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게 말하면 학사 농업경영인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반거충이 농사꾼이다. 농장은 경북 상주시 공성면 도곡리에 포도밭이 6,376평이 있는데 3,000평은 연동 비닐하우스이고 나머지는 노지재배이다. 이곳 농장은 1998년 11월에 개설했고 일하는 가족은 아내와 부모님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김천시 대항면 대룡리에서 하우스포도 농사를 짓고 농산물가공공장도 운영했다. 그러나 매년 밑지는 농사를 짓다보니 98년 IMF 시절에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이곳에 포도농장을 옮긴 것은 그때 한창 경제계의 이슈였던 구조조정을 우리 농장도 단행한 결과이다.

나는 95년에 농사꾼이 되었다. 학교 졸업 후 4년간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이웃의 ‘아버지 농장’에서 2년간 영농 실습을 한 후였다. 당시 농장은 포도밭 1,200평과 임차농지 1,500평으로 역시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연간소득 1,000만원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해 11월 농협에서 시설자재비 4,000만원을 빌려 포도밭 1,200평에 연동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96년에는 김천시 다수동에 있는 농산물가공공장을 5,000만원에 인수하여 포도·사과·복숭아·딸기 등 과일잼과 포도즙을 만들어 팔았다.

농사는 그런대로 성공을 했다. 하우스포도 작황이 아주 좋아서 6월20일 현금 4,700만원에 밭떼기로 넘겼다. 식품회사도 흑자였다. 올리고당을 이용한 과일잼 제조법을 도입하여 당뇨 등 설탕을 꺼리는 소비자들을 겨냥해 제품을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97년 IMF 한파는 나라고 빗겨나지 않았다. 매출이 급감하고 물류비용 등 생산비가 늘어 98년 3월 공장의 제품 생산을 중단했다.

포도농사도 97년, 98년 내리 흉년이었다. 첫해에 포도를 너무 많이 착과시켜서 수세가 약해진 것이 도무지 회복되지를 않았다. 결국 영농자금 이자도 갚지 못했다.

공장 부채는 대충 계산해도 7,000만원이 넘었고 거기에다 하우스 자재비, 농기계 구입비, 5년 전에 받은 영농생산자금 등을 합치면 1억원 정도가 되었다.

98년 상반기가 되면서 우리집에는 위기감이 돌기 시작했다. 이때는 전국이 구조조정이라는 태풍에 휩싸여 있을 때인데 이때까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던 구조조정이란 말을 나도 한번 되새겨보았다. 우리집도 말하자면 부도가 난 것이니 구조조정을 해야 할 부분이 없는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대지 200평이 넘는 집을 팔고 포도밭도 팔아서 빚을 청산하고 남는 돈으로 어디든지 평당 3만원 이하 되는 지역에다 땅을 구입하여 농장을 다시 만들고 새출발을 하기로 했다. 가족의 동의를 얻는 즉시 복덕방에 집과 밭을 내놓았다. 그 해 10월에 우리 집안 종손이 대대로 물려 살던 집과 문전옥답을 팔았다. 그리고 상주시 공성면 도곡리 땅 5,454평을 샀다.

11월에 시작해 이듬해 3월까지 30평짜리 창고형 살림집을 짓고 3,000평에 비닐하우스를 지었으며 농로, 관정, 배수로 등의 기본공사도 마무리했다. 평당 15만원에 땅을 팔아 3만원에 땅을 사고, 9,000만원 받고 집을 팔고 1,000만원을 들여 집을 지었다. 남는 돈으로 8,000만원의 부채를 정리했다. 모든 공사는 돈에 맞추어 추진했다.

3월이 오고 언 땅이 풀리자 포도 묘목 3,500그루를 심는 작업으로 도곡리 농장의 첫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99년 농사는 포도나무를 키우는 농사다. 그러니 무엇으로 먹고 비료, 농약, 각종 영농자재는 무슨 돈으로 구입할 것인가. 땅 팔아 빚 갚고 다시 빚을 낼 수는 없었다.

‘현금을 만들자’. 포도나무 사이에 참외를 심었다. 참외도 심을 수 없는 좁은 골에는 토마토를 심었다. 3월 말 참외 딸 때가 되자 아내는 대구시 상인동 언니네 사진관 앞에다 노점을 차렸다. 매주 월·수·금 3번씩 참외·토마토·호박 등을 수확하여 갖다주면 아내는 노점에서 팔았다. 신선해서 불티나게 팔렸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가기만 하면 돈이 됐다. 농장 구석구석에 온갖 채소 씨앗을 뿌렸다. 한철이 끝나면 곧 다시 뿌리고 심었다.

채소가 없는 겨울철에는 두부, 비지, 청국장도 팔고 혹한기에는 붕어빵, 오뎅도 팔았다. 이 노점장사는 2000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덕에 빚 안지고 먹고 살고 농사 밑천도 조달했다.

드 디어 포도 따는 해 2000년이 되었다. 도곡리 농장에서 첫 수확이 나오는 해이다. 그러나 허황된 꿈은 버리기로 했다. 반드시 남는 농사를 짓자. 적게 남아도 남는 농사면 길이 열릴 것이다. 남는 농업이 농산물 수입 개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농업이다. 그러나 남는 농사,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문과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발한 영농법에 대해 나는 회의와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귀신 잡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나는 ‘정도 농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른바 과학영농의 기본틀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농약과 화학비료는 덜 쓰는 방향으로 다음 3가지의 원칙을 세우고 실천했다.

