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한가한 시간, 고물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함양 양잠가> 가락에 취해 어깨를 들썩이다가 잠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본다. 결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지 어느덧 15년. 아직 세월을 아쉬워할 나이는 아니지만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향 순창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날 지금은 시누이가 된 직장 선배의 소개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는 남편을 만났고, 1985년 결혼식과 함께 다시 순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을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을 할 때도 결혼을 하면 농촌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농촌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민주화 열기와 함께 농촌에서는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순창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편한 교통과 열악한 문화환경, 마땅한 이야기 상대도 없는 생활에 차츰 권태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나는 농민운동에 참여하면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순창지역에서는 수세 싸움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수리시설이 엉망이어서 제대로 이용도 못하는데 세금은 꼬박꼬박 내야 하니 불만이 쌓인 농민들이 수세거부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때도 이미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드물어 나는 집회 때마다 앞장을 섰고 전경들과 맞서다보니 집을 비우는 일이 잦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활동을 만류하며 꾸중과 함께 집안 살림이나 잘 돌볼 것을 요구했지만, 이장을 맡아 동네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남편은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농민운동을 통해 인생의 소중한 지침을 얻었다. 함께 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동네의 한 어른으로부터 “농촌에서 살려면 농촌의 흠까지도 사랑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지금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법이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론을 조성하고 모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깨달은 것도 있었다. 농사나 짓는다고 체념하지 말고 취미와 특기를 갈고 닦으면 인생의 황혼이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우리 가락을 익히는 것이었다.

88년으로 기억되는데, 순창문화원에 일주일에 두 번씩 저녁시간을 이용해 우리 가락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시간을 쪼개 장구를 배웠더니 매력이 느껴졌고, 마을 아주머니들에게도 함께 배울 것을 권유해 정월대보름때는 서투르나마 마을 걸궁굿을 칠 수 있었다.

그런데 장구를 배운 내가 굿패를 이끌자니 한계가 있어 상쇠 역할을 하려면 다시 쇠(꽹과리)를 배워야 했다. 하지만 군내에서는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주머니들과 의논해 인근에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필봉농악 전수관에 입소했다. 이곳은 방학때면 전국에서 대학생들이 매주 100∼200명씩 찾아와 전수를 받는 곳인데 일반인 그것도 농사를 짓는 아주머니들이 일주일동안이나 전수를 받겠다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신명나는 우리가락 속에 허벅지가 퍼렇게 멍들도록 장구채와 쇠채를 두드리다보니 일주일이 짧게만 느껴졌고, 그때부터 자신이 생겨 마을에서는 제법 강사 행세도 하게 되었다.

또 순창군내 굿패 동호회인 '꿟소리 굿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을 받는 일도 많아졌다. '꿟소리 굿패`는 순창지역 사람들로 구성됐는데 교사와 직장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농민이며 나는 지금 부쇠를 담당하고 있다.

굿패 활동을 하면서 여러번 공연에 참여했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이 99년 일본 가고시마현 미즈마정에서의 공연이다. 이 공연은 전북도와 가고시마현의 문화교류사업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특히 일제 때 한국에 살았거나 한국이 고향인 일본사람들의 반응이 대단해 문화사절로서의 보람이 컸다.

나는 굿패 활동을 통해 농협 주부대학 강사를 맡기도 했으며 지금은 초·중학교 특기적성교육 담당 교사로 일하고 있다. 아직도 실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잊혀져가는 우리 가락을 가르친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농사를 지으면서도 늘 활력이 넘친다.

우리 가락의 맛을 알고부터는 얼핏 민요가락만 들려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모르는 노래는 녹음해서 듣고 좋은 노래는 주부와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어릴적 엄마가 밭을 매거나 길쌈을 하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내 귀에는 아직도 생생한데, 이런 가락을 계속 발전시켜왔다면 아이들 특별활동 시간에 따로 돈과 시간을 들여 배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크다.

가끔 교사들이 나에게 “굿거리 장단을 어떻게 치느냐” “두마치 가락은 어떻게 치느냐”하고 물어올 때가 있다. 작년 가을에 관람한 학생예능대회에서는 진도아리랑 가락이 이상하게 변형돼있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이 발맞추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갑자기 “남원산성 올라가…”할 때는 정말 한심하고 속상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우리 것에 대한 기본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때문이다.

우리 것에 대한 나의 사랑은 가락이나 풍물에 그치지 않는다. 얼마 전 인근 마을에서 서양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어 알아보니 우리마을에서도 배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 시간과 정력을 우리 것에 쏟아보라고 권유했더니 곧 서양춤을 그만두었다. 내가 지금도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딸 다영이에게 피아노보다는 우리 가락을 먼저 접하게 했더라면 하는 점이다. 물론 내가 우리 가락을 익힌 다음에는 다영이에게도 가르쳤는데 지난 겨울 전수관 스승님들이 “딸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연습해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또한 나는 농가주부이면서도 컴퓨터를 비교적 일찍 접했다. 컴퓨터와의 첫만남은 6년전 지역 신문사 주부기자로 자원봉사를 할 때였는데 능숙하게 다루진 못해도 일단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었다. 그뒤 경기도에서 농림부가 주관한 2박3일간 PC통신 교육을 받았는데 농사일에 쫓기느라 한동안 소홀하다가 아이들 학교에 컴퓨터를 잘 아는 교사가 부임해오면서 저녁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무료로 컴퓨터를 배우게 되었다.

물론 지금 내가 컴퓨터를 많이 활용하거나 다루는 실력이 월등한 것은 아니다. 겨우 컴맹을 면한 수준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주부들이 컴퓨터에 겁을 먹고 무료로 배우는 것마저 마다할 때 나는 적극적으로 덤볐던 덕분에 우리 아이들과 함께 서로 컴퓨터를 차지하려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내 손으로 자판을 쳐서 문장을 완성하고 간단한 편집을 거쳐 인쇄를 해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한편 나는 집안일과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사회활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순창군정지기단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전에는 순창여성농민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요즘은 문화부장을 맡았다. 남편은 큰애가 다니는 중학교의 운영위원이다.

내가 이러한 내력을 밝히는 것은 명예를 얻고자 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일들이 값지고 보람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촌에도 여러 단체가 있지만 대개 보조금에 의해 운영되거나 전시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면 내가 몸담고 있는 단체들은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지역발전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회장을 맡고 있던 98년 순창여성농민회는 여성농민의 건강실태를 조사해 그 심각성을 알리고 보건지소에 물리치료기 설치와 부인병 무료검진 혜택을 늘려줄 것을 요구,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냈다.

나는 축산과 벼농사·밤농사를 짓는 농가주부로서 애들을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도 불편할 게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우리 가락을 즐기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이 시대와 이 사회의 주인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나를 가꾸고 내가 바로 서면 세상이 달라보인다. 그래서 나는 우리 농가 주부, 아니 여성농민들도 언제나 배우는 자세로 자신을 가꾸고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지역 사회구성원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우리 고장을 건실하고 윤택하게 가꿔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의무가 있지 않은가….
   
  [최종편집 : 2000/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