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들에서 태어나 들에서 자랐다. 눈을 들어 앞을 보면 언제나 잎들이 파릇이 돋아오른 온갖 작물을 재배하던 밭이 있었고, 그 너머로 우뚝 솟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때부터 삶을 의지해온 푸른 들녘. 내 인생은 그 들에서 자라나는 초록 풀잎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경북 예천군 유천면 시곡동은 전형적인 시골 오지마을이다. 동서 양쪽으로 어머니 가슴같이 포근한 야산 아래 오롯이 감싸인 그곳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하며 13년간의 유년기를 그곳 산골마을에서 보냈다. 등하교길은 족히 10리가 넘었다. 하루하루가 어린 나이로 견디기엔 힘에 부쳤지만 나름대로 공부는 열심히 해서 항상 우등생을 놓치지 않았다.

빈농아들로 태어나 온갖 시련 겪어

그런 나에게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중학교 진학 포기. 집안 형편상 더이상 학업을 시킬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내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뻔한 살림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 나는 미명을 기해 밤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떠나 도착한 곳이 서울. 청량리역에 첫발을 내딛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처음 몸을 의지한 곳은 지금의 청운동 경복중고등학교 구내식당. 6개월간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나름대로 홀로서기에 자신이 생긴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충무로의 찐빵집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월급을 한푼도 받지 못한 나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청계천에서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파출소에 의해 쫓겨난 뒤 이발관에서 보조 일자리를 얻었다. 열심히 배웠다. 몸은 고되었지만 하루 600원의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지탱해주었다. 그러기를 3년.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힌 나는 을지로3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경력이 있는 만큼 수입도 갑절로 올랐고 손님들이 주는 팁까지 알뜰히 모아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한번 더 내 의지를 시험하려는 듯 시련이 닥쳐왔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몸이 조금씩 축났던 것이다. 급기야는 병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치료에만 전념하며 요양하기를 1년6개월여. 다시 건강을 되찾았을 때는 또 빈손이었다. 허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젊기에 두려울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채소상이었다. 우선 중고 리어카를 하나 장만했다. 청량리시장에서 채소를 사다가 답십리 골목시장에서 되팔았다. 단골손님까지 하나둘 늘면서 장사하는 재미에 폭 빠졌다.

하지만 겨우 찾은 안정은 다시 한 번 뿌리째 흔들렸다. 내가 장사하던 곳이 소방도로 위 무허가 재래시장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채소장사도 그만둬야 했다. 그러던 차에 섬광이 하나 비춰 들어왔다. 당시 밭에서 채소를 받아오며 알게 된 어르신 한 분이 동업을 제의해왔다. 나는 그분의 도움으로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군농장에 터를 잡게 됐다.

1984년 11월10일, 나는 바로 땅 1만2,000평을 임대해 내가 팔았던 채소류들을 직접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씨앗을 뿌리고 물과 거름만 챙겨주면 쑥쑥 자라줄 것만 같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짓던 농사 경험을 되살려보려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5년간 실패만을 거듭하다보니 89년에는 6,000만원이란 어마어마한 빚만 남았다. 여기서 이대로 끝나는 건가. 아내와 며칠을 고심하고 의논을 거듭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다시 도전해보자고 의기를 투합하고, 실패하면 둘이 같이 농약이라도 마시자며 각오를 다졌다.

한겨울부터 거름을 내며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물이 회생하는 봄이 오면서 나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내 모습을 성실하게 보셨던지 동네 주민 두 분께서 농협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 시설하우스 12동을 늘려 짓고는 시설채소 재배에 도전했다. 쪽파·실파·시금치·쑥갓·열무 등을 재배하는 동시에 밤에는 가락동 시장을 직접 오가며 채소들을 팔았다.

