그 말이 맞는다”고, “농약을 많이 쓰면 우리 농작물에 피해가 가는데 무에 좋겠느냐”며 수긍을 해주시고 덧붙여서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땅을 살려야 한다”며 긍정의 뜻을 보이실 땐 마치 내가 대단한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된 듯 우쭐해지기도 한다.

일년지계는 농사요, 백년지계는 자녀교육이다. 자녀교육을 위해 7년만 살다가 서울로 다시 가자고 했던 나의 제안을 떠올리며 지금도 자녀교육 때문에 농촌으로의 귀농을 망설이는 젊은 부부들에게 감히 말하고 싶다. 이곳 파주에서 농사뿐만 아니라 자식농사에서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벼가 어떻게 자라 쌀이 되는지 모른 채 쌀 나무에서 쌀이 나온다고 말하는 도시의 어린이들과는 달리, 모내기철이면 모판도 같이 날라보고,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 대신 논둑으로 소풍가서 들밥도 먹어보고, 더운 여름날 고생 끝에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며 자란 아이들에게 시시콜콜 잔소리 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고추가 넘어지지 않게 지지대를 세우며 줄도 같이 띄워보고, 날씨가 궂은 날엔 호박꽃 수꽃을 따서 암꽃에 문지르며 수정도 시켜보고, 어린 나이에 잘 안 먹을 법한 쑥국과 냉잇국도 서로 ‘자기가 캔 것’이라며 맛나게 먹는 모습에서, 밭에서 만나는 지렁이를 징그럽게 여기면서도 ‘지렁이가 있는 땅은 땅이 살아 숨쉬는 것’이라는 엄마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 아이들 모습.

토마토 열매가 탐스러워지려면 처음 나온 곁가지 순을 솎아줘야 하는데서 희생하는 법과 아무리 먹고 싶어도 꼭지 부분까지 붉게 태양이 익혀줄 때까지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함을 함께 터득해가는 아이들 모습을 보며 “그래, 이렇게 자연과 함께 자란 내 아이들은 훗날 자연을 닮아 있을 거야”라고 확신한다.

아이들 또한 영어학원과 보습학원 보내지 못함을 불평하지 않았다. 사교육 시킬 만한 학원 한 군데 딱히 없고 과외 한번 시켜보질 않았지만, 열심히 사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교과서가 되어 잘 자라준 딸과 아들 녀석은 전공공부도 가히 이 땅을 생각하는 공부를 한단다.

딸아이는 여름이면 농약 피해를 입은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수리를 위해 맡겨놓고 간 농기계들과 기계에 설치된 고압분무기 밑이 유독 삭아있는 것을 보면서 밭작물의 연작 피해로 낭패를 당하는 이웃의 고민거리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 싶다더니 S대 응용생물화학과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마치고 현재 연구소에 근무 하고 있다.

또한 아들 녀석은 가꾸지 않은 들판의 야생화며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 찍기 좋아하고 농작물 홍보와 연관 지어 디자인해 보고 싶다더니 그 꿈을 펼치려 Y대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하여 현재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늘 아쉬웠던 일이 욕심이 되어 떠오른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울 땐 자립하느라 생활이 너무 어려워 셋째를 포기했었는데, 어떻게든 이를 낳아서 잘 키웠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아이는 K대에 입학해서 식량이 무기화될 수도 있는 미래의 한국을 책임지는 일꾼으로 성장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맹랑한 욕심을 부려본다.

농촌에서 일구어낸 우리의 삶과 함께 이제 감히 자랑스럽게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 다른 친구들의 남편들이 ‘명퇴의 늪’을 건너느라 힘들어하는 이때에 농촌에서 근사한 정착은 물론이요, 요즈음은 아이들 친구에게서도 “아줌마 미니 홈피에 일촌 신청해 놨어요. 허락해 주세요”라는 연락도 받는다.

컴퓨터를 몰라 컴맹소리 들으며 왕따 당하지 않으려 대처로 나가있는 아들딸과 미니 홈피로 소통하며 살고 있는 것도 50대에 느끼는 짜릿함 이다. 언젠가 드라마 속 연인의 감동 넘치는 프러포즈 장면을 보고 “근사한 프러포즈 한번 못 받았다”며 바가지를 긁히던 남편이 이제는 봄, 가을 논으로 밭으로 출장 수리를 다녀올 때면 개나리, 진달래를 시작으로 잔잔한 싸리 꽃에 갈대까지 한 다발씩 꺾어와 “나와 결혼해 주어서 고맙고, 이 시골까지 같이 와줘서 더욱 고맙다고, 또 다시 태어나도 나와 결혼해 달라”며 반 무릎을 꿇어 프러포즈를 한다.

바쁜 일철에 농사지으랴, 공장 일하랴, 살림하랴, 1인 3~4역에 힘든 나를 위로해주고, 기쁘게 일하는 즐거움을 주려 가끔은 세탁기에 나 몰래 슬쩍 만 원짜리 지폐를 넣어주어 빨래를 널을 때면 횡재를 만끽하게 해주는 그이의 사랑까지 더해져 이곳 시골에서의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누리며 멋진 촌부로 살아가고 있음을 참으로 감사한다.

   
  [최종편집 : 2008/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