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돌보듯 포도나무 돌보는 "나는야 진정한 포도나무 의사"
   
  도시에서 직장생활하다가 이곳 농촌으로 이사온 지 어언 25년, 그것도 광주에서 경상북도 김천으로 이주한 뒤, 농촌에 산다고 열등감 한번 가져본 일 없고, 후회 한번 해본 일 없이 연구하며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보살펴 준 만큼 좋은 열매를 맺어 나에게 주위에서 ‘포도박사’라고 부르게 만들어준 〈거봉〉 신품종 〈자옥〉 포도가 고맙다. 또 옆에서 열심히 도와 준 아내가 고맙다. 이제는 직장에 다니는 자녀들도 고맙다. 또한 경상도 사람이 되려고 이사 온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잘 살라’고 격려해 주며 마을이장을 10년이나 맡겨주며, 무슨 일이든 잘 도와준 마을 주민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천에 자리잡게 된 계기는 악화된 건강 때문이었다. 직장을 쉬고 있는 터에 김천에서 약 20㎞쯤 떨어진 곳에 여동생이 포도를 재배하고 있기에 구경왔다가 탐스런 포도에 반하게 됐다. 휴양 겸 포도농사를 짓기로 하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1982년 4월2일 경북 김천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김천시로 되어 있지만, 그때는 금릉군이었다. 나중에 금릉군과 김천시가 통합해 김천시로 편입되었다. 20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인 다남리는 김천시를 가려면 30분 정도 걸어나가서 1시간에 한번씩 다니는 버스를 타야 했다.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마을 분들은 빈 집을 한채 마련해 주고는 “우리 마을로 살려고 온 사람이 있다”며 반가이 맞아주며 이삿짐도 옮겨 주었다. 우선 밭 1,000평을 구입해 포도나무를 심었다. 지금은 김천이 전국에서 포도면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지역이지만, 당시만 해도 일부에서만 재배되고 있었다. 타향에다,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포도농가를 찾아가 일을 해주며 재배법을 배우면서 오직 포도나무에만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가 너무 멀어 고생이었고, 아내는 햇볕에 새까맣게 탔다. “내가 식모살이라도 해서 당신 먹여 살릴 테니 시내로 나가자”고 자꾸 눈물을 흘렸다. 나는 “2년이나 포도나무를 잘 키웠으니, 3년째는 많은 포도 수확을 할 수 있다. 일년만이라도 더해 보자”고 달랬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 건강이 좋아지고 있었다.

3년째 아주 좋은 포도 송이가 많이 달렸다. 포도나무는 보살펴 준 만큼 보답을 해 준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해 포도를 수확한 결과 마을 분들의 벼농사나 잡곡 재배하는 것보다 2~3배 수익을 얻었다.

4년째부터는 수확한 포도를 청과물 시장에 가져가면 제일 좋은 값을 받기 시작했다. 농촌 생활이 희망과 즐거움으로 변해갔다. 나는 전국 제일의 포도를 내 손으로 만들 생각에 신이 났다. 나중에 내가 죽어서 누군가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왔느냐’하고 묻는다면 “포도 하나만큼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게 하고 왔습니다”하고 대답하겠노라고 다짐해 보았다.

마을 분들에게 포도나무 심기를 권했다. 벼농사는 벼만 심어 놓으면 시간이 많아 주막에서 술 먹고, 때로는 말다툼도 났다. 그러나 포도농사는 계속 일할 수 있고 무엇보다 수익이 높았다. 이웃에서도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나는 아는 데까지는 성심성의껏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우리 어모면도 포도가 주작목으로 변해가고 있다.

