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3리>

   
 

어슴푸레 동이 터오는 새벽녘, 오늘도 들꽃의 향기를 맡으며 곧게 뻗은 도로를 달리고 있다. 눈앞에는 푸른 산이 겹겹이 펼쳐있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힘차게 흐르고 있을 한탄강의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문득 나는 숨 가쁘게 달리던 발을 멈추고 내가 달려온 길을 뒤돌아본다.

흔히 인생에서 여자는 두 번의 단꿈을 꾼다고 한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을 터트린다는 사춘기 소녀시절, 그리고 결혼 이렇게 말이다. 두 번의 기회는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한 끼 걱정이 더 급했던 나에게 단꿈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그러나 가난이 내게 초라함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비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는 들풀처럼, 세상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진실하고 성실하다는 것 하나 보고 결혼한 남편은 물려받은 재산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열심히 아끼고 생활하면 언젠가는 나아지리라 기대했던 살림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아무리 쪼개고 쪼개어 보아도 힘들기만 했다. 적은 급여에서 ‘꼬치에 꿰어 둔 곶감’ 빼먹듯 매월 어김없이 현금으로 지출되는 월세가 가장 큰 부담이었기에 우리는 우선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이면서 비교적 임차료가 싼 경기도 고양시로 이사를 가기로 정했다.

당시 논과 밭이 대부분이었던 고양시는 월세가 저렴한 편이긴 했지만 나도 무언가 수입원이 되는 일을 찾아야 했다. 식당 주방에서, 농사의 허드렛일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지만, 생활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예상조차 하기 힘든 회색빛 미래는 암담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이러다 아이들의 교육조차 제대로 시킬 수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점점 초조해졌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길을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기술도 경험도 없는 전업주부를 반기는 일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겨우 보험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영업 중에서도 보험 영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찬밥 더운밥 가릴 게재가 못되었다.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니 나도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결실이 있으리라 믿으며 시작했다.

‘거절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는 영업 선배들의 충고를 수없이 들었지만 막상 친한 지인들로부터 거절당했을 때 무너지는 자존심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전화를 걸고서도 ‘보험 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끊기를 수십 번, 어렵게 보험 이야기를 꺼냈다가도 상대방이 전화를 조금만 늦게 받기라도 하면 ‘혹시 부담스러워 나를 피하는 건 아닐까.’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침마다 출근길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보험은 불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절대 필수 요건이며, 우리는 그들을 위해 서비스하는 전문가의 자부심을 가지라.”는 회사의 교육을 귀가 닳도록 들으며 되새겼지만, 자꾸만 아는 분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 같아 스스로 위축되고 괴로울 뿐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리라고 다짐한 초심의 각오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입이라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가계의 안정을 찾아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남편에게도 힘이 되기 위해 시작한 일이, 정작 아이들과 남편에게 엄마와 아내의 빈자리만 크게 느끼게 했을 뿐 가족과 가계 어디에도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한없는 비애를 느끼게 했다.

나는 다시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때 마침 화훼 농장을 하던 이웃들의 권유로 우리 부부는 화훼 작물재배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액수라고는 하지만 고정된 급여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하던 남편이 뒤늦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진 자본금도 넉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도 경험도 없던 우리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셈이었다. 몇날 며칠 밤을 고심한 끝에 결국 남편은 직장을 정리하고 함께 꽃 농사에 전념하기로 결정을 어렵게 내렸다.

먼저 우리가 가진 자본에 맞춰 토지를 임차하고 비닐하우스 한 동을 마련했다. 처음 선택한 품종은 장미였는데, 주변의 조언과 도움을 받기도 쉬울 것 같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꽃이라는 취향이 앞선 결정이었다.

