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매일 다른 얼굴을 가진 삶 미소 지으며 한발한발 나아가리
   
  이십육년 전 가을, 결혼한 친구 집에 놀러갔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친구 남편이 앨범 속 사진을 한장 꺼내 보이면서 어떠냐고 물었다. ‘좀 괴짜긴 하지만 괜찮은 놈’이라면서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했다. 사진 속 인물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었고 등에는 바지게에 퇴비를 가득 싣고 걸어가고 있었다.

난, 농담으로 ‘그러자’, 만나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며칠 뒤에 친구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골에서 친구가 올라왔다면서 명동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실내가 약간 어두웠지만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새까만 얼굴에 머리카락은 여전히 어깨를 덮었고 큰 키에 야위어서 코는 더욱 날카롭게 보였다. 두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는데 말이 많지 않았다. 속으로 과묵한 것이 오히려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생활에서 큰 장점은 아니었다.

한달 뒤쯤 그 남자는 또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 남편이 말하길 사형제 중 차남이고 산 속에서 단감농장도 하고 돼지도 키운다고 했다. 부모님도 좋으시고 동생은 국가대표 축구선수이고 차도 있으며 집은 이층집이라고 했다. 제법 그럴싸한 조건이었다.

그 후 약 6개월 정도 만남이 있었는데 그는 한번 약속을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켰다. 농장을 비워두고 서울을 왕래하기 힘든 상황이라 내가 한번 농장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도착해보니 라디오만 크게 켜놓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과 부엌을 가만히 둘러보니 너무나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어 남자 혼자서 사는 집같지 않았다. 파랗게 잘 깎아 놓은 잔디밭 중간에는 손수 만든 노란색 원목 테이블 세트가 앙증맞게 놓여 있었고 연못에는 여유롭게 노니는 비단잉어가 나를 반겨주었다. 백합과 튤립은 해묵은 분재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봄볕을 쬐고 있었다. 자연에 파묻혀 사는 사람은 마음도 여유로울 것 같아 한층 믿음이 갔다.

택시를 타려면 동네 어귀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가는 도중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이고 골짝(골짜기) 총각 결혼할 사람인교?” 하자 그 남자는 단번에 “네.”라고 했다. 그날 본가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고생 안 시킬 테니 우리 집 식구가 되어달라”면서 손을 꼭 잡고 놓질 않으셨다.

그러나 내가 들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차라는 것은 오래된 낡은 소형 픽업이었고, 본가의 2층집이란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방 한칸짜리 낡은 슬레이트집이었다. 하지만 부모님 내외분께서는 정말 멋쟁이셨다. 동생이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친정집 가족들은 모두 반대였다. 시골생활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는 것이었다. 직장동료·상사 모두 반대였는데 딱 한분 이사님께서만 “그래, 지금 당장은 좀 힘들겠지만 이삼십년 뒤엔 시골이 사람 살기에는 더 나을 거야” 하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 남편은 부스스한 얼굴로 넥타이를 손에 들고 신부화장하는 곳까지 왔다. 넥타이를 한번도 매어보질 않아서라며 겸연쩍어 어쩔 줄 몰라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우린 신혼여행을 곧장 돼지우리로 갔다. 밤새워 지켜보며 탯줄도 잘라주고 뒤집어쓰고 나온 양수를 타올로 깨끗이 닦아주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호텔방에서 와인을 마셨을 테지만 우린 돼지우리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밤이 지나 새벽으로 갈 즈음 난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겁 없는 결혼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후 일년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빨리 지나갔다. 산비탈에 있는 단감농장은 일년에 몇 번씩 풀베기 작업을 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총동원되어야 했다. 농장이 모양을 갖춘 것은 남편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군 제대와 동시에 배낭하나 달랑 메고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돈사 짓는 일과 허리까지 깊이 파야 하는 단감 구덩이 등 모든 것을 손수 해결했다.

길이 없는 산 속에 지은 집은 얇은 시멘트 블록을 쌓고 그 위에 함석 몇장 얹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겨울이 되면 너무 추워서 아이들의 뺨은 한쪽이 얼음장 같아서 자다가도 몇번씩 돌려주었고 외풍이 너무 세어서 머리 위에는 이불을 둘러놓고 잠을 잤다. 하지만 이 함석지붕 위에 여름철 소낙비라도 올라치면 빗소리가 일품이라 정감이 갔다.

몇년이 흘렀지만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위기가 닥쳐 온 것은 돼지가격이 큰 파동을 치면서 끝없이 내려갔고 질병이 돌면서 사료값이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농협으로부터 차용한 원리금을 상환할 일도 꿈만 같았다. 설상가상 그해 여름 태풍에 돈사가 무너지면서 돼지의 삼분의 일이 압사를 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이 최소한의 생명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지 않았다.

남편에게 농장을 팔자고 했을 때 남편은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농장을 파는 일은 없다면서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설득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하루가 스물네시간이라면 자기는 서른여섯시간이라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 남편을 모른척할 수가 없어서 난 부업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가을에는 곶감도 깎아 보고 감을 얼려 팔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얼린 감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시중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던 때였는데 백화점 납품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녹는 문제로 결국 포기했다. 모든 생각이 지나치게 앞서가면 시행착오가 많고 힘들기 마련이다. 느타리버섯 재배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재배방법을 선택했지만 초창기여서 기술적인 자문을 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특히 여름 재배는 돌아서면 버섯이 쑥쑥 자라기 때문에 그만큼 버섯포자가 많이 날린다. 기관지가 약한 사람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대표적인 예였다. 하는 수 없이 이년 만에 그만두니 빌린 자금만 고스란히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도무지 회생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고, 그때 비로소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난 남편에게 시골생활을 접자고 졸랐다. 도시에 가서 꽃집을 하든지, 제과점을 하자고 했다. 남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갈테면 혼자 가라는 것이었다.