농사가 진척을 보이고 그 결실도 두드러지게 되자 이웃에서도 하나둘씩 시설채소 재배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3월15일, 시설재배농가들이 뭉쳐 '장현작목반`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시설재배의 전문화를 목적으로 농업기술을 의논하고 습득하는 한편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등 본격적인 작물재배에 돌입했다. 철저한 품질관리와 상품화에 역점을 두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는 가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가락동 농산물시장 상인들에게 '최종삼`이란 이름 석자만으로도 믿을 수 있는 채소를 출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농업전문교육과정 두루 이수 기술습득

그렇게 90년부터 3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올린 소득만도 약 3억원 정도. 시설하우스가 총 80동이었다. 게다가 94년에는 꿈에도 그리던 밭 1,800평을 내 이름 석자로 등기 이전까지 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부농의 꿈이 실현된 것인가. 그날밤 너무나도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벅찬 감격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마을에 시설채소 농가는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고 우리 지역은 집단적인 시설하우스 단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내게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관행농업만으로는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밑천 삼아 충북 괴산군의 한국자연농업학교에 입학해서 기본연찬, 전문연찬 과정을 이수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농협안성농민교육원, 지도자교육원, 경주환경농업교육원, 공주농협지도자교육원 등 농업관련전문교육과정을 두루 섭렵한 나는 장현작목반원 17명과 함께 배운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일반재배 방법에서 탈피해 자연농업 및 유기농법을 직접 실험하며 실재배에 접목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처음엔 거듭되는 실패의 고배도 마셔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기술에 눈을 뜨게 됐고, 재도전을 거듭한 결과 98년 드디어 경기도에서 최우수 작목반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그 이듬해에는 농협중앙회 '이달의 영농조직`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영농조직 본상까지 수상했으나 2000년 조직대상에서는 안타깝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시설채소로서는 처음으로 대상 후보에까지 올라간 작목반이라는 하나의 전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만족할 수 있었다.

농사가 번창하면서 내 마음에도 조금의 여유가 찾아왔다. 지나온 세월을 차분히 돌아보았다. 그 속엔 홀홀 단신 오갈데 없는 내 모습이 있었고,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나를 지탱하게 해준 많은 고마운 이들의 모습도 함께 있었다. 그들에게 받은 영양분을 흡수하고 이만큼 뿌리를 내렸으니 이제는 내가 가지를 뻗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94년 4월 어느 날부터인가 인근의 소년소녀가장 및 독거노인들과 자매결연을 하고 쌀과 생활보조비, 직접 재배한 채소류 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아주 적은 부분이나마 내가 그들에게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저 기쁘기만 했다. 내친김에 효도관광과 효도잔치까지 열어드렸다. 이 일이 97년 우리 작목반에 알려지면서 회원들 모두가 일치 단결해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소년소녀가장·독거노인 돕기 앞장

그때부터 반원들은 5개조로 나뉘어 소년소녀가장들과 자매결연을 하고 매월 12만원의 생활보조비와 직접 재배한 농산물 등을 지원하고 있고, 동네 어른들을 위한 효도잔치 및 관광도 더욱 알차게 프로그램화하여 진행하고 있다.

나는 45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시련 속에 내던져졌었다. 그럴 때마다 거친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 억새를 생각했다. 가벼이 흔들리는 연약한 풀이지만 그에게 거세게 몰아치는 한때의 태풍이야 슬며시 고개 숙여 보내버리고, 무릎에 묻은 흙먼지쯤 탁탁 털고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햇살이 들면 맑은 이슬을 머금고 더욱 파릇한 빛을 발하는 그런 풀잎처럼 나 역시 그렇게 내게 닥치는 시련들을 이겨나가고자 노력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끈질기게 버텨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지인들의 용기와 격려가 바탕이 되었던 것 같다. 부족한 어깨에 지금 이렇게 많은 짐을 지고서 나름대로 버텨나갈 수 있게 된 데에도 역시 25명의 우리 장현작목반 식구들의 도움이 무엇보다도 컸음을 알며 그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다.

우리의 꿈은 무엇보다도 친환경농산물 재배의 기술발전을 통해 보다 신선한 먹을거리를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지금도 처음 시작할 때의 굳은 결의를 잊지 않고 있다. 아울러 농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열과 성으로 시설농가를 지켜가는 지역사회의 농촌지도자로 거듭날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다져본다.

   
  [최종편집 : 2001/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