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7월31일 서울 쌍용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는 농촌 총각과 도시 처녀와의 만남의 장이 열렸다. 부천에서 어느 제조회사의 경리직원으로 일하던 나는 농촌 총각과 사귀고 싶다는 생각에 그 곳에 갔다. 너무 진지한 남자들의 태도에 당황해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슬그머니 다가와 앉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모임의 특성을 알아보고 오라는 농촌진흥청의 명을 받고 온 가나안 농군학교 교육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모임이 끝날 즈음 그는 오늘 저녁 집에 가서 똑같이 편지를 쓰자고 제안해왔다. 그는 체육 특기생으로 간신히 중학교만 졸업하고 4H 활동을 하면서 농촌 발전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안성군연합회장을 두번 역임하며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가 커서 표창장도 많이 받은 진솔하고 야망 있는 남자였다.

그와 사귀기 시작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나는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결핵을 앓고 있어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를 위해 썩어지는 밀알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이를 설득해 84년 4월4일 우리는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교육받을 때 상으로 받은 돼지 두마리가 전부였다. 그것도 큰댁 마당 한켠을 얻어 키우는 형편인지라 우리는 왕겨를 이용해 난방을 하는 문간방에다 신혼 살림을 차렸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우리는 큰 목장주의 꿈을 안고 내 퇴직금을 털어 한우 여섯마리를 샀다.

남편은 사료값을 충당하기 위해 근처 라면 공장에 나가 주야로 일했다. 도시에서 살던 나에게도 불을 지펴 밥하고 펌프질해서 물을 길어야 하는 생활이 고통스러웠다.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참았다. 하지만 이듬해 돼지 파동이 나면서 60여마리로 늘어난 돼지와 소의 사료값을 대기도 어려웠다. 어디 한군데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소와 돼지를 팔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일단 남의 빈 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남편은 돼지 농장에 취직했고, 나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비단 짜는 기술을 배웠다. 한필을 짜면 6만원을 주는데, 열심히 짜면 한달에 세필 정도는 짤 수 있다고 했다. 벌집 무늬 모양을 맞춰 짜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남편은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성욕조차 절제해야 했다. 난 밥은 굶어도 약은 떨어지지 않게 온 정성을 다했다. 결핵은 소모성 질환이라 무리하지 않고 잘 먹어야 했다. 하지만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해야 하는 농장에서는 치료가 어려워 남편은 일년만에 농장 일을 그만두었다. 남편이 받은 월급은 몽땅 저축하고 내가 번 돈으로 생활하며 일년 동안 모은 돈이 350여만원. 그 가운데 50만원은 월세방을 얻는 데 쓰고, 200만원은 남편의 약값으로 지출했다. 잠시 쉬며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남편은 한달을 넘기지 못하고 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갔다. 그러고는 일주일 혹은 열흘에 한번씩 집에 들어왔다.

큰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아버지께서는 늘 “너는 펜대나 굴리며 살아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런 내가 시골로 시집을 간다고 했을 때 친정 식구들은 모두 반대하며 나섰다. 그것도 남편이 결핵 환자라는 사실을 속이고 한 결혼이기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다 못한 언니는 ‘재고가 없으니 망할 것도 없다’며 천막 만드는 일을 해보라고 권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내에서 벗어난 면 소재지에 집을 얻었다. 가지고 있던 100만원에 200만원을 빌렸다. 모두들 그 곳에서 무슨 가게가 되겠느냐며 말렸지만 내겐 열심히 하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87년 2월, 보일러도 고장난 집에서 4개월 된 아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3평 정도 되는 가게와 작은 방, 재래식 화장실이 전부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 즈음 남편의 기침이 잦아들어 병원에 갔더니 결핵이 완치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모르는 것은 언니에게 물어가며 어설프게 천막 일을 시작했다. 언니가 빌려준 헌 미싱과 천막용 천 세필이 전부였지만 우리 농장을 갖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남편은 밤에는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관리하고, 낮에는 천막 일을 도왔다.

‘성실하다’고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었다. 천막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농사짓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8년 봄에는 후계자 자금을 받아 1,500여평의 땅을 사서 농사를 시작했다. 정부미에 김치가 전부인 밥상이었지만 꿀보다 맛있었고, 맨 얼굴에 먼지 뒤집어쓰는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가벼웠다. 큰아이가 일곱살이 되던 해 작은아이가 태어났다.

낙천적인 성격이라 천막 일도 즐거웠지만 체력이 달려 평생 직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공부였다. 용기를 내 남편에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때 큰아이는 여덟살, 작은아이는 두살이었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은 말리며 나섰다. 하고 싶은 공부를 돈이 없어 하지 못한 내 가슴속 응어리를 사람들은 몰랐다.

어릴 적 내 꿈은 수학 박사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상고, 그것도 문교부 인가가 나지 않은 전수학교를 다녔기에 대학에 가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넷.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검정고시 책을 샀다. 하지만 시작부터 막혔다. 영어 단어, 수학 공식 하나 생각나지 않는 상황에서 독학을 한다는 건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1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듬해인 1995년에 드디어 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학기를 마쳤을 때 보건소에서 우연히 받은 자궁암 검사에서 악성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억울하고 분해서 울다보니 남편이 더 힘들어했다. ‘이러면 안되겠구나’ 싶어 담대해지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조직검사 결과 초기라 완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속으로 울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했다. 입원하는 날에는 2학기 중간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책이며 카세트 등을 챙겼다. 수술한 지 열흘 만에 퇴원하면서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하지만 고지를 앞두고 중단할 수는 없었다. 복대를 하고 시험을 봤다. 퇴원 다음날부터는 가게에도 나갔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힘들어했다. 신경정신과를 찾아야 할 정도로 힘든 날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기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조금씩 안정이 찾아왔다.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96년 말에는 시골에 땅을 사서 조립식 집을 짓고 이듬해 4월 이사를 했다. 천막 일은 그만두고 학교에 다니면서 시립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 99년 2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사각모를 썼다. 또 유치원 2급 정교사 자격증도 땄다.

그후 남편은 ‘즐거운 집’이란 간판을 걸고 느타리버섯 재배를 시작했다. 10년 전에 사둔 땅에 재배사를 지어 병 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당신도 알아야 한다’며 종균 배양에서부터 가스배출, 온도·습도관리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재배사가 안정되자 남편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난 그 길로 공부방을 열기로 했다. 공부방 앞에는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처럼 큰 꿈을 가지라는 뜻에서 ‘조나단 공부방’이란 이름도 붙였다. 재배사가 바쁠 때는 남편을 도우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정성을 다했다. 또 시립도서관에서 하는 문예창작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반원들과 함께 ‘궤도를 이탈하다’라는 동인지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과 어울려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내 안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생겼다. 또 대학원에 진학해 심리상담학을 공부해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한 그루의 나무가 큰 재목이 되기 위해서 가지치기의 아픔을 감수하듯,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음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재배사 일을 돕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나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시간과 노력, 열정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최종편집 : 200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