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하면. 기차도 없고 완행버스만 하루 몇 번 한가하게 왕복하는 마을이다. 전주에서 전자제품 하나라도 설치하러 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가 “정말 머네요잉”이다.

부산에서 살다 89년 결혼해 남편과 완행버스를 타고 동향면 소재지까지 오니 싸늘한 3월 초 봄 저녁 6시쯤이 되었다. 시댁이 있는 마을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떠나버린 뒤인데다 신행길이라 남편은 택시를 불렀다. 구불구불 산길을 한동안 가다 택시가 서길래 이제 도착했나 했더니, 도로공사 중이라 더 이상 차가 못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려서 걸어가야 합니다”라는 기사의 무심한 말투에서 ‘이 길만큼이나 결혼생활도 순탄치만은 않겠구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솟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기에 결심이 쉽지는 않았지만, 고향이 시골인 남편은 삭막한 도시생활에 몹시 지쳐 있었고 쉴 곳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 또한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란 생각만 앞서서 흔쾌히 찬성했지만 우리들의 의욕이나 환상은 신혼 초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마을 공동 빨래터를 즐겨 찾는 어머니를 보면서 편리한 실내욕실에 길들여진 나는 늘 추위와 싸워야만 했다. 마을이 해발 350m 고지인 탓에 따뜻한 부산날씨에 익숙한 나는 여름에도 긴팔옷을 입고 지내야만 했다. 또 남편은 농기계 다루는 것이 미숙해서 늘 다치거나 사고가 나기 일쑤였다.

고향에 정착한 다음해부터 갑자기 농사일도 기계화가 되어야 한다고 비싼 트랙터와 콤바인 등을 사기 시작했고, 남편의 농협 출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무슨 희망으로 시골에서 살려고 하느냐며 우리를 걱정했다. 당시 철없는 나는 앞뒷산에 흐드러지게 피는 싸리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어머니는 소일거리로 염소 몇 마리를 키우고 계셨는데 남편은 소 키우는 것보다 자금회전이 더 빠르겠다고 흑염소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염소값 또한 키운 지 5년도 못가 폭락하기 시작해 남편이 시골에 정착해서 일군 염소 농장의 사육비조차 건지기 힘들어졌다. 이에 고민하던 남편은 염소를 가공해서 직거래를 하면 마진이 많이 남을 것이라며 직접 가공하겠다고 기계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산골짜기에서 무슨 염소가공이냐고 만류했지만 남편은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척들이나 아는 사람들을 통해 판로를 넓혀갔고, 진안군 흑염소 모임 활동을 하면서 흑염소사육 활성화를 꾀했다.

흑염소 가공을 하면서 일본의 오리농법을 교육받게 된 남편은 오리농법을 해보겠다고 했다. 오리농법을 하면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아도 돼 유기농업이 가능했다.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과 눈총 속에 우리는 망을 치고, 오리 병아리를 입식하기 시작했다. 2,000평 정도를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관행농법으로 농사지은 쌀과 같은 값으로 판매하기에는 우리의 정성이 너무 아깝고 가격이 맞지 않아 어떻게 팔아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오리농법으로 지은 무농약 쌀임을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냉랭하기만 했다.

우리는 고민끝에 도시 소비자들에게 환경농법이나 오리농법을 직접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농장과 오리 논을 개방해 소비자들을 주말에 농장으로 초청했더니 염소나 강아지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고 관심을 보이며 농장에서의 시간을 즐거워하면서 오리농법으로 지은 쌀의 차별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음식도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솜씨가 없던 나는 시장에도 가기 힘든 상황이라 갑작스런 손님에 당황하기 일쑤였다. 그러면 시어머니께서 장독 깊숙이 박아놓은 콩잎을 꺼내고 마른나물을 무치고 장독대에 말려놓은 도토리묵을 가지고는 솜씨 있게 상을 채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탄복했다. 이러한 어머니 솜씨가 도시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아 반찬을 조금씩 팔게 되었다.