다남3리로 이사온 지 5년째, 마을에서는 이장을 맡아보기를 권했다.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마을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해보자’고 마음먹고 이장직을 받아들였다. 명절 때 광주에 가면 아는 분 중에서 딴에는 생각해 준다고 “자네는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 가서 어떻게 오래 살 수 있느냐, 또 어떻게 마을 이장도 시켜주느냐”는 소리를 들으면 한심스러웠다. 지역 감정은 정치하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 내가 살아본 김천은 속 깊은 인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이장 3년째, 결심할 일이 생겼다. 추석 때 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간단한 음식과 술을 마련해 놓고 명절에 고향을 찾아온 분들과 마을 분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마을 길 확장·포장 계획을 꺼냈다. “이젠 가정마다 포도 재배가 늘었다. 그런데 비가 조금만 와도 마을 진입로가 진흙탕이 돼 포도를 팔러 나갈 수도 없다. 여러분도 고향에 올 때 길이 넓으면 좀 좋겠느냐”며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마을 진입로를 넓히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모두가 느끼던 바였던지 즉석에서 2,000만원이 모금됐다. 지금도 2,000만원이 큰 돈이지만 1999년 당시도 큰 돈이었다. 마을 어르신과 시청에 들어가서 시멘트 800포대를 지원받았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중장비를 불러서 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을 주민이 나서서 진입로 확·포장과 마을 안길 포장을 마쳤다. 화물차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니까 멀리 목포 쪽에서나 부산·울산 등에서 직접 마을에 와서 사갈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얻은 나는 이듬해 부엌 개조에 나섰다. 포도농사에 매달리기에 여자들이 너무 바빴으므로 아궁이 부엌을 없애고 입식 부엌을 만들어 여자들 일손을 덜어준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모지역뿐 아니라 김천 전지역이 포도 재배지로 급속히 변해갔다. 김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포도 재배가 확대되었다. 포도가 흔하다 보니 마을로 포도를 사러 오는 장사꾼들의 발길도 점점 끊겼다. 공판장에 가서 경매를 봐도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예전같지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전국 포도 생산의 90%가 넘는 〈캠벨얼리〉품종으로는 높은 소득을 올리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신품종으로 바꾸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전국의 〈거봉〉 포도 재배지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거봉〉 품종은 시설하우스에서는 품질이 좋은 포도를 생산하고 있는 분이 몇분 있었다. 그러나 노지 재배는 거의 열매를 달지 못했다. 게다가 시설 하우스를 설치하기에는 시설비가 많이 들어가고, 온풍기를 사용해 재배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내 생각은 자나깨나 “하우스 시설을 하지 않고 〈거봉〉 재배를 할 수 없을까, 〈거봉〉 중에서 송이가 훌륭한 품종은 없을까”뿐이었다. 충북 옥천포도시험장에 수없이 견학하여 10가지 포도 품종을 구입해 300여평의 밭에 두줄씩 심어 실증 재배를 시작했다. 그러는 중 대구 근교에 사는 분이 “아들이 일본 농과대학 4학년일 때 텃밭에 몇그루 심은 포도나무가 있는데, 보통 〈거봉〉은 숙기가 〈캠벨얼리〉보다 늦은 편인데 이것은 숙기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포도나무를 살펴보니 그분은 포도를 재배해 본 일이 없어 송이 형성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숙기도 빠르고 당도도 높고 색깔도 선명하여 재배만 잘하면 아주 좋은 품종이었다. 내가 찾던 포도품종 〈자옥〉이었다. 대구로 네다섯번이나 걸음한 끝에 10그루를 구입하게 되었다. 1993년부터 내리 4년을 별의별 수를 다 해 보았지만 호평을 받을 수 있는 포도 송이를 만들지 못했다.

속이 탔다. 그동안 5,000평에서 〈캠벨얼리〉 품종을 재배하면서도, 거봉 〈자옥〉이 언젠가는 성공하겠지 하며 2,000평으로 확대시켰다. 연구 끝에 생장조절제를 이용하여 ‘무핵’ 즉 ‘씨 없는 포도’로 전환하기로 했다. 25㎜ 파이프를 이용해 높이 210㎝ 비닐에 너비 180㎝로 포도에 비가림 시설을 했다. 지금은 ‘개량비가림’이라 하여 자유무역협정(FTA)기금으로 보조도 해주지만, 당시는 눈꼽만한 보조도 없었다. 4년간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구 노력한 결과 5년째부터는 2,000평에 씨없는 거봉계 〈자옥〉포도가 누가 봐도 감탄하리 만큼 잘 되었다.

