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희망과 부푼 꿈을 안고 새 천년을 맞은 지 1년 후였던 지난 2001년 1월7일. 이날은 나의 생애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그야말로 상상하기조차 싫은 최악의 시련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35㎝가 넘는 기습폭설로 인하여 3,200평의 비닐하우스가 몽땅 쓰러져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업친 데 덥친 격이었다. 이에 앞서 1999년에는 거래업체의 부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1995년 시설채소단지사업을 유치했으나 시공업자가 중도금 수령 후 부도를 낸 뒤 갑작스럽게 해외로 도주해버렸다. 시설채소단지사업은 사업관련 융자금 6억원 외에 5억여원의 추가 고금리 부채를 안고 출범했다. 그러다가 IMF(아이 엠 에프)를 겪으면서 수익금으로 이자를 감당해 나가기도 힘든 위기상황을 맞이했다. 1999년 6월에는 결국 부도로 이어져 회원 모두가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각자 부채를 지분만큼 떠안는 방식으로 지분별 개인사업장 운영체제를 도입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1년6개월여동안 개별경영을 해본 결과 한해의 농업소득으로 일부 부채원금을 상환할 수 있어 다소나마 희망이 있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은 시샘이라도 한듯 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이날의 폭설은 나의 자그마한 희망마저 빼앗아가고 말았다.

당시 비닐하우스 안에는 고추를 재배하여 빨갛게 익어 한창 출하를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이 쌓이는 상황으로 보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작물은 포기하더라도 하우스만은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으로 대나무에 낫을 매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하우스 천장쪽을 마구 찢어주었다. 하지만 하우스는 노력한 보람도 없이 우지직 우지직 소리를 내며 한쪽에서부터 힘없이 주저앉기 시작하였다. 결국 집 앞의 900평 하우스는 순식간에 몽땅 쓰러지고 말았다. 삶의 터전이 힘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쓰러진 비닐하우스를 부여잡고 통탄하며 하늘을 원망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잠시 정신을 차려 집에서 8㎞나 떨어진 2,300평의 화곡농장 하우스는 어떨까 하고 차량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눈속을 헤집고 한숨에 달려가 보았지만 그곳 역시 몽땅 쓰러지고 난 후였다.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하얀 눈 속에서 작물이 송두리째 처참하게 얼어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말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일을 생각하니 암담하고 비참할 뿐이었다. 당시 대학 4학년에 다니고 있던 딸아이의 교육비며 아빠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고 학교를 휴학하고 군에 입대한 아들과 나와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검게 그을린 아내를 생각하니 가장으로서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마저 느껴졌다.

이제 이대로 농업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그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가야 할 길은 이길 뿐이었는데… 나는 국내 최고 농업인으로 남고 싶었는데…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이때부터 방황을 하게 되었다. 건강 때문에 한동안 먹지 않던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계속 암흑세계로만 빠져들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을 비롯한 각 기관 등에서 많은 분들이 위로차 방문해주었지만 나에게는 모두가 귀찮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2개월여 동안을 방황하며 지내는 사이 나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갔고 급기야 나는 그 동안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몸 반쪽이 마비되어 쓰러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한없이 서글퍼졌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전 처음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에 휩싸였다… 나는 이대로 허망하게 내 인생을 끝맺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게 되었다. 기필코 다시 일어나 폭설로 쓰러진 삶의 터전을 어떠한 역경과 고난을 딛고서라도 새롭게 일구어 저 높은 곳 푸른 꿈을 향하여 돌진하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새기며 병상생활을 하였다.

하늘이 나의 뜻을 헛되게 보지 않았던지 나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호전되었고 의사도 놀랄 정도의 빠른 회복으로 1주일 만에 퇴원을 하였다.

퇴원 후 나는 병원에서의 각오대로 농장 한아름채소밭의 비닐하우스 복구를 위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몇개월 만에 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춘이 지나고 봄의 문턱에서 혼자라도 철거를 해보려고 다부진 마음으로 쓰러진 하우스 철에 올라가 매달려보았지만 정말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울화통만 터져 한잔의 술로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시작해보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인근 군부대에서 20여명의 군 장병들이 하우스 철거지원을 나왔다. 그러나 위험요소가 많다면서 장병들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말을 남긴 채 인솔자가 군인들을 철수시킬 때는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마을 경로회 어르신들과 주민들의 아낌없는 철거작업 지원 그리고 농협 직원들을 비롯한 농업경영인 회원 등 많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나는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나는 행정기관에 시설복구지원사업 신청을 하여 온실시공업체와 계약을 체결한 후 복구사업을 진행했다. 때로는 행정기관의 착오로 인한 어렵고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폭설로 무너진 비닐하우스를 우여곡절 끝에 복구할 수 있었다.

장마 때만 되면 물이 들어닥치는 온실 500평을 포기하고 2,700평만 복구를 하였고, 복구비로 보조금을 빼고도 융자금 1억2,000여만원이 추가로 들었다. 이제 영농조합에서 지분으로 떠안은 1억여원에 2억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부담으로 밤잠을 못 이루는 날들이 허다하였다.

50이 넘어선 내 나이에 잘못하면 이 부채를 자식에게까지 넘겨주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정신이 바짝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복구하느라 한작기 농사를 놓쳐버린 나는 우선은 빨리 수확을 할 수 있고 돈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오이를 억제작형으로 재배하였다.