▲퇴비는 농사의 기본이다.

요사이 농사는 주는 게 너무 많다. 미량요소, 효소, 각종 영양제, 그리고 목초액, 숯가루 등은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먹는 약초까지 주는 것은 심한 듯하다. 농작물의 보약은 인삼, 녹용이 아니라 유기물이다. 좋은 퇴비는 식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어느 정도 구비하고 있다.

▲경영비 줄이기는 인건비 줄이기부터.

경영비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또 쉽게 줄일 수 있는 것이 인건비.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먼저 일손 분산을 했다. 농장을 하우스 A동, 하우스 B동, 노지로 3등분하고 수확시기를 단계적으로 조절하여 모든 작업을 순차적으로 진행해 고용 인력을 쓰지 않았다.

▲잘 파는 농사여야 한다.

맛이 좋으며 깨끗한 포도가 잘 팔린다. 포도는 껍질째 먹기 때문에 깨끗해야 한다. 과분이 하얗게 덮여 있는 깨끗한 포도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다른 어느 과일도 흉내낼 수 없는 포도만의 자랑이다. 또한 틈새시장을 노려야 한다.

매년 7월 말이면 김천지방에는 노지 〈캠벨얼리〉가 쏟아진다. 이때가 하우스 〈캠벨얼리〉의 틈새시장이다. 하우스포도는 끝나가는데 노지포도는 아직 맛이 없을 때라 완숙한 하우스포도를 비싸게 팔 수 있다.

2000년 농사는 3월1일부터 하우스 보온을 시작했다. 쇠똥퇴비를 충분히 넣고 농업기술센터의 토양검정 결과에 따라 석회와 붕소 등을 넣었다. 온도 관리는 처음 10일은 그대로 밀폐하고 낮에 30℃ 이상 되면 천장을 열어 환기를 했다.

낮 온도는 눈틀 때는 25~30℃, 꽃필 때는 20~25℃, 성숙기에는 25~30℃에 맞췄다. 밤에는 최저 10℃로 유지했다. 폭 50㎝ 비닐호스 축열주머니를 깔아 낮에 축열을 해두었다가 그 열로 밤에 가온을 해 온풍기 가동은 몇번 하지 않았다. 농약은 발아 후 7일 간격으로 〈다이센〉을 2회 살포하고 개화 직전에 〈스미렉스〉를 1회 뿌렸다. 순지르기, 알솎기, 송이솎기 등은 노지 때와 같이 했고 포도 수확은 B동(800평) 7월14~30일, A동(1,600평)은 7월25~8월7일에 했다. 수확량은 5㎏상자로 2,000상자였다.

판 매는 북대구공판장과 상주원예조합에 직접출하했다. 김천에서 노지포도가 많이 나왔으나 예상과는 달리 우리 포도가 높은 값을 받았다. 상자당 평균 2만3,750원(최고 2만8,000원, 최저 1만7,000원)으로 2,000상자를 팔아 4,700만원의 조수입을 올렸다.

노지포도 가설비 정도 나온다는 식재 2년차 농사에서 의외로 수확량이 많고 틈새시장을 만나 많은 소득을 올렸다.

2001년 1월7일 하루종일 내린 눈으로 하우스 일부가 무너졌으나 정부의 지원과 이웃의 도움으로 완전히 복구했다. 3월2일 하우스 개폐기를 닫고 보온을 시작했다. 온도관리, 관수, 농약 살포, 순지르기, 솎기 등의 작업을 지난해와 똑같이했다. 수확은 하우스포도가 끝나고 노지포도가 출하되기 시작하는 7월20일에 맞추었다.

하우스 포도로는 너무 늦은 때라 불안한 마음으로 백운산작목반을 통하여 서울 가락공판장에 출하했는데 5㎏에 2만8,000원을 받았다. 틈새시장 출하작전이 성공을 한 것이다. 하우스포도는 7월20일부터 8월14일까지 5㎏들이 3,000상자를 출하해 평균 2만1,000원(최고 3만원, 최저 1만8,000원)을 받아 총 6,300만원을 벌었다. 노지포도는 8월16일부터 9월10일까지 출하했는데 김천 포도가 끝나고 영동과 모동 포도가 출하되기 직전이라 역시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5㎏들이 2,500상자를 출하해 상자당 평균 7,000원씩 모두 1,7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두해 농사 소득으로 땅을 사면서 진 빚도 갚고 IMF를 졸업했다. 2000년에는 조수입 5,250만원에 경영비 1,245만원이 들어 4,005만원의 소득을, 2001년에는 조수입 8,050만원에 경영비 1,743만원이 들어 6,307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농장 조성을 위해 잡초 무성한 밭 한귀퉁이에 등산용 텐트를 치고 작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났다. 폭설에 하우스가 넘어가던 날 태어난 막내 동해가 이제 첫돌이 넘었다.

한자가 넘는 눈을 등에 업고 그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하우스를 보시고 망연자실하여 오열하시던 어머니께서 오늘은 동해를 업고 포도밭을 돌면서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신다. “포도야 포도야 빨리 익어라. 동해야 동해야 빨리 크거라.”

지난날 감동 깊게 읽었던 소설 〈대지〉의 끝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타라(대지, 땅)로 가자’고 했다. 동해가 무럭무럭 자라는 도곡 농장에도 내일 동쪽에서 해가 뜨리라.

   
  [최종편집 : 2002/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