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골마을로 시집와 산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된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난 한 농촌 총각의 진지함과 순수함에 끌려 그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컸다. 농촌으로 시집보내려고 애지중지하며 키우지 않았다는 게 엄마의 기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허영에 들떠 유행이나 좇으며 사는 사내보다는 진실과 용기로 속이 여문 농촌 총각에게 인생을 맡기고 싶다는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결혼을 허락하셨다.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시댁 마을을 둘러본 나는 깜짝 놀랐다. 남쪽만 트여 농토가 보일 뿐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남편에게서 산골마을이란 말은 들었지만 그토록 막막한 곳인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시댁 마을은 같은 시골인 외가 마을이나 중학교 수학여행 길에 만난 포구마을에 대한 고운 추억을 비웃기라도 하듯 황량하기만 했다.

면 소재지로 통하는 잿길은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넓히느라 시뻘건 황토가 파헤쳐져 있어 산동네가 온통 뻘겋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은 고통보다 더한 슬픔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 생활이 반년도 되기 전에 나는 도회지로 나가자고 남편을 꼬드겼다. 하지만 남편은 ‘큰 맘 먹고 찾아든 고향을 다시 떠날 수는 없다’면서 오히려 나에게 ‘적응 노력을 하라’고 강조했다.

나는 도회지 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접고 시어머님과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논일과 밭일을 했고, 호미질과 삽질·낫질을 배웠다. 낮 동안의 거친 일로 손에 물집이 생기거나 상처가 나면 남편은 정성껏 치료를 해주며 포근한 말로 피로를 씻어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시 처녀가 고생을 사서 한다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농사일만 열심히 배웠다. 능력 있는 농부가 되어 가정을 넉넉하게 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3년간 논일, 밭일을 익혀나갔다. 그 사이에 깨달은 것은 농사일은 이치로만 되는 게 아니어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끈기와 건강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한창 나이인 20대인데도 피부가 땡볕에 그을려 우중충한 갈색으로 변하고 손이 거칠어지며 손마디가 굵어지는 것은 고민이었다.

특히 친정에 갈 때는 며칠 전부터 얼굴과 손을 화장품으로 다듬었지만 기대한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의 모습을 본 친정엄마는 ‘촌여자가 다 됐다’며 속상해하셨다. 속상해하는 친정엄마를 보는 나 역시 속이 상했지만 시간은 내 편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30세가 되던 해부터 나는 마을 부녀회에 참여했다. 40여명의 회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려 고참 회원들의 심부름을 맡아 하면서도 앞서가는 부녀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의견을 냈다. 하지만 나이 많은 회원들은 나를 철부지로만 생각하고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나이 서른넷 되던 해에 부녀회원들은 ‘부녀회도 젊어져야 한다’면서 나에게 회장직을 맡겼다.

나는 부녀회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만 주민들의 의식이나 생활도 발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녀회원들과 함께 미풍양속을 계승하는 마을을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지나친 음주와 화투 같은 퇴폐적인 행위는 부녀회에서 솔선수범해서 단속했다. 부녀회원들 스스로 근면하게 생활하고 마을의 가게에는 술을 팔지 않도록 협조를 구했다. 또 매달 15일은 ‘마을 청소의 날’로 정해 오전에는 부녀회원들이 골목과 야산·하천 등지를 청소했다. 산과 숲을 보호하기 위해 나들이객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가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력한 덕분에 우리 마을은 평화롭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곳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녀회를 이끈 지 4년째 되던 겨울,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뭐가 아쉬워 직장 가진 농업인이 될 생각을 하게 됐느냐고 묻자, 남편은 6,000평의 논밭 농사만으로는 두아들을 교육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염두에 둔 직장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청부’로 불리는 기능직이라고 했다. 나는 남편의 용기에 놀랐다. 사람의 가치를 지위의 고하보다는 봉사의 다과에 두는 남편에게 기능직 10급이란 직책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기에 뜻대로 하도록 했다.

그래서 남편은 아침저녁 농사일을 하면서 집에서 6㎞ 떨어진 곳에 위치한 초등학교까지 출퇴근을 하게 됐다. 남편이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 농사철이면 내가 직접 논과 밭을 둘러보아야 했고, 농약 살포가 시급할 때는 직접 농약통을 짊어지고 농약을 뿌려야 했다. 더운 날에 마스크와 장갑, 통풍이 되지 않는 작업복을 입고 농약을 살포하고 나면 몸살이 나서 몸져 눕는 경우가 많았다.

퇴근한 남편은 몸져 누운 나를 보고 인부를 사서 농약 살포를 하라고 했지만 마을에는 일을 부탁할 만한 젊은이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남편에게 일요일은 농약 치는 날이 됐다. 나는 하루 종일 농약을 살포하는 남편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실히 일하는 남편을 둔 아내로서 흐뭇한 기분도 들었다. 또 남편이 학교에서 ‘일을 시켜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서 하는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와 기뻤다.