어느덧 농촌생활에 이력이 붙고 오리쌀 소비자들에게 보낸 밑반찬이 맛있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된장·고추장·말린 산나물 등의 주문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이 바빠지긴 했지만 나는 직접 재배한 것으로서 저농약이나 무농약·유기농으로 재배한 먹을거리만을 고집했다. 힘도 들고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나만의 할 일이 이 골짜기에도 생겼다는 것이 기뻤고, 비로소 시골에 정착한 것에 대해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유기농산물을 직거래하면서 나와 남편은 정부의 농업정책이나 지원제도 등에 관심을 기울여 적극적으로 정보를 모았다. 주위에서는 관청에 기웃거려봤자 빚만 늘어난다고 만류했지만 남편은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고 싶어했다. 지금도 별반 나아진 건 없지만 그때는 농업이 많은 정책에 휘둘리고 있었고, 무슨 라운드니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농민들은 농업에 대한 불확실성과 늘어가는 농가부채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남편은 2000년 여름, 환경농업 연수로 일본에 다녀온 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신이 나 있었다. 우리가 해오던 일을 더 체계적으로 하고, 규모도 늘려야겠다고 얘기했다. 우선 농산물 가공품을 다양화하고 마을 단위로 활성화해서 도·농 교류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먼저 동네 가운데에 10여년 동안 방치되어 황량해진 폐교를 임대해 수리에 들어갔다. 우리는 농산물가공공장을 폐교로 확장 이전하기로 하고 학교를 도시소비자들을 초청하고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꿔나갔다.

2001년 한국생협연대에서 주최한 소비자초청 가을걷이 행사로 300여명의 소비자와 주민들의 어울림 한마당을 그 폐교 운동장에서 가졌다. 10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를 베는 데만 예초기로 한나절이 걸렸던 썰렁한 학교가 도시민과 마을 사람들의 화합의 한마당으로 변하다니, 남편과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기뻤다.

포도와 배 등 과일을 가공한 〈한방배즙〉〈몸에 좋은 호박배즙〉 등을 브랜드화한 것을 비롯하여 마을에서 나는 농산물만을 이용하고 가공·판매하면서 조금씩 우리 마을을 홍보하고 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1년 5월 농협중앙회에서 지정하는 팜스테이마을로 우리 마을이 지정되자 전국에서 능길마을을 찾는 발길이 늘기 시작했다

? 무관심했던 주민들도 대전些平斂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방문객이 많아지자 각자의 집에서 소비자들을 위해 된장챨勺像 등을 퍼서 날랐다 동네 어른들도 우리가 사는 깨끗한 환경과 마을이 도시민에게는 편안한 고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2002년 5월에는 우리 마을이 농림부가 지정하는 녹색농촌체험 시범마을로선정돼 정부 지원으로 단체숙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폐교를 자연친화적인 건물로 개첬맑置構 황토방과 황토찜질방까지 갖추어서 하루 100여명까지 소화할 수 있는 숙소를 갖추게 되었다 정말 우리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내가 살아온 이곳이 도시생활에 찌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편안한 시설로 변모해 기뻤다 도시생활을 하며 힘들 때 꿈꾸던 푸근한 고향을 만들게 된 것이다.

처음엔 우리 부부가 시작했지만 이제 그린투어리즘에 대한 신념은 우리 마을 주민 모두에게로 번졌다 ㅎ彫┳ 앞서가는 사람들은 외롭고 춥다Ⅴ 생각을 많이 했다 시집오면서부터 십수년을 인부들 밥만 하다시피 하며 생활했고 아이 하나를 사고로 잃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우리를 지탱해준 건 주위 분들의 위로 한마디 그것이었다 뼈아픈 충고는 약이 되었고 위로는 힘이 되어 우리가 지금의 능길마을을 마련하는 디딤돌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 마을 주민들은 선진마을 견학챰냅 등을 통하여 의식변화가 있었고 마을 생산물을 가공하는 공동작업 공동생산기반을 마련했다 모두 마을 주민들의 협조가 만들어낸 성과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농약 없는 능길마을 친환경농업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전량 가공쳤퓔탭求 마을로 더 큰 발전을 하기 위해 ㅄ길마을영농조합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능길마을이 작지만 환하게 빛나는 산골휴양마을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더욱 노력할 것이다 불리한 조건을 장점으로 바꿔온 경험을 바탕으로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 희망을 가꿔갈 것이다.

   
  [최종편집 : 200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