첫 해 결과는 완벽한 실패였다.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우리 부부에게 가시 돋친 장미가 보내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미꽃이 재배에 있어서는 병도 많고 손도 많이 가는 작물인 줄을 미처 몰랐다. 노균과 응애라는 병충해에 대한 사전 대비가 미흡했던 결과라고는 하지만 정말 암담했다. 제대로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병들어 버린 장미를 바라보며, 전문성보다 취향을 앞세운 어리석음을 뉘우쳐야했고, 너무 안일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통감했다.

많은 노력에 비해 너무 적은 수입은 변변한 상품 장미꽃을 출하할 수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당장의 생활도 막막하고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로 좌절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더불어 한편으로 오기가 발동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실패도 쌓이면 경험이 된다’는 말로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첫 도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겸허한 마음으로 실패의 원인을 꼼꼼히 분석하고 점검해서 사전 예방에 주력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조금씩 장미의 특성을 알아가면서 맹목적으로 덤빈 우리의 무모함이 놀라울 만큼 장미는 재배가 까다롭고 힘든 품종이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초보는 초보였다. 아무리 꼼꼼히 살피고 예방에 신경을 쏟았지만 성공은 멀어 보이기만 했다.

시행착오와 실패를 되풀이 하며 혹독한 대학 입시를 치르는 수험생의 마음이 되었지만,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공적인 재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과 그에 따르는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는 데에는 대책이 없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겹친 경제적 어려움은 친지에, 부족한 기술적 문제는 주변 선배나 오랜 경험자의 자문을 구해가며 버티어 봤지만 고지는 너무 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중단하지 않았다. 아니 중단할 수가 없었다. 이 꽃을 시장성을 갖춘 상품으로 내놓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선택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평범한 교훈으로 애써 위안 삼으며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얻는 체험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믿고 싶었다. 품종 선택에서부터 병충해, 온도와 습도 관리, 통풍성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대가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한편으로 하나씩 쌓여가는 지식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우리 부부의 큰 재산이었으며, 그것이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시행착오 속에서 농장은 서서히 장미 농장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고, 때로는 장미가 아니라 ‘원수’가 따로 없더니 이젠 누가 봐도 탐스럽고 견실한 줄기 위에 꽃망울이 환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최상품은 아니라도 주변의 어느 장미 못잖은 상품 가치를 갖게 되었다고 우리는 스스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의 얼굴도 딱 그만큼, 상품 장미꽃이 피는 만큼 화사하게 피기 시작했다. 화훼 재배를 시작한지 꼭 3년, 참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가 행복해하는 것을 시기하는 양 또 다른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흰눈가루 병을 예방하기 위해 밀폐시킨 공간에 유황 향을 피운 것이 밤새 유황 덩어리로 불이 번져 장미 하우스를 독한 유황 연기로 꽉 채워버린 것이다. 된서리 맞은 야채처럼 축 늘어진 장미를 넋 잃은 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 부부는 참담했다.

잠깐의 부주의와 미숙함의 결과가 이렇게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만큼 우리 가족이 절망감에 휩싸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일어설 의지조차 완전히 꺾여 버렸다. 나 자신이 너무 지쳐 재기를 위해 남편을 설득할 힘조차 없었다. 그때의 절망감은 마치 천길 낭떠러지에서 오직 한 가닥 나무줄기를 잡고 버둥대다가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 1996년의 일이었다.