남편의 출근으로 나 또한 더 바빠졌지만 부녀회 일만큼은 열심히 했다. 2003년 2월, 6년간 맡았던 부녀회장 일을 끝내자 주민들은 나에게 마을 이장 일을 맡겼다. 나는 이장직을 맡으면서 주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장으로서 추진해야 할 주된 사업을 산촌 개발에 두고, 우선 마을이 필요로 하는 상하수도 시설과 안길 포장 및 보수 공사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마을의 고지대에 깊이 183m의 관정을 파서 식수와 생활용수를 해결했다. 그리고 포장 길이 망가져 움푹움푹 파이는 바람에 비가 오면 보행은 물론 농기계의 이동에 불편이 많은 마을 안길을 재포장하고 길 양쪽으로는 칸나를 심어 향기로운 길로 만들었다.

또 마을 노인들이 모여 담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마을의 회의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복지회관 건립을 추진했다. 이제 마을 어른들은 복지회관에 모여 TV를 시청하고 장기나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신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문안인사를 받는 곳도 복지회관이다. 현재 이곳은 어르신들의 휴식처일 뿐 아니라 마을 일을 의논하는 회의 장소이며, 경로 정신을 실천하는 도장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관정 개발, 마을 안길 재포장, 복지회관 건립 같은 일을 추진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중요한 문제가 떠나지 않았다. 바로 주민들의 소득 향상을 위한 사업이었다. 나는 부녀회와 어르신들의 의견을 참고로 하고 마을 전체 주민회의를 거쳐 소득 향상 방안으로 ‘산수유 묘목 식재’ ‘산나물 재배’ ‘팥밭열무 재배 확산’을 계획했다.

우리 외동마을은 외진 산골인데 산에 띄엄띄엄 산수유 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산수유 묘목을 재배해 산 곳곳에 심으면 봄이면 산수유 꽃이 장관을 이뤄 마을을 찾는 분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고, 수년 후 열매를 채취해 판매하면 수익 또한 짭짤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산수유는 관상용이면서 경제림이란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래서 200평의 묘포에 약 2,000그루의 산수유 묘목을 기른 뒤 지난해 3월 하순에는 산 곳곳에 심었다.

이밖에 젊은이들이 떠나버린 마을에는 휴경지만 3만평에 이르렀다. 아무리 산골이라지만 그 많은 땅을 묵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녀회원들과 휴경지 활용에 대해 상의한 결과 고사리를 비롯한 산나물 재배가 가장 알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2004년 봄, 부녀회원들은 산에서 고사리와 취·어린 두릅나무 등을 캐 휴경지에 심고 물을 주며 키웠다. 이듬해인 지난해 봄부터는 산나물을 채취해 가까운 재래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외동마을은 해발 350m의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5~6℃ 낮고 물과 공기뿐만 아니라 토질까지 깨끗해 고랭지 채소 재배 적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폿밭무시(팥밭열무)〉로 불리는 외동열무는 특산물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팥밭의 팥잎사귀 그늘에서 자라기 때문에 부드럽고 단맛이 뛰어날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물이 배어 나오지 않고 익을수록 사근사근하고 달콤한 맛이 난다는 평가 덕분이다. 또한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퇴비로만 재배해 웰빙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나는 이장 일을 맡기 2년 전부터 500평의 밭에 열무를 재배해 5일마다 재래시장에 내다 팔았다. 경운기를 몰고 장에 가서 열무를 내려놓자마자 장꾼들이 사가는 바람에 판매에는 어려움이 없었고, 값도 헐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열무 재배를 권했다.

그 결과 6년 전에는 일곱 농가뿐이었지만 지금은 18농가가 열무 재배를 하고 있다. 얼마 안 있으면 40여가구 전체 농가가 열무 재배를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열무 재배는 특별한 영농 기술이 필요 없으면서도 창평 재래시장에서는 ‘외동산 채소 판매대’가 마련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최근에는 건강식품 웰빙 바람을 타고 광주 등 인근 도시까지 알려져 다양한 소비자 확보가 이뤄지게 됐다.

마을 이장 일을 4년 가까이 해왔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산수유 열매와 산나물 판매 수익금을 마을의 복지기금으로 활용해 문화 농촌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싶고, 마을을 산수유와 진달래가 어우러진 ‘꽃 대궐’로 만들어 일상에 지친 도시 사람들이 찾아오는 쉼터로도 만들고 싶다.

또한 해마다 인근 마을 주민들과 도시로 나간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산골 축제를 개최해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싶다. 그리고 마을 공동의 퇴비발효장을 마련해 주민들이 좀더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면 좋겠다.

결혼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큰아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작은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부녀회 일과 이장 일을 하느라 충분한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했는데도 둘 다 어미의 바쁜 일상을 이해하고 면학에 충실해 고맙기만 하다.

가정과 마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면서 산골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처럼 곱게 늙어가련다.
   
  [최종편집 : 2007/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