그 즈음부터 난 말수가 적어지고 외출하고 누굴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었다. 항상 가슴은 답답하고 불안하였으며,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우겨서 했기에 친정식구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가슴앓이를 했다. 밤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새벽 닭이 울면 날이 밝기 전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수없이 들었지만 연로하신 친정 부모님과 어린 아이, 그동안 늘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신 지인들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힘든 상황이 계속되는데도 묵묵히 일하면서도 단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않는 남편과 교만하리만큼 자신감 있었던 결혼 당시의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난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란 “봉제사 접빈객이 여자의 제일 덕목”이라고 하신 말씀이 내 생각과 삶의 일부가 되어서 내 집에 오는 사람을 맨입으로 돌려 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 냉수 한잔이라도 대접을 해야 마음이 편했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잘 되길 항상 걱정해주었다.

그렇게 강산이 한번 바뀔 때쯤 우리의 삶도 바뀌게 되었다. 지인으로부터 사슴 사육으로 업종을 바꿔 보라는 말에 우리는 귀가 솔깃했었지만 또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쉽게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까 금방 눈치를 채시고는 위탁사육부터 시작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경쟁력이 있었고 남편이 워낙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알고 저만하면 믿고 맡겨도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사람 오는 것을 좋아하니 금상첨화였다.

특히 시간이 조금 여유가 생기니까 무엇보다도 아이들한테 정성을 들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태워주고 와서는 한문 사자성어 카드도 만들고 교육방송 영어 테이프도 듣고 아이들에게도 욕심을 내게 되었다. 아이들도 잘 따라주었다. 난 또 가만 있지를 못해서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사줄 욕심에 출판사 세일즈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한테 돌아가야 할 시간을 세일즈하는 데 쏟아부으니 아이들 성적은 금방 수에서부터 양까지 골고루 받아왔다.

비가 많이 와 아이들 학교 가는 길이 물에 잠겨 건널 수 없으면 큰 아이는 남편이 업고 작은 아이는 내가 업고, 다음 날 물이 더 많이 들면 붉은색 고무 통에 한명씩 태워서 밀고 건너주었으며 그래도 물이 더 차면 남편은 산 속으로 일일이 길을 내어서 학교엘 가곤 했다. 어른들은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다. 아이들 친구들이 걸어서 십리길을 오면 남편은 경운기로 마중을 나갔는데, 꼬마들은 각자 집에 돌아가서 경운기 탄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은 아이들에게도 극진했다. 일일이 손수 만든 놀이터는 웬만한 학교놀이터 수준을 능가해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특히 삼 년에 걸쳐 부둣가에서 생나무를 사와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다듬어 지은 통나무집은 우리 가족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아이들 학교 보내려고 일어나 보면 밤을 꼴딱 새운 채 지붕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을 발견한다.

돌아보니 우리 가족들의 지난 날들은 동화같았으며,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이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고 형편도 안정이 되어서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대로 건강하였음 좋겠다 생각하고 건강검진을 부부가 함께 받았다. 작년 정월 나에게 내려진 유방암 선고는 또 한번 나와 우리 가족을 절망의 늪으로 내몰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이지만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살아온 길 끝이 이것인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머릿속은 짙은 안개 속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마냥 목 놓아 있을 순 없었다. 신은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를 준다고 하질 않았는가? 난 다시 한번 용기를 내자고 다짐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밤 늦도록 옷장정리며 냉장고 정리, 집안청소며 속옷, 양말 등 남편이 잘 찾도록 챙겨 놓았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그 다음부터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항암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입맛은 점차 잃어가고 머리카락은 첫서리를 맞은 마지막 잎새처럼, 앉았다 일어서기라도 하면 어깨 위나 방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퍼머도 염색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라 나의 몰골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가면 해결되리라 믿고 열심히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이개월에 한번씩은 병원에 가고 약도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퇴원 후 남편의 사랑과 보살핌은 너무나 아름다워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다.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 말수도 많아졌고 나를 위해 수백종의 꽃을 가꾸기 시작해 지금은 넓은 농장이 온통 꽃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하수와 유기농으로 가꾼 채소들이 식탁을 점령하고 지난 겨우내 귀찮을 법도 하건만 늦은 밤과 꼭두새벽에 ‘삐~걱’ 하고 열리는 오래된 주물로 만들어진 장작 보일러의 문 여는 소리에 벌써 나의 몸은 따뜻하게 온기가 퍼졌다. 휑하니 비어 있는 내 가슴을 꼬옥 감싸 덮어주며 그대로도 예쁘다며 격려해주는 남편과 마음 따뜻한 아이들이 있기에 오늘도 난 열심히 모든 일에 전념할 수 있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이렇게 힘이 된다는 든든함을 알았으니 내 작은 가슴 하나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난 지금 오년 생존율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하루도 아니 한시간도 헛되이 보내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삶에 두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실습 없이 죽는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밤도 없다”라고.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작은 왕국에서 꽃들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시 낭송가의 꿈을 한발 한발 앞당기면서 내 목숨꽃 지는 날까지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 우리만이 아는 미소를 가득 담아 작아도 알차게 살아가련다. 이십육년 전 힘든 농부의 아내자리를 선택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최종편집 : 2007/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