나는 이때부터 새로운 도전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무엇인가 도시 소비자들의 소비심리를 이용한 새로운 발상의 틈새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차별화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웰빙시대를 맞아 수입 농산물이 봇물처럼 밀려드는 상황 속에서도 소비자들은 건강과 연관있는 웰빙 먹을거리를 선호하는 성향이 두드러진다는 데 주목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는 오직 소비자들의 선호도에 맞춘 차별화된 농산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몇날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며 생각해낸 것이 바로 도심 아파트 베란다형 길러 먹는 채소밭의 상품화였다.

생각으로는 간단해 보였고 아주 쉬워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용기에 수경재배액을 가득 채워넣고 용기 뚜껑을 닫은 후 뚜껑 위에 뚫린 구멍에 30여일 동안 별도로 키운 채소 모종을 끼워넣어 재배하는 방식인데 계속되는 실패 속에 별다른 묘안이 없었다.

처음에는 플라스틱 용기를 이용해 재배해본 결과 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이 상품을 도심 아파트 베란다에서 시험재배를 해보았다. 그러나 며칠도 되지 않아 작물은 시들고 뿌리는 썩어버렸다.

원인을 분석해 보았더니 베란다는 모두 섀시로 되어 있어 햇볕을 강하게 받고, 이 때문에 플라스틱 용기 속의 물 온도가 상승해 뿌리가 썩어버리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단열이 잘되는 스티로폼 생선상자를 이용해 보았다. 단열도 잘되고 보온도 잘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또 실패였다.

도시에 공급되는 수돗물은 모두 소독약을 이용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순환식이 아닌 담액식, 즉 고여 있는 물이라 쉽게 물이 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점도 원인이었다. 서울의 수돗물을 서울에 사는 동서로부터 택배로 수차례에 걸쳐 공급받아서 지하수와 비교하며 시험재배를 해본 결과 수돗물에서는 뿌리가 갈색으로 변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10여년 동안 수경재배를 해오면서 터득한 참숯을 이용한 폐양액 소독기술을 여기에 적용해 보기로 하였다. 참숯 15~20g 정도를 용기의 수돗물에 넣고 재배해 보았더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농촌에서나 가꿀 수 있었던 채소밭을 도심 한복판 아파트 숲속에서도 직접 가꾸어 먹을 수 있는 시대를 활짝 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파트나 주택공간에서 채소밭을 직접 가꾸며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온 가족이 정서적으로 풍요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직접 생산해 먹는 즐거움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도시 소비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농약잔류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품으로 소비자들을 공략할 수 있는 길러 먹는 채소밭은 재배방법이 아주 간단하여 누구나 쉽게 설치할 수 있다. 재배과정과 작물에 따라서 상추 등 잎채소류는 60일에서 70일 정도다. 치커리의 경우 120일에서 180일까지도 재배가 가능하였다. 채소밭을 설치한 후 15일에서 20여일이면 수확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실용신안등록과 특허를 신청하여 1년여 만인 2003년 12월13일 ‘특허 제0412936호 참숯을 이용한 가정용 담액식 수경재배 방법 및 장치’라는 명칭으로 특허증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힘겨운 노력 끝에 일궈낸 도심형 가정용 길러 먹는 채소밭 상품은 2001년 11월 농민신문사에서 주관한 대전 농기자재 전시회에서 벤처농업기술상 아이디어상을 수상하였고, 2002년 10월에는 농림부에서 주관한 제1회 벤처농업창업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여기에 더불어 2001년에는 제36회 새농민상 본상 기술농업부문 수상과 함께 산업포장을 수여받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방송의 뉴스 또는 신문·잡지 등에 도심형 길러 먹는 채소밭이 소개되면서 상품은 해마다 판매량이 늘어갔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길러 먹는 채소밭 상품이 봄·가을 계절상품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이런 점을 보완하려고 잎채소류를 벗어나 미나리·부추·돌나물과 같은 다년생 채소류까지도 다양하게 상품화하는데 노력해 나가고 있다. 나는 길러 먹는 채소밭 사업을 비닐하우스 한쪽 50여평에 채소밭 전용으로 이용 중이며, 주 판매는 홈페이지(www.hanarem.com)를 통해 전자상거래를 해나가고 있다. 또한 그동안 2,700평의 하우스에 오이 위주로 재배해오던 작형을 완숙토마토와 방울토마토 위주로 전환하고 기능성이 추가된 친환경농법으로 생산해 나갔다. 6년 전부터 나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저농약 친환경농산물 인증을 받아서 재배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무농약 인증을 받아서 재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자상거래로 판매한 금액도 전년도의 배로 늘어 1,700여만원을 넘어섰다.

특히 지난해는 남들은 경기가 좋지 않아 어려웠다고 말들 하지만 나로서는 지난해만 같아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1억여원이 넘는 농업소득으로 어느 해보다도 부채를 많이 상환할 수 있는 한해였고, 그 어려울 때 대학을 졸업한 딸아이가 고등학교 교사가 된 지 3년 만에 출가를 한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이렇듯 그토록 크나큰 역경을 딛고서도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차별화된 농업을 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차별화된 농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안전 먹을거리 농산물 생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은 친환경농산물 생산이며, 생명농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친환경농업 및 지역 특산물 생산농가들로 구성된 서산시 농업정보연구회장직을 맡아 서산 농특산물 직거래장터(www.ssjangter.com)를 운영하고 있다. 또 지난해부터는 지역 농업계 고등학교의 산·학 겸임교사로 임명받아 활동 중이며, 공주대 농업경영자과정 강사로도 출강하는 등 내가 가지고 있는 농업지식 전파에도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저 높은 곳 푸른꿈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며 국내 최고의 농업인으로 남기 위해 남은 여생 동안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고 있다. O017-430-2957.
   
  [최종편집 : 200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