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보다 슬픔이 많았던 시절,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들을 더듬어봅니다.
우리나라 최대 화훼단지로 꼽히는 김해에서 국화재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규모 꽃재배 농가로 우뚝 서게 된 우리부부는 한품목만 10년 넘게 길러오면서 '국화박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는 김해가 고향도 아니고 자라면서 꽃재배를 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실패를 거울삼아 배우고 익힌 것이니 지금의 우리부부가 스스로 자랑스럽습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저는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초등학교 1학년인 남동생과 저의 홀로서기는 시작됐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취직해 사십리되는 길을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이라 아침·저녁은 들에서 뜯은 나물로 죽을 끓여 먹고 유일하게 점심도시락은 꽁보리밥에 된장속에 넣은 고추가 진수성찬일 때였지요. 꽁보리밥 한번 배불리 먹지 못하고 늘 배가 고팠지만 열심히 모아 양품점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양품점으로 동생이 대학 1학년을 마칠 무렵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바싹 마른 체격에 움푹 들어간 눈, 갈퀴 같은 손, 정말이지 제가 그리던 신랑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닿았던지 82년 10월24일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인생을 위한 행진을 하였습니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한우 12마리를 비육하고 저는 양품점을 계속 열어 나갔습니다. 당시는 한우비육이 경기가 좋아 백일만에 내다 팔면 꽤 짭짤했었고 일에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년후 소값파동이 오자 남편은 사료비를 충당할 수 없어 소비육에서 손을 떼고 말았습니다.
실의에 빠진 남편을 설득해 우리에게는 벅찬 아동복코너를 인수받아 운영했지만 얼마되지 않아 옆에 대형백화점이 생겨 우리 가게는 문을 닫게 되었고 친정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번이나 실패한 남편과 나는 어머니와 남동생이 살고 있는 단칸방에서 1년을 참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열심히 살면 반드시 결실은 있을 것`이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한달에 6천원하는 달세방을 어렵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둘만이 오붓하게 살 수 있다는 설렘에 비록 달세방이지만 남들 삼층집하고도 바꿀 수 없었지요.
뭘 할까 망설이다가 손수레장사를 하기로 하고 낮에는 수박, 밤에는 영덕게 장사를 시작했는데 첫날 나오지도 않는 '수박사소∼`하고는 스스로 웃기도 여러번 했습니다. 첫 아이를 가져 남산만한 배를 끌고도 우리 부부는 호흡을 같이 했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한 대가로 적금통장 2개에 50만원짜리 헌 트럭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부산 강서구에 사는 종동서의 소개로 꽃재배 농장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제법 수입도 괜찮고 마침 88올림픽이 있어 전망이 밝다고 하시면서 “자네들 부부 같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네”하시기에 용기를 얻어 우리 부부는 김해를 5일동안 발이 부르트도록 샅샅이 답사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서로가 원망이나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하고 꽃재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걸 정리하여 87년 5월20일 지금 살고 있는 김해시 불암동에서 꽃농사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꽃이라곤 전혀 모르던 우리가 '젊음`이라는 용기 하나만 믿고 아는 사람도, 기댈 곳도 없는 외딴 곳에서 그동안 모아둔 7백30만원으로 목재하우스 3천평을 인수받아 내 농장이라는 뿌듯함에 밤낮없이 일만 하였습니다.
새벽 4시만 되면 전깃불을 켜놓고 일을 하고 밤에는 국화재배기술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꽃농사에 우리들의 꿈과 희망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육체적 고통이야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가진 것 없는데다 아무 기술없이 작물을 재배하는 앞 안보이는 장님처럼 한걸음 한걸음 시작하는 꽃농사 1년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몇푼 안되는 돈을 모으기 위해 폐비닐과 비료포대·빈농약병등 우리는 작은 것부터 아끼고 모았는데, 두달을 모아 팔면 7천∼8천원정도이지만 10년전에는 이 돈이면 라면 두박스는 살수 있었습니다. 우리 세식구는 라면만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일할 수 있었기에 버려진 재활용품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인 경북 안동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면서 우리 부부가 세운 첫번째 목표는 5년안에 우리집을 마련하는 것, 둘째는 우리 땅을 갖는 것, 세번째로 바라는 것은 현대식자동화 하우스가 꿈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편의 이름으로 정기적금 5천만원짜리를 불입하고 내이름으로 69만9천원을 월불입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식구는 하우스안 비닐로 만들어진 농막방에서 2인용 전기장판 한장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기장판 한장으로 6년을 살았습니다.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쓰고 누워있으면 따뜻하지만 한번 일어났다 다시 누우면 썰렁하기 그지없는 서글펐던 그날들. 1991년 2월8일 둘째를 낳았는데 제왕절개수술을 한 탓인지 몸이 붓고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한평 조금 넘는 농막방에서 아기에게 우유 먹일 시간이 없어 베개 위에 우유병을 걸쳐 놓고는 일하다 와보면 우유병은 옆에 떨어져 뒹굴고 있을 때가 일쑤였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수 있는 그날까지 아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점검하기 위해 저는 '농장운영일지`와 '가계부`를 착실히 기록하였습니다. 하루하루 점검하여 하루에 5백원정도는 더 아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은 돈을 한달에 1만5천원씩 아들 이름으로 저축하고 매일 밥 지을 때 한끼에 쌀 두숟가락씩을 절약했더니 모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한달을 모았더니 5Kg이 절약되었습니다.
밤낮없이 분주하게 뛰어다닌 결실로 어느덧 정기적금을 타고 부산시 강동동에 1억7천만원 상당의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당초에 세운 계획을 1년 앞당겨 이루게 된 그날, 남편과 나는 기쁨과 뿌듯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객지였기에 늘 외롭고 농사를 지을 바에는 확실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저축하여 이만큼의 기반을 잡았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벅차옵니다.
다행히 우리는 95년도 농가보급형 내고향 새기술 보급사업 자동화시설 하우스 보조사업자금을 받아 8백평을 신축하고 바로 옆에는 자동화 하우스 6백평을 지어 지금은 파이프온실과 국화육묘장을 포함해 모두 3천3백평의 면적에서 국화를 키우고 있습니다.
공부에 대한 애절함을 마음 한구석에 늘 갖고 있었던 저는 남편이 지난 97년 경상대 농과대학 최고농업경영자과정을 수료하자 이듬해인 98년 저도 같은 배움의 길에 나섰습니다. 남다른 각오와 애착심을 갖고 교수님 강의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습니다. 직접 꽃농사를 하고 있는 우리부부는 화훼를 전공했습니다.
저처럼 배움의 길을 잃은 많은 농촌 여성들은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보라고 권유해보고 싶습니다. 좌절하지 말고 하면 된다는 굳은 의지만 있으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득하기 그지없던 지난날을 되돌아 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우리 농장을 가진데다 97년6월 논을 구입하게 되어 우리 부부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지도 어언 13년. 이젠 내집과 국화농장의 자동화 하우스, 우리 논도 사게 되어 이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없이 순수한 우리들의 노력으로 정착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장남 승훈이와 둘째딸 민지에게도 엄마로서 부끄럼없는 삶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 땅에서 거둔 결실로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지금은 전국 최대 규모의 국화모종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으며 국화재배기술 또한 전화 한통이면 알기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가르쳐주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마음자세로 국화를 키워온 우리 부부는 시설원예 하면 '만능박사`로 불릴 만큼 기술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듬뿍 담아 아껴주고 감싸주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의 빈자리를 채워준 든든한 남편에게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뜻으로 앞으로 더욱 열심히 생활하고 더욱 알찬 생활을 꾸려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최종편집 : 1999/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