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에 일 못하는 경상도 새댁, 고생 끝 희망 전도사로 우뚝
   
 
경북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병원에 근무하다가 평생 반려자인 남편을 만났다. 당시 그는 대구의 이모 댁에서 하숙을 하며 대학입시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이모님 댁에 자주 놀러갔다가 우연히 그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니 친정부모님은 펄쩍 뛰며 안된다고 했다. 직장도 없고 공부하는 학생이라 더 반대를 했다. 애꿎은 이모님만 철없는 애 말리지 않았다고 엄마한테 많이 혼났다.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 24세의 어린 나이로 대구에서 결혼식을 하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입시 공부는 접고 시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조그마한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제법 사업도 괜찮고 벌이도 짭짤해 신혼생활은 꿀맛 같았다. 이듬해 첫딸 진영이를 얻어 기쁨은 배가 되었고, 잠시동안이지만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계신 시어머님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외아들인 남편은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모든 것을 정리하고 괴산으로 가게 되었다.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나는 농촌실정에 어두웠고, 특히 충청도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도 힘들지만 아궁이 불로 가마솥에 밥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항상 늦잠 자는 것과 농사일 못하는 것 때문에 동네에서도 톱뉴스거리였다. “저 경상도 새댁은 언젠가는 도시로 갈 여자이지 농촌에 살 사람은 아니다”고 동네사람마다 수군댔다. 그래서 ‘밥 못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농사일이라도 해봐야지’ 하고 독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일하기 편한 고무신과 몸뻬바지·수건으로 중무장을 하고 논밭으로 나갔다. 일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 우리는 담배·고추·참깨 등 복합영농으로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흙은 정직하며,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큰다’는 어른들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앞만 보고 열심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둘째딸 선애를 낳았고, 다행히 어머니는 병환이 회복되어 식사준비를 하실 수 있을 만큼 호전돼 아침만은 꼭 당신이 하셨다.

나는 선머슴처럼 들녘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했고 못하는 농사일이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우리 논은 늘 물이 고여 있는 고래실이다. 언젠가 가을철 수확기에 비가 많이 와서 볏단이 물에 잠겼는데 무릎이 푹푹 빠지는데도 볏단을 끌어냈다고 이웃 아저씨는 지금도 20여년 전 이야기를 하신다. 뉘 집 새댁이 힘도 남자 못지않고 저리 잘하나 한참을 서서 구경했다고.

세월은 흘러 세딸의 엄마가 됐고, 앞만 보고 절약하며 살아 농사도 가정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어느 날 남편이 교육을 갔다 오더니만 육계를 키워 잘 살아보겠다고 했다. 냄새 나서 싫고 사양기술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느냐며 반대했지만 고집 센 남편을 꺾지 못했다. 1994년 4월 당시 1억원의 빚과 군 보조를 얻어 제법 현대식 육계용 축사를 지었다. 양계지식과 경험이 없어 사전 계약한 육계 계열회사 직원이 우리 집에 살다시피 하면서 사육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처음 키워 출하한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배운 대로 잘 해나가고 있었다. 노란 옷을 입고 삐악거리며 걸어가는 병아리는 한폭의 그림이요 자식과 같아 무럭무럭 자라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두번째 입추 17일 만에 처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8월8일 계사에서 일하다 점심 먹으러 집에 왔다가 2시에 전화를 받으니 우리 계사에서 화재가 났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마침 친정언니가 와 있었는데 차를 몰고 가보니 벌써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다 덮었다. 소방차 3대와 감물면 주민 100여명이 동원됐지만 계사와 2,000만원 상당의 병아리는 2시간도 안돼 완전히 타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어리고 많은 돈을 투자한 계사가 잿더미로 변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 머리를 어지럽혔고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하지 말라는 육계를 고집 피우고 추진한 남편은 내 눈치만 보는 것 같았다. 일주일 뒤 나온 화재원인은 누전. 그러나 계사를 지을 때 돈을 덜 들인다고 시설하는 기계마다 사업자가 달라 어느 기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스육추기의 거대한 가스 10통이 안 터진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그래 일어나자. 여기서 주저앉으면 남편은 더 힘이 빠져 술만 먹을 거란 생각에 나라도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1주일 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밭에 가니 참깨는 수확 시기를 놓쳐 바닥에 하얗게 널려 있고, 고추는 밭고랑이 안 보일 정도로 잡초에 뒤덮여 있었다. 일을 하려고 해도 “이깟 돈 몇푼 때문에 고생을 하나, 1억원도 넘는 돈을 날렸는데….” 가슴까지 타버린 아픔은 좀처럼 잊히질 않았다.

