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제대를 앞두고 있던 67년 여름 고향에서 극심한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게 됐다는 연락이 왔다. 여덟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신 터라 1남3녀의 장남으로서 어머님을 모시고 논 2천평과 밭 5백평 농사를 지어 빚을 갚아야 하는데 제대를 해봐야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아 월남 파병을 자원했다. 처음에는 1년만 파병생활을 할 생각이었으나 이듬해 역시 가뭄으로 모내기를 하지 못해 1년을 연장, 모두 5년의 군복무를 하고 6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농사는 대풍을 기약하고 있었으며 내가 월남에서 송금한 돈은 어머님이 잘 모아두어 높은 이자가 나가는 빚을 모두 갚고 1천1백평의 논을 살 수 있었다. 70년에는 광산군(현재는 광주광역시) 평동농협에 입사하여 농협운동에 몸담다가 84년4월 농사에 전념하기 위해 조합원 신분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나는 체중이 많이 늘어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힘을 안들이고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못자리에서의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해 상토 대신 거적을 이용한 못자리를 설치해 2년간 실험해보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월남에서 보았던 벼농사였다. 우리는 벼농사에 있어 못자리를 설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들은 모두 직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88년 농사철을 앞두고 직파농법을 실험해보기로 결심한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관련 자료를 알아보았지만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60평의 시험포를 만들어 논을 고르고 비료를 뿌린 뒤 볍씨 1Kg을 뿌렸다. 손으로 잡초를 뽑아주면서 관리를 잘했더니 벼가 잘 자랐는데 이삭이 여물 무렵 쉽게 쓰러졌다. 하지만 수확량은 못자리를 하던 때의 평년작과 비교해 차이가 없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89년에는 겁도 없이 논 7천평 모두에 <천마벼>를 직파했다. 볍씨를 뿌리고 10여일이 지나도록 흙탕물이 가라앉지 않고 싹도 보이지 않기에 물을 빼보았더니 볍씨가 모두 썩어 있었다. 다시 종자를 준비해 재차 로터리작업을 하고 파종했다. 이번에는 싹은 제대로 나왔는데 못자리를 했던 다른 사람들의 논은 이미 파랗게 자란 벼로 보기가 좋았던 것에 비해 내 직파논은 너무 초라해 이웃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종후 25일 정도 지나자 새끼를 치기 시작해 우리 논도 제법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피가 문제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뽑고 속에 숨은 것은 제초제를 뿌려주자 생육이 한결 좋아져 무난히 농사를 짓는가 싶었다. 그러나 8월 하순 무려 7백mm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를 모두 쓰러뜨리고 말았다. 30여명의 인부를 사서 벼를 묶어 세웠지만 농사는 결국 실패였다. 그 와중에서도 위안이 된 것은 키가 작은 벼는 쓰러지지 않고 잘 여물었다는 점이었다.
이듬해에는 키가 작은 <이리374호>를 파종했는데 또 종자가 썩어서 싹이 돋지 않았다. 혹시 밑거름에 문제가 있지 않는가 싶어 시험을 해보니 과연 그랬다. 요소와 유안 복비를 준 시험구는 볍씨가 모두 썩고 비료를 주지 않은 시험구는 잘 자랐던 것이다. 이때부터 볍씨를 파종할 때 일절 밑거름을 쓰지 않는데 볍씨는 약 15일 동안 자신의 영양분으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운 다음에야 사람이 주는 비료를 흡수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직파재배에 관심이 있거나 처음 시도해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한가지 덧붙이자면 꼭 밑거름을 주고자 할 때는 파종 1주일 전에 물을 가두고 비료를 뿌린 다음 로터리작업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파종 직전 다시 한번 로터리작업을 하면 둑새풀을 막을 수 있고 볍씨도 싹이 잘 나온다. 1차 비료는 제초제를 살포하는 날 뿌려주면 된다. 여러해 동안 연구해온 결과 파종 시기는 중부지방은 5월15일, 남부지방은 5월20일경이 적기로 생각된다. 너무 일찍 파종하게 되면 비료와 제초제를 한번 더 써야하는 번거로움과 비용의 추가지출이 불가피하다.
