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책상 서랍을 뒤지다 1994년 농민신문을 보게 됐다. 영농수기 당선작 스크랩이었다. 그동안 영농수기를 볼 때마다 나도 한번 써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게 그런 자격이 있을지, 또 지난 과거를 떳떳하게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20여년간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면서 귀농자나 이제 막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용기를 갖고 펜을 들게 되었다.

나는 1956년 전북 전주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큰 고생없이 전북대 농대 원예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말이 농대지 대학생활 동안 제대로 농업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졸업하면 취직하길 바라셨고, 나 또한 그럴 생각으로 상경해 취직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1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하면서 실업자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는 자괴감으로 우울증에 결핵까지 겹쳐 몸무게가 48㎏으로까지 빠졌다.

그때 우연히 찾아온 사촌 매형이 피골이 상접한 나를 끌고 간 곳은 화훼농장이었다. 원예를 전공했으니 인생을 한번 걸어보라는 것이었다. 물론 삶의 의욕을 잃고 있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거칠고 굵은 농부의 손마디에서 희망을 읽었다. 1984년 9월 그 길로 나는 보따리를 싸서 그 농장에 실습 일꾼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농촌생활의 부푼 꿈을 갖고 그곳 사장님처럼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농촌생활은 내가 꿈꾸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약한 체력에 과중한 노동은 금방 사람을 지치게 했다. 도저히 농장일을 따라갈 수 없어 도망치려는 생각도 수차례나 했다. 그때마다 성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6개월 동안의 체험은 지금까지 내 영농생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 중에 1986년 농민후계자로 선정되면서 뜻을 같이하는 대학 후배, 동기들이 8명 정도 모였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처럼 집단 영농생활을 꿈꾸며 행정기관, 농협 등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우리들에겐 어떤 지원도 불가능했다. 부모님들의 반대가 거세져 뜻을 같이 했던 몇몇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또다시 좌절에 빠졌다.

가까스로 5명이 작목반을 결성해 농지를 임대했다. 정부로부터 1억2,000만원의 지원금도 받았다. 그해 10월부터 석달 가까이 서로를 의지하며 야간작업을 강행해 1-2W형 연동하우스를 지었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다’는 찬사를 들으며 1987년 1월 무사히 준공식을 치르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준공식을 치르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작목 선택, 판로 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던 우리들의 운명은 밖에서 밤새 내리던 눈발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비닐 하우스에 수북이 쌓인 눈은 우리가 석달 동안 피땀흘려 세워놓은 6,000여평의 온실을 짓눌러 파이프가 엿가락처럼 휘거나 처참하게 꺾여버렸다.

작목반은 와해됐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도피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동안 받은 후계자 자금, 시설 융자금은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좌절할 수 없다는 생각에 현장에 나가보았지만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난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

여기서 좌절하면 앞으로 무엇을 해도 실패의 연속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에 우선 300여평을 복구해 ‘칼라’를 심었다. 적은 소득이지만 600여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 돈은 내가 농사꾼으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이듬해도 나머지 300평을 복구해 글라디올러스 반촉성을 식재해 9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나는 다시 화훼 작목반을 결성하고 나머지 무너진 하우스를 임대했다. 회원들과 3년 가까이 노력한 결과 하우스 면적을 5,000평으로 늘릴 수 있었으며 그 해 1억3,000만원의 소득도 올렸다. 덕분에 1995년 ‘화훼전업농’으로, 1998년에는 ‘선도경영체’로 선정돼 꿈에 그리던 내 땅 2,000평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상품의 브랜드화와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에 동분서주하였다. 그 결과 1995년 완주군에서는 처음으로 1,000만원 상당의 칼라를 일본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뤄 그 해 농협에서 주는 ‘이달의 새농민상’을 수상하게 됐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우리 작목반도 IMF체제 앞에서는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수출만이 살 길이란 생각에 작목반원 3명이 합심해 인근 지역에 수출단지를 조성코자 1만2,000평의 토지를 5억원에 구입하려던 계획이 외환위기란 복병 앞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기름값이며 종구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건만 꽃값은 평균값의 절반으로 폭락했다. 도저히 이자며 원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농가 부채상환 연기 조치를 내려주고 농협의 도움으로 위기는 넘겼지만 어려움은 계속됐다.

그동안 해외 견학 등을 통해 눈여겨 보아오던 유색칼라를 작목반원들과 함께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색칼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재배가 힘든 품종으로 여겨져왔다. 우리는 이에 과감하게 도전하기로 하고 1999년 뉴질랜드, 네덜란드 농장을 돌아본 후 1,000만원어치 정도의 종구를 구입해 식재했다. 모든 종구가 썩는 실패를 맛보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다.

2000년도엔 농촌진흥청 농촌현장애로사업으로 유색칼라 반촉성 재배가 채택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재배해왔던 유색칼라 재배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기존 칼라는 습지형인 반면 유색칼라는 건지형으로 점적관수 방법과 종구 채취 후 휴면 타파 기간 동안 큐어링 처리에 문제가 있었던 것. 이에 새로운 재배방법으로 유색칼라에 다시 도전한 결과 2001년도엔 6,000만원, 2002년도엔 3,000만원어치를 일본에 수출하게 되었다. 또 2000년, 2001년도에는 잡지 〈아그로푸드〉에 우리 농장이 게재되면서 일본 등지에서 유색칼라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실제로 한 일본 상인은 우리 농장을 직접 방문해 우리 칼라를 수입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이로 인해 지난 2001년도엔 ‘농업부문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제2건국 위원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색칼라 수출에도 한계가 있었다. 수입 구근이 너무 비싸다보니 수출하려면 그만큼 비싼 종구값을 지불해야 했다. 농촌진흥원을 방문해 상의한 결과 우량 종구를 조직 배양함으로써 대량으로 종구를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에 우리는 희망을 걸었다. 이에 우리 농장을 산학협동농장으로 개방해 2002년도엔 국내 종구를 개발, 일본으로 3,000만원어치를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농장을 찾아와 격려를 해주셨다. 농림부 차관보도 우리 작목반을 찾아와 시설 하우스 개·보수 자금 등을 지원해주셨다.

나는 이런 성공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어른들과 합심해 우리 마을을 정보화시범마을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2002년 1월 정보센터가 완공되면서 우리 마을은 급속도로 정보화 마을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 농산물을 전자상거래로 판매해야겠다는 생각에 관내 특산품인 생강, 생강가루, 유색칼라 종구, 온고을맛 김치 등을 마을 홈페이지에 올려 2002년 전자상거래로만 2,000여만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또 전자상거래 품목을 다양화하기 위해 2003년 1월에는 내가 갖고 있던 50평의 창고를 개방해 마을 부녀회원들과 함께 생강 한과공장을 건립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늘 ‘큰바위얼굴’ 하나가 들어 있었다. 정치가나 재력가가 아닌, 마음속에 희망을 품고 살아온 마을 지킴이가 진정한 큰바위얼굴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새농민상’ ‘신지식인상’ 등을 수상하며 이 자리에 섰다. 이 모두 농업인들에게 신바람을 일으켜달라는 특명이라고 생각된다. 나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 누군가에게 ‘큰바위얼굴’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이 땅을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리라.
   
  [최종편집 : 200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