남편은 육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펄쩍 뛰며 반대하는 내게 남편은 그래도 빚을 갚아야 되지 않느냐며 설득했다. 나는 가지고 있는 농토 팔아 빚 정리하고 도시로 다시 나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꿈을 버리지 못하고 친지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육계사를 짓기 시작했다.

육계농장은 살림집에서 2㎞나 떨어져 있었다. 애들과 시어머니는 집에서, 우리 내외는 계사 옆에 20여평의 작은 집을 지어 먹고 자고 생활했다. 억척스럽게 일을 해 소득이 생기기 시작하자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큰딸과 둘째는 커서 어엿한 여대생이 됐고 막내는 고등학생으로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컸다. 나는 부농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영농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며 오로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렸다.

농촌생활에 적응하고 농업기술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군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이 컸다. 1991년 생활개선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회원들의 성화에 밀려 2002년 면 회장이 됐고 2003년에는 군 사무국장을 겸직하게 됐다. 생활요리·홈패션·압화공예·칠보공예·천연염색 등 다양한 것을 배우는 생활개선회 활동은 인생에 또 다른 활력을 주었다. 2003년에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농업연수를 떠나 외국의 농사방법과 다양한 문화도 체험했다.

그런데 2004년 3월4일 밤새 내린 눈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20㎝가 넘게 쌓였다. 육계사가 괜찮을까? 왜 눈은 멈추지 않는지 점점 마음은 불안해지고 어느새 40㎝까지 쌓였다. 불행히도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거대한 계사 3동이 눈 무게를 못 이겨 맥없이 넘어갔다. 세상은 내가 열심히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늘의 무심함을 절감하며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이참에 모든 것 버리고 미련 없이 농촌생활을 마감하고 도시로 가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폐허가 된 계사를 바라보며 내 일같이 가슴 아파하고, 축사를 치워주며 마음 굳게 먹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준 주민과 생활개선회원, 농업경영인들, 농업기술센터의 직원 분들을 생각하니 차마 뜰 수가 없었다. 그래 이렇게 떠날 순 없지. 더 열심히 살아서 보답해야지. 여기서 포기하면 내 인생도 끝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10년 동안 닦아놓은 터전이 물거품이 됐지만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서리라 아이아빠와 부둥켜안고 맹세를 했다. 우리 앞길에는 오로지 도전과 희망, 향기만 있을 뿐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과거는 잊고 앞만 보고 살기로 했다.

그런데 폭설피해로 철근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계사 3동을 지으려면 3억원이 넘게 든다고 했다. 이참에 한우를 키워보자고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내 말을 따라주었다. 무너진 계사의 철근을 재활용해 지은 우사는 볼품은 없었지만 130마리를 사육할 수 있는 비교적 큰 규모였다. 소 입식 자금이 없어 처음에는 10여마리만 넣고서는 차차 사육두수를 늘리면서 친환경농업을 하자고 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육계를 하면서도 2002년부터 친환경농사를 시작, 무농약채소 재배와 벼 왕우렁이농법을 도입했었다.

우리는 우렁이농법으로 키운 볏짚을 조사료로 사용하고, 사료는 흙살림제품을 먹이면서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는 고품질 한우를 생산했는데, 친환경농축산물 판매업체인 한살림과 계약해 지금은 36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이제는 내 인생에 좋은 일, 행복한 일만 있기를 바라면서….

친환경농업을 시작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사는 감물면은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토질이 비옥하고 일교차가 커 과채류 재배에 유리한 조건이다. 2001년 서너 농가가 왕우렁이를 이용한 벼 무농약 재배를 시작했고 이듬해엔 우리를 포함해 무농약농가가 14농가로 늘었다. 작목도 벼뿐 아니라 브로콜리·양상추·적채·콩 등으로 다양해졌다.

2005년엔 흙사랑영농조합법인이 발족됐다. 초기에는 저장고가 없어 농민회 창고를 빌려야 했고, 기계를 잘못 조작해 보관 중인 채소를 모두 폐기처분하게 되면서 친환경을 이끌어가는 회장이 곤경에 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귀농한 5명을 포함해 모두 90여농가가 참여하며 상근 직원도 있는 어엿한 생산과 유통을 겸한 농업법인으로 발전했다.

