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지난 일을 회상하며 인생살이 오십이라는 한 매듭에서 엉킨 것들은 풀고, 풀린 것은 모아 가지런히 정리하고자 합니다. 1980년 어느 늦은 가을날,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철책선 초병으로 근무하며 무수히 생각하고 설계했던 영농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어붙은 경사진 밭을 곡괭이와 삽으로 고르며 다랑이 논은 합치고 배수 불량한 곳은 암거배수로를 설치했죠. 그리고 논과 밭 필지마다 측량을 해서 정확한 평수를 산출해 비료와 농약을 정량 시비했습니다.

아버님!

고집 센 아들은 완고하신 아버님과 사사건건 얼마나 많은 일에 부딪혔습니까. 어느 날인가는 인부들을 동원해 일을 하다 서로 생각이 달라 경운기를 몰고 사라진 저를 찾아와 애원하며 설득하시던 어머니를 경운기 짐칸에 모시고 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콧마루가 시큰해집니다. 이젠 아버님께서 간곡히 농사일을 말리셨던 속내가 자식에 대한 사랑의 큰 뜻임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한 많은 삶 그 자체가 자식의 자화상이 되고 싶지 않으셨다는 것을.

1980년 아버님으로부터 돼지우리에 키우시던 소 두마리를 물려받은 것이 소 파동이 몰아칠 83년도 말 즈음엔 30여마리로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돼지값이 돼버린 소값에 사료비마저 감당하기 어려워 모두 청산하고 낙농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비록 비육우 30여마리가 젖소 초임우 일곱마리의 초라한 모습이 됐지만 비육우보다는 자금 순환이 잘되는 편이라 어렵게나마 동생들에게 대학 공부를 시킬 수 있었지요.

저는 비록 농사꾼을 만들지 않겠다는 당신의 뜻을 거스르고 말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7마리 젖소를 데리고 버킷에 손착유를 하던 작은 목장은 현재 90여마리의 젖소와 500여평의 우사, 컴퓨터로 제어되는 착유와 급이시설을 갖춘 남부끄럽지 않은 규모로 커졌습니다. 호된 시련과 크고 작은 역경을 이겨낸 결과지요.

애당초 젖소 7마리로는 살림이 되지 않아 호구지책으로 빈 땅을 이용해 당시 흔치 않던 비닐 멀칭으로 마늘을 심었습니다. 생강도 좀 심었고요. 첫 해에는 어리석게도 완숙되지 않은 퇴비를 과용해 농사를 망쳐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숙 퇴비를 밭에 살포하고 3~4일 건조한 뒤 비료를 시비하고 밭을 갈아 놓으면 흙과 함께 발효가 된다는 사실을 터득해 다음해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힘은 들었으나 마늘 후기작으로 사료용 옥수수를 심고, 생강 후기작으로는 호맥을 파종했습니다. 또한, 몇마지기 있던 논에 물 빠짐을 좋게 한 다음 녹비용으로 호맥을 파종했다가 작황이 좋은 곳은 베어 사료로 썼고 나머지는 갈아엎어 거름을 하니 쌀 수량도 늘었습니다.

제대한 후 아버님과 함께한 10년이란 세월 동안의 시행착오와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재산이 되었고, 분가해서 기반을 잡을 수 있는 커다란 밑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가 후 처음 하는 살림살이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숙하기만 했습니다. 여차하면 쌀이 떨어져 끼니를 걱정하고 공과금을 납부하지 못해 이웃으로 푼돈을 빌리러 돌아다닌 적이 다반사였죠. 그러나 싫다는 기색 없이 반가이 빌려주는 고마운 이웃들이 있어 어려운 시기를 넘기곤 했습니다.

1995년 현재의 이곳으로 목장을 확장 이전할 당시에도 자금을 마련하느라 속이 썩어 신경성 장염까지 생길 지경이었지요. 이 때 낙농을 하는 동료들과 이웃들이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해결해 주었을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서산시장님을 비롯한 여러 기관장들이 참석한 농업경영인 성공사례 발표회에서 아버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우리 농사꾼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현명한 경영을 한다면 여기 계신 기관장님들의 연봉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며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다고, 이를 위해 우리들이 앞장서야 된다”고 열변을 토했던 걸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 자리에서 약속드렸듯이 스스로 건 최면일지언정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농업은 그 특성상 상호협력이 절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면 내의 젊은 독농가들이 중심이 돼 만든 영농지도자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며 서산낙우회의 총무를 맡아 회원 농가들이 까다롭게 생각하는 세무신고를 대행해주는 한편 가끔 앞서가는 농장의 최신장비 및 시설들을 견학하고 응용하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경기 하남시 유기농협회 회원들이 처음으로 설치한 비가림 깔짚우사를 견학하고 우리 고장에 도입한 것이 한 예입니다. 우선 저부터 앞장서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조한 비닐 깔짚우사를 건축했고 6개월 후에는 하남시 유기농회협회장을 초빙, 서산·태안·당진 등지의 농가들을 모아 이론 강의와 함께 현장평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시로부터 보조 지원을 받아 비가림 깔짚우사를 확장 보급할 수 있었지요.