문제는 판로였다. 시장에 내다 팔면 포도품질을 누가 알아주겠는가. 고민 끝에 어모농협 조합장과 판매담당 상무를 초청하였다. 와서 보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거봉계 〈자옥〉 품종을 어떻게 이렇게 잘 재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일 만에 상무가 어떤 분과 함께 왔다. 삼성테스코 홈플러스란 대형판매점의 과일 담당인데 〈자옥〉 포도 품질을 보러 왔다고 했다. “이 정도면 어디 한곳 흠잡을 데 없는 포도다. 올해분을 전량 가져갈 것이며, 내년에도 우리에게만 달라”고 말하곤 돌아갔다.

그해 〈캠벨얼리〉와 거봉계 〈자옥〉포도 판매로 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경북 내 시·군농업기술센터나 어모농협에서도 조합원들에게 〈자옥〉심기를 권했고,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포도 농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매년 전국에서 200여명씩 우리 포도밭으로 견학을 오고 있다.

유능한 판매상무가 구매사업과 판매사업에 역점을 두고 노력한 결과, 어모농협은 우수 농협으로 선정되고 조합원은 실익을 보게 되어 서로 상호 간 신뢰 속에 성장하고 있다. 당시 판매상무가 지금은 전무로 일하는 정순찬씨다.

어모지역에서는 포도·배·복숭아·사과 등 여러 과일이 생산되고 있다. 〈꿈엔들〉이란 통합 브랜드로 농협물류·홈플러스·롯데마트·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또한 어모농협에서는 깨끗하고 신선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판매하기 위해 2,000여 평에 최신식 선과장과 포도 세척기까지 도입했고, 일찍부터 공동선별·공동계산제를 도입, 실천함으로써 유통에서도 앞서가고 있다.

2004년 포도에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우수농산물관리제도(GAP) 생산이력’ 교육을 받았다. 어모농협에서 ‘GAP 시범농가를 우리 작목반에서 해보라’고 하였다. 작목반원들은 “친환경 농업도 어려운데, 생소한 GAP를 뭐하러 굳이 하느냐”며 반대했다. 나는 GAP 교육을 받고 왔기 때문에 반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겠더라. 한번 해보자”하고 설득하여 2년간 시범농장으로 지정됐다. 드디어 2006년에 GAP 실사단의 실사 심사를 받아 인증을 받아냈다.

김천시에서도 〈자옥〉포도를 권장하고 있으며, 각 작목반의 영농교육 시간에 영농사례와 〈자옥〉포도 재배기술 교육을 원하면 성실히 답해주고 있다. 그동안 나에게는 한국포도회 이사, 경북 포도연합 이사 김천포도회 운영위원 등의 이력이 붙었다.

도하개발아젠다(DDA)· FTA 등 개방화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도 국민소득이 증대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건강에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에, 양보다 질 위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안전성이 우선되는 시대다. 농민은 안전한 포도를 생산해 좀더 나은 가격을 받고, 소비자는 건강한 삶을 위해서 안전한 포도를 사먹는,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믿고 공존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

내가 포도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더욱 노력해 고품질 안전한 포도를 생산, 내 포도를 사먹는 국민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각오를 다져본다. 나는 포도 농원을 견학하러 온 분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했다. “포도나무도 한 생명이다. 아무리 좋은 조건, 좋은 품종, 좋은 기술을 가졌다 할지라도 적극적인 노력과 관심이 없으면 좋은 열매를 얻기 어렵다. 포도나무를 심었으면 내 몸, 내 자식과 같이 보살피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올 포도농사 짓는 경험이 밑바탕 되어 내년에는 더 잘해 보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노력하는 몫은 꼭 있다. 내가 심은 포도나무가 내 할 탓에 따라 어렵게 살 수도 있고, 편하게도 살 수 있다. 포도밭 골을 지나갈 때마다 잎과 포도 송이들은 나에게 이야기한다. 양분과 물이 모자란지 넘쳐나는지를 나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다. 그들의 이야기대로 처방을 내주고 보살펴 주는 나는 천상 포도나무의 의사다.

나는 〈자옥〉품종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올해도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에서 새 품종을 가져와서 농가 실증실험 중이다. 실험결과가 좋으면 포도농가와 결실을 함께 나누어 가겠다. ☎054-430-3268.
   
  [최종편집 : 2007/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