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농촌살이 부자 안부럽죠”
   
  모든 풀은 꽃을 피운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더니 연이어 벚꽃이 피고 이제는 붓꽃이 피고 있다. 키 작은 제비꽃도 돌 틈에 숨어 예쁜 꽃을 피운다.

나는 꽃이 보고 싶어 새들이 잠을 깨우기가 무섭게 텃밭 옆 정원으로 나간다. 어제까지 피지 않았던 목단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향기가 온 마당을 휘감는다.

꽃내음을 맡다가 텃밭으로 발길을 옮긴다. 고추 모종과 가지 모종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튼튼한 모종으로 골라 심은 것인데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물을 주고 사랑을 쏟아도 세월이 지나야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옮겨심은 모종들은 낯설음을 견디고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슬로 용기를 주고 비로 후원을 하여도 뜨거운 태양과 거친 바람이 가끔 찾아와 훼방을 부리는 것이다.

나는 몸살을 앓고 있는 모종들을 바라보며 처음 귀농했을 때를 회상해 본다. 사람이나 작물이나 새로운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려면 약간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리라!

나는 1997년 춘삼월 탈서울을 하고 양평의 변두리로 둥지를 옮겼다.

순수한 내 뜻과는 거리가 먼 이사였다. 고집불통의 남편이 느닷없이 감행한 일종의 가정 쿠데타 같은 결정이었다. 자고 나면 주차 딱지가 붙어 있고, 열대야가 기승을 부려 서울 생활을 청산하겠다고 독백을 하더니 봄이 되기가 무섭게 살던 아파트를 팔아버렸다. 혼자서 경기도 일원을 돌더니 양평으로 둥지를 옮긴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반대를 했지만 남편을 말리지는 못하였다.

우리가 처음 이삿짐을 싣고 금왕리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농촌으로 이사오는 사람들은 어딘가 모자라거나 서울 생활이 어려워 마지못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초라한 이삿짐을 보자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고향에 온 듯이 아궁이에 장작을 때고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나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수영장 대신 텃밭을 매야 했고, 누구 한사람 말벗도 없었다. 생활환경이 하루 아침에 바뀌고 나니 삶의 의욕이 사라지고 우울증 초기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늙기 전에 이혼을 하고 싶었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해버리고 싶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생활이 지속되는가 싶더니 IMF(아이엠에프)라는 바람이 불어닥쳤다. 기업들이 도산을 하고 많은 실업자가 발생하여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남편은 눈높이를 낮추어 산판일꾼으로 나섰다. 가파른 산에 올라 무거운 목재를 나르는 힘든 일이었다. 밤이면 끙끙 앓고 아침이면 다시 산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대학을 다니고 있는 딸 아이의 학비도 벌어야 하고 문패만 부여잡고 홀로 계시는 친정어머니 용돈도 보내드려야 했다. 나는 이혼의 헛된 망상도 버리고 강하고 굳센 촌부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우선 이웃들에게 마음을 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양평시장에 나가 오징어를 사고 밀가루를 사다 파전을 부쳤다. 이웃의 할머니, 아주머니들을 초대하였다. 먼저 마음을 여니 금세 이웃이 생겼다.

특히 금동할머니는 며느리만 보이지 않으면 조선간장도 퍼다 주시고 친딸같이 대하여 주셨다. 나도 친정어머니 대하듯 즐기시는 막걸리와 안주를 대접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정은 이렇듯 몰래 찾아와 새록새록 쌓여만 갔다. 이사온 지 2년이 되어가니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적응하게 마련이라고 했다. 나 역시 예외에는 아니었다.

결혼 전에는 보릿고개를 모르고 지내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농의 막내딸로 호의호식 속에 자랐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외양간에는 황소가 여러 마리 있었고, 창고에는 오곡이 가득했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가난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연애결혼을 하고부터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남편은 부지런하고 기술도 있어 외국에까지 가서 꽤 많은 돈을 벌기도 하였다. 남편은 고집이 많고 집념이 강한 데 반해 지혜가 부족하여 번번이 큰 손해를 보았다. 내가 큰 아파트를 사자고 해도 듣지 않고 소를 많이 사더니 소파동이 찾아와 빈털터리가 되기도 하였다. 지게꾼의 소망은 지게를 치장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 농촌 출신인 남편은 소를 좋아하였다.

적은 수입으로 살아가는 데는 절약이라는 두글자밖에 없었다. 남편의 작은 수입으로 자식 공부시키고 체면을 유지하려면 허리띠를 졸라매는 수밖에 없었다.

전깃불은 한등만 켜고 아예 TV는 켜지 않고 라디오로 뉴스만 들었다. 과일은 사먹지 않고 토마토를 심어 먹고 생선도 사먹지 않고 냇가에서 피라미나 미꾸라지를 잡아 영양을 보충하였다.