식욕을 잃은 채 절망의 나날을 헤매며 그래도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때 행운이 기적처럼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경기도 연천군에서 화훼단지 조성을 위한 사업자금 대출을 해 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군청에서 주관하는 군책 사업이었기에 선택만 된다면 많은 지원과 더불어 재정이 빈약한 우리에겐 자금 지원까지 단번에 해결되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동안 화훼재배 실패를 거듭하며 쌓은 생생한 산지식과 우리 부부의 확고한 의지에 힘입어 우리는 적임자로 인정되어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선정된 5명에게는 각 3,300㎡(1,000평) 씩의 최신 시설을 갖춘 유리 온실과 더불어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자금이 지원됐다. 시간에 맞춰 온도나 통풍, 살수와 약재 살포 등 모든 관리가 자동화 시스템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그동안 기초관리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동력을 그만큼 절약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문서적을 구입해 지식을 익히고 차근차근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 습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색상, 향기, 신선도 유지 등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장미꽃 생산에 전심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고, 효과는 서서히 꽃의 품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엎드려 땀 흘리는 농부 이상으로 땀과 정성을 다해 일했다. 동트기 전 어두운 새벽녘에 시작해서 해가 진 후, 어두워질 때까지 그야말로 소처럼 일했다. 그 결과로 주변의 화원들이 우리 장미꽃의 품질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점차 우리 꽃을 찾는 판매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옛말에 ‘향나무는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강한 향기를 내뿜는다’고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거듭되는 역경 속에서도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때문인지 행운은 연이어 우리 부부를 향해 손짓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일본으로의 수출길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화훼공판장에서 여러 상품을 지속적으로 탐색해 오던 S무역회사가 우리에게 공급계약을 제의해 온 것이다. 양질의 장미가 일관되게 출하되는 우리 상품을 높이 평가해 수출용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비로소 우리가 키운 장미가 국내에서 최상의 상품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벅찬 감격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간의 절망과 좌절, 숫한 난관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과연 오늘의 결실이 있었을까? 그 무렵 우리는 큰 무리 없이 같은 크기의 이웃 온실을 인수하면서 더욱 행복을 만끽하게 되었다.

장미 외에 국화 재배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우리는 국화를 위해 공간이 없어 고심하던 차에 딱 맞춰 공간을 얻게 된 것이다. 인수한 온실은 국화전용 온실로 만들어 품종의 다변화로 판매 경쟁력도 배가되어 매출도 그만큼 늘어났다.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 세월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성취감,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를 덤으로 보상해 주었다. 여유가 생기면서 새 집을 짓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었다.

지나온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그 집은 아름다워야 했다. 외형의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우리 부부의 순수한 땀의 결실로 짓는 집이니 이 세상 어떤 저택보다 멋진 집으로 지어졌다. 생의 동반자 같은 장미와 국화 향기가 언제나 거실을 넘나들 수 있는 집으로 완성된 것이다.

결혼 전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준다’던 남편은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이제 현관 앞에 아담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언덕위에 하얀 집’을 지켜주는 가운데 우리는 오늘도 보다 큰 내일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나는 새벽 마라톤도 시작했다. 중년의 여인이 무슨 마라톤이냐고 의아해 하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전곡에서 연천으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달리는 것이 좋았고 가슴을 파고드는 새벽안개가 좋았다.

2000년 가을에는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 42.195km의 풀코스를 5시간의 사투 끝에 완주했다. 40대 중년 여자로서는 정말 감내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결승선이 눈앞에 보일 때, 시련의 긴 터널 끝에 활짝 핀 장미와 국화가 피어있는 광경이 떠오르며 ‘해냈다’는 벅찬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사업에 있어서 성공이란 결국 수익의 부피로 밖에 측정되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어쩌면 수익만을 쫓아 달려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그렇게 절박한 현실에 이끌려 달려야만 했다면 이제는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고, 삶을 즐기며 달리고 싶다.

이제 40대 중반으로 들어선 지금. 사업과 인생은 정점에 서 있다. 아직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 도전의 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는 오직 수익만을 쫓아 무작정 달려왔던 발걸음을 다잡고, 가쁜 숨을 골라야 할 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삶의 결승선에 도달하기 위해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때다.

사업도 부피만을 추구해왔던 방향에서 질적 향상으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보다 넓은 세계의 꽃시장으로 시야를 넓히고 싶다. 더불어 로열티를 내던 입장에서 받는 쪽으로도 감히 욕심을 내보고도 싶다. 그래서 내가 만든 고유 브랜드가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는, 저 높은 곳의 유토피아를 향해 오늘도 열심히 달려간다.

   
  [최종편집 : 2008/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