2001년 시의 지원을 받아 인근 부석면 칠전리 주민들과 함께 현대 B지구 30여만평의 간척지에 수단그라스를 재배, 지역 축산농가에 보급하면서 신바람나게 일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렙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대규모 간척지에 수단그라스를 재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네 잎도 갈라지기 전 모든 포장에서 줄기가 진한 자주색으로 변하며 생장이 멈추었지만 어느 누구도 시원스럽게 해결책을 주지 못했습니다. 답답한 가운데 포장을 답사하던 중 땅바닥에서 미세한 흰 앙금을 발견하고 도랑의 물을 맛보았더니 염기가 농후한 것이었습니다. 동요하던 주민들에게 설명을 하고 비가 오기를 기다려 6,000평 한블록에 요소 두포씩 작황에 따라 2~3회 살포하니 그제서야 수단그라스가 구름처럼 일어나기 시작했지요.

이어 농업기술센터, 시 축산해양과의 전폭적인 지원과 축산기술연구소 등의 지도를 받아 수단그라스의 키를 320㎝, 자생 피는 280㎝까지 키우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량 곤포 사일리지로 만들어 인근에 공급했던 이 사업은 조사료 구입에 어려움을 겪던 축산농가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이 일에 의구심을 갖고 자신 없어 하던 칠전리 주민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1996년에는 인근의 몇몇 농가를 모아 협업체인 서인축산회를 결성해 공동사업을 시작했고 현재 20명의 회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축산회는 2000년에 시의 지원을 받아 축사면적 620여평에 부속건물 60여평과 자동급이시설을 갖춘 130마리 규모의 공동육성장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회원들은 부지런히 공사를 진행하였고 저는 전국에서 소를 매입해 공사 완료와 동시에 입식시켰습니다. 소값이 바닥세라는 판단에 따라 서두른 입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일년 후 투자한 원금을 고스란히 회수할 수 있었으니까요.

공동육성장에서는 회원농가의 우수한 송아지를 선별해 집단사육을 하고 젖소를 초임 만삭단계까지 키운 뒤 회원농가에 분배합니다. 이렇게 착유우와 육성우 관리를 분리한 결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사양관리가 가능해졌고 회원들의 비용과 노동력 절감 효과도 커졌습니다.

조사료 또한 10여년간 협업으로 생산해 왔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서산시의 선두 주자로서 55만여평의 논을 계약해 볏짚 곤포 사일리지와 마른 볏짚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4만여평을 임대해 호맥과 수단그라스를 가꿔 자체 소비하고, 남는 것은 주변 농가에 저렴하게 공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가 시·도에서 지원받은 만큼 지역내 농가에게도 저렴하게 공급해줌으로써 축산농가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함입니다.

농후사료 구입 또한 공동으로 농협사료공장과 직거래하는 방식으로 연간 3,000만원 정도의 사료값을 절약하고 있습니다. 사료공장으로부터 체계적인 기술지원과 사양관리에 대한 컨설팅을 받는 등 대량 거래처로서 우대받는 효과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회원들은 하나같이 단결하였고, 공동의 일을 우선시하는 자세를 가졌기에 오늘날과 같이 서산시 축우산업의 선두주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회원 상호 간에 자금이 부족하면 조건이나 증서 하나 없이도 여윳돈을 빌려줄 정도로 신뢰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로 간에 의사 충돌도 있었고 불신도 많아 그 조정자로서 저의 역할은 많은 인내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확고한 원칙에 따라 회원 상호 간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애를 썼지요.

오늘날과 같은 서인축산회의 위상을 이룩하기까지는 뜻과 의지를 모아 솔선수범하는 20여명의 회원은 물론 서산시 축산해양과의 진취적 지도와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서산시 조사료생산자협의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서산시의 경종농가와 축산농가를 결속시켜 축분퇴비의 친환경적인 이용으로 축산과 경종 농업이 함께 발전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아버님 저는 해냈습니다!

아버님의 뜻과 소망대로 커 주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자식을 키우는 지금에서야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지만, 제가 아버님에게서 지혜롭게 사는 법을 가르침 받아왔듯이 저 또한 제 자식들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먹을거리만을 생산하는 축산이 아니라 제가 꿈꾸어왔던 ‘보며 즐기는 축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농장 전체를 공원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도시에서 5일 동안 열심히 일한 이들이 푸른 목장에서 체험하며 쉴 수 있고, 우리 축산물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그러한 장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의 앞날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운동은 거창하게 말만 앞세우기보다는 이웃과 함께 걱정하며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농촌에 대한 이해와 영농방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적극 나서서 도와주고, 생각하며 실천하는 독농가를 찾아가 그의 철학과 기법을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제 제가 살아온 만큼 다시 열심히 살아서 하늘로 돌아가는 그날, 아버님의 셋째 아들은 자랑스럽게 이 세상을 살다 왔노라고 당당히 말씀드린다면 불효한 이 자식을 용서해 주시리라 공상해 봅니다.

병술년 초여름에 졸필을 올리오니 저를 계속 지켜봐 주시며 편안히 계십시오. 소자 복환 올림.
   
  [최종편집 : 2007/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