90년부터는 이웃 농가에도 직파재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기온이 맞지 않은 이른 시기에 보온못자리를 설치하고 많은 농약과 비료를 투입해야 하는 일반적인 농법은 노동력과 비용, 모든 면에서 비경제적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우선 마을 사랑방에서 비디오를 이용해 벼 직파재배 방법과 장점을 설명했고 이후 20여 인근 마을에서 직파기술을 보급하였다.
벼 직파재배농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한국 원시미 재배기술연구원`을 만든 것은 91년의 일이다. '원시미`는 원래 벼농사가 야생 벼를 채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터이므로 비료와 농약을 적게 쓰고 못자리나 모내기도 하지 않는 직파재배가 원시농법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단체는 내 집을 사무실로 쓰고 있으며 회원은 현재 1백50명 정도이다.
92년에는 9백평의 시험포를 만들고 5월4일 원시미 회원을 비롯해 농민 3백여명을 초청해 무경직파 연시회를 열었다. 못자리를 하지 않고도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분들에게 언제든지 찾아와 시험포를 살펴볼 수 있게 했고 가을에 수확평가회를 가질 것을 약속했다.
그해 가을 약속대로 수확평가회를 열었는데 9백평 시험포에서 콤바인포대로 83가마가 수확되자 모두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기계모를 낸 논은 75가마정도가 나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93년에도 연시회를 열었는데 직파재배가 어느 정도 소문이 난데다가 홍보에도 신경 쓴 결과 무려 2천여명의 농민들이 전국 각처에서 몰려들었고 보도진도 많이 찾아왔다. 이 무렵 인근에서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앙기를 처분하는 농민이 줄을 잇기 시작한 것이다.
또 직장에 근무하면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전업농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생기고 일손을 놓았던 고령 농가에서도 다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못자리와 모내기가 없어져 일손이 크게 절감되고 수확은 콤바인으로 하니 농사짓기가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94년에는 평동농협 관내 조합원의 90% 이상이 직파재배에 참여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늘어만 가는 휴경농지를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한 변화였다. 농민들은 벼농사에서 남는 일손을 비닐하우스를 통한 고등채소 재배에 투입하여 농업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가고 있었다.
직파재배가 보급되면서 나는 전국의 농민들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화를 받았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농민들도 무수히 만났다. “종자가 썩어서…” “잡초가 무성한데…” “벼가 쓰러졌는데…”하고 문의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일이 해결책을 일러주었다.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농민신문을 보며 벼농사를 짓는 농민이 나올 때마다 직파재배에 대한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외지에서 모내기철을 앞두고 이곳을 방문했다가 못자리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이제 호남지역에서는 '직파재배`라는 말이 더이상 낯설지 않다. 그래서 몇년 전부터는 다른 지역에 직파농법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올해는 5월4일 경남 의령군에서 직파 연시회를 열 계획이다.
지금까지 직파재배를 연구하고 보급하면서 아쉬움도 많았고 보람도 많았다. 먼저 아쉬웠던 점은 지금은 직파재배가 널리 알려졌고 많은 농민이 참여하여 점차 일반화하고 있지만 농업연구기관의 시선이 그동안 곱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직파재배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농법이므로 보급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문서를 국가기관으로부터 받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하기도 했다. 또 이앙기를 비롯해 일부 농기계가 불필요해져 관내 농기계영농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농기계판매업자와 농기계수리센터로부터 오해를 받았던 일도 가슴 아프다.
반면 94년 농협중앙회로부터 '올해의 새농민상(노력상)`을 수상하고 농업기술단 강사로 활약하게 된 것은 보람이라 할 것이다. 또 98년에는 '절약형·아이디어농업 박람회`에서 '이모작 벼 손뿌림 직파재배`가 농림부장관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최종편집 : 1999/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