농업법인은 2005년 군 보조사업으로 저장고 363㎡, 작업실 156㎡를 지었는데 브로콜리·양상추·적채 등을 한창 수확할 때는 농협과 농민회 저온창고도 빌려야 할 정도로 품목도 다양하고 물량이 많아졌다. 나는 영농법인의 채소 작업반장도 맡고 있어 날마다 인터넷 발주가 나오는 대로 소포장해 오후 4시반까지 작업을 완료시켜 한살림과 생협의 물류기지로 차질 없이 운송되도록 하는 데 관여한다.

우리집은 왕우렁이를 이용한 지 6년차가 돼 이제 유기농 단계로 들어갔고 채소도 지난해부터 유기, 무농약으로 구분 생산해 친환경농산물 판매업체인 한살림 및 생협연대와 계약재배해 판매한다.

새벽안개를 안고 브로콜리밭에 가면 진주보다 더 영롱한 아침이슬이 만지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브로콜리는 8시 안에 저장고에 입고시켜야 한다. 밭에서 늦어질 때는 아침도 못 먹고 작업실로 갈 때가 많다.

농촌이 좋은 것은 여유가 있고, 나눔이 있고,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6일에는 우리 흙사랑영농조합법인이 주관하는 제6회 손모내기 체험 행사에 도시 소비자가족 800여명이 참여했다. 우리가 생산한 친환경 쌀로 밥과 떡을 해 나눠 먹고, 아이들과 어울려 손모내기·황토물들이기·떡메치기·경운기타기 등을 체험토록 해 호응을 얻었다. 가을에는 메뚜기잡기 겸 손벼베기 행사에 500여명이 참가한다. 지난해까지 5차례 개최했는데 벼 탈곡·달걀꾸러미 만들기·콩서리·고구마캐기 등 다양한 농촌체험을 하면서 도시 소비자와 하루를 보낸다. 우리 회원들은 평생 고객인 소비자를 위해 행사 이틀 전부터 음식준비 등 준비에 분주하지만, 전 회원 불평 없이 단합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고 자랑스럽다.

농촌생활에 용기와 사랑을 베풀어준 이웃과, 두번의 양계사 사고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지역사회의 일에 앞장서고 봉사해야겠다고 다짐한 만큼 독거노인 도배해주기, 목욕행사, 김장해주기 등 1년이면 10여차례에 걸쳐 각종 봉사활동을 한다. 특히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두번에 걸쳐 새벽 6시에 출발해 밤늦게 돌아오는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지난해 제4대 괴산군생활개선회장을 맡으면서 웃음이 가득한 행복한 생활개선회, 새 기술 친환경농업을 회원들이 솔선 실천해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해 농가 소득을 높이고 청정괴산을 널리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괴산군청결고추축제의 고추요리경연대회에서 대상과 우수상도 받았고, 고추음식판매장도 열어 도시 소비자에게 고추 초콜릿·샐러드·버섯고추장·장아찌 등의 고추요리도 맛보이고 기금도 조성했다. 이런 단체 활동으로 지금은 회원들과 가족보다도 더 가까울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래교실·스포츠댄스·하모니카 등 전문반을 만들고 기초이론과 연주법을 배워 회원들과 호흡도 맞추고 농업인의날 행사에 기념연주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도 한몸에 받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로 우리 집을 포함 13농가로 구성된 감물면 친환경축산반도 또 한번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극복해나가야 하리라. 친환경축산반은 월 2회 모임을 갖고,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 고급육 생산을 기본으로 현재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계획을 토론한다. 호밀과 수단그라스를 6만6,000㎡ 심어놓고 잡곡 찌꺼기와 각종 부산물을 이용, TMR사료를 직접 만들어 먹이고 있다.

나는 올해 군농업기술센터의 친환경한우대학에 입학했다. 나이 50이 넘었지만 배우고 노력하는 길만이 경쟁력을 높이고 수입개방에 대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무턱대고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내가 새로운 이론을 배우고 익히며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엿한 중견농업인으로 발전해가는 중이다.

농촌이 어렵고 농업이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용기를 갖고 밝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고운 향기와 정겨운 미소 나누며 아름다운 일, 희망의 날만 계속되길 바라며.
   
  [최종편집 : 2008/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