절약에 절약을 하면서 생활하다 보니 소문이 방송국에까지 흘러 들어가 우리 부부는 공영방송에 출연하여 구두쇠 절약왕에 선정되었다. 무작정 절약을 위한 절약이 아니라 우리 부부의 큰 소망에 큰 점수를 준 것이다. 우리 부부는 청소년센터 건립에 같은 뜻을 품고 살아왔고 목표가 굳게 서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울증이나 앓고 있을 수 없었다. 청소년 시절 배우지 못했던 신학공부도 하고 싶었고, 사회의 선도자 역할도 하고 싶었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귀감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내려온 사람이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니 칭찬이 자자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흉과 칭찬은 동전의 앞뒤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부사관으로 입대했던 장남이 결혼을 하겠다고 애인을 데리고 왔다. 어려운 IMF시절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초절약 결혼의 시범을 보이기로 결심하고 결혼을 승낙하였다.

동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예물은 값싼 드레스 한벌과 생활한복 한벌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니 100만원으로 마칠 수 있었다. 잔치국수와 막걸리로 하객들을 대접했지만 그들은 축하를 보냈고, 흐뭇한 모범적인 결혼식을 보았다고 격려를 보냈다.

아들과 며느리는 알뜰하게 살더니 작은 아파트도 장만했다. 검소와 절약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농촌에 부채가 많은 것은 농기계 장만과 자녀들의 학비와 결혼비용 과다 지출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왕 시골에 정착했으니 생활에 모범을 보이기로 작정하였다. 좋은 일은 소문이 더디게 나지만 좋지 않은 행실은 빠르게 번져가는 것이 시골 인심이다.

화사하게 화장이나 하고 안일하게 생활한다면 흉거리나 제공하고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덕이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내가 결심한 대로 처신을 하니 좋은 소문이 돌았다. 좋은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마늘을 접으로 선물하는 이웃도 생겨나고 우리가 심지 않은 감자며 옥수수도 나누어주었다.

나는 할머니들을 따라 고구마를 심으러 다녔다. 비록 푼돈을 받고 힘이 들었지만 완전한 농촌의 아낙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수입이 대폭 줄어들어 어깨가 무거워진 남편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농촌은 사시사철 일손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조금만 부지런히 일을 하고 근검절약을 하면 내 땅도 장만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했을 때 느꼈던 공허감은 사라지고 흙에서 진한 향기가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일하지 않고 보내버린 서울 생활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생각났다.

도시에서 보낸 세월 동안 이루어 놓은 일이란 세 자녀를 낳아 기른 것밖에 없었다.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던 노래방, 수영장도 모두가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언제까지나 부질없이 남은 세월을 축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힘으로 내 땅을 장만하고 젊어서 못한 공부도 하고 싶었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는 묵정밭이 많았다. 임자를 찾아가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싶다고 사정을 말하니 그냥 지어 먹어도 좋다고 쾌히 승낙을 하였다. 경사진 밭은 경운기로 갈고 평지는 트랙터를 빌려 갈았다.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되는 콩을 심었다.

콩은 적당한 바람과 햇빛을 받아 풍년이 들었다. 희망에 부풀어 수확을 기다리는데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구리떼와 멧돼지떼의 출현이 그것이었다.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무섭고 졸려서 야간경계(?)는 죽어도 못한다고 기겁을 하였다.

다된 농사를 짐승들에게 고스란히 내줄 수는 없었다. 나는 죽으라면 죽으리라 결심을 하고 꽹과리와 성능 좋은 배터리를 준비했다. 텐트를 치고 기도를 하면서 무서움을 떨치며 짐승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오니 멧돼지떼들이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꽹과리를 두드리며 고성능 라이트를 켰다. 멧돼지들은 혼비백산하여 콩밭에 접근하기도 전에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화약 냄새와 총소리는 들었지만 아낙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는 처음 들어서 무척이나 놀란 것이 분명하였다.

다음 날은 새벽에 접근하다 도망을 치더니 셋째날부터는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두뇌싸움에서 내가 당당히 승리를 하였다. 남편은 콩가마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불어온 우리콩 인기는 대단하였다. 우리콩은 없어서 팔지 못하는 귀한 농산물이 되었다.

나는 부가가치를 높이고 싶었다. 친정 어머니 같은 금동할머니와 상의하여 메주를 쑤어 팔기로 하였다. 가마솥을 건 뒤 장작을 피우고 콩을 삶았다. 콩은 메주로 바뀌고 메주는 고소득을 안겨다주었다.

서울에 사는 친지들을 찾아가 우리콩으로 쑨 메주 이야기를 하니 모두 비싼 값에 메주를 사주었다. 조선간장 맛을 잊지 못하는 나이든 어른들은 해마다 메주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나는 기어이 신학교에 입학해 늦깎이 신학 공부를 하였다. 양평과 서울을 오가며 공부를 하여 전도사가 될 수 있었다. 농사도 짓고 영혼을 위해서 말씀도 전해주니 마을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억척 같은 아낙으로 슬기로운 촌부로뿐만 아니라 사후세계까지도 염려해주는 내 열성에 감격한 것이다.

근검절약과 임차농으로 꾸준히 저축한 결과 300여평의 밭을 마련하였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처음 아파트를 살 때보다 더 큰 감격을 느꼈다. 남편은 내년에 심을 곡식 이름을 들먹이며 기뻐하였고,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흙에서는 흙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삶의 노래와 흙의 노래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정녕 농촌도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다.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흙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숭고한 진리를 증거하면서 내 삶의 노래를 접는다.

☎011-356-1170, 031-772-3059.

   
  [최종편집 : 200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