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모두가 잠든 새벽이다. 난 이 시간을 참으로 좋아한다. 어제를 알차게 보냈기에 오늘을 시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하다. 누구의 뜻도 아니고 짜여진 프로그램 속의 일과가 아닌,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하리라. 어제의 먼지를 묻고 상큼하게 다가오는 새벽공기는 늘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이 새벽처럼 다가와 나를 깨운다. 못다한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간 나는 나름대로 홀로서기를 위해 애써봤지만 너무도 힘이 들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나보다 일찍 결혼한 내친구 남편의 사촌형이었던 그때 그이의 모습은 맑고 순수함이 넘쳤으며 젊음속에 뜨거운 정열이 살아있는 듯했다. 그이 앞에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던 내가 어느덧 사랑스런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볼 때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낀다. 나는 지금까지 흙과 함께 해온 내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흰눈속 보리싹`에 신비감
농사에 '농`자도 모르던 내가 16년전 결혼이후 신랑을 따라 농촌 들녘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은 먼저 추운 겨울을 나고 녹지않은 흰눈 속에서 솟아나는 새파란 봄보리 새싹들이었다. 넓고 넓은 들판에 파아란 물감을 뿌린 듯 어린모들이 물속에서 나풀나풀 헤엄을 치는 모습은 세상 모든 것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또 황금빛 들녘을 파도치며 넘실대던 벼이삭들은 정성들여 땀흘린 사람들의 입가에 수확의 기쁨을 머금게 했고 나는 이런 신비스런 땅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난산을 겪으며 첫아이를 사산아로 출산하면서 처음으로 깊은 슬픔을 맛보게 됐고 내 가슴 한쪽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아픈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이후 다시 둘째아이를 가질 무렵 우리 이웃논에 하우스 딸기농사를 짓는 어느 부부를 보면서 남편과 시부모님을 졸라 집 뒤의 논 2백평에 하우스 세 동을 짓고 본격적인 딸기농사에 뛰어들면서 나는 다시 흙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8년동안 하루하루 딸기농사에만 전념하면서 우리는 첫아이와 둘째아이를 모두 아들로 얻었다. 유난히도 며느리와 손자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시부모님은 막내아들을 낳은후로 오랜만에 맛보는 두 손주의 재롱 때문에 언제나 즐거워하셨고 늘 손주들과 함께 보내셨으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입안에 든 것조차도 내놓으실 만큼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셨다. 두 시동생 역시 공부를 마친 뒤 각각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또 이름있는 호텔직원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는 곧이어 시동생들의 결혼식까지 준비하면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냈지만 가슴이 뿌듯했고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1987년 우리가 살고있던 논산시 성동면에 큰 시련이 닥쳤다. 시아버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60여년만에 처음 겪어본다는 폭우로 우리동네 앞 강물을 막아주던 제방이 무너졌고 금방 물이 쏟아져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논과 밭 그리고 집들을 삼켜버렸다. 이른 봄에 심어 놓아 이제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벼이삭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동네 정미소에 보관중인 벼가마니들 역시 물속에 잠겨버렸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참지 못한 남편은 집안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나 역시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남편을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오히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만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지붕만 내밀고 있는 우리가 살던 집을 뒤로하고 인근 피난처인 학교로 발길을 돌릴 때는 너무도 기가 막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형제들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차츰 살림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우리 마을은 이웃에 새 삶의 터를 찾아 이주키로 했다. 정부융자를 얻어 집은 다시 지을 수 있었지만 농사를 포기하면서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게 보내야만 했다.
“꼭 성공해야” 의지 불태워
그러나 우리 부부는 이런 때일수록 뭔가 찾아 재기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농사를 계획적으로 짓지 않으면 자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깨달은 우리는 늘 농민신문과 책을 가까이했으며 틈나는 대로 마을의 농촌지도소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의 꿈을 키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현대적인 자동화하우스 시설이었다. 영농 4H활동을 같이 하던 몇몇 회원들과 함께 수차례의 회의를 거치고 또 직접 자동화하우스를 활용하고 있는 농가를 찾아다니면서 꼭 자동화하우스를 해보고 싶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다행히 농촌지도소로부터 성동면이 성장유망작목반으로 선정되면서 지원의 길이 열려, 10명으로 구성된 4H 작목반원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꼭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낮과 밤이 없을 정도로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며 서로를 격려하면서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또 우리 고장만의 기후적인 특성을 파악하고 다른 지역으로 선진지 견학을 다니며 몇 달을 보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자동화 모델하우스가 그 모습을 드러낼 즈음 이 세상이 무너지는 허망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불과 이틀전까지만 해도 딸이 보고싶다고 하시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두다리가 굳어서 꼼짝도 못하고 가슴이 내려앉아서 정신이 없던 나는 오열을 터뜨렸다. 내가 시골로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많이 속상해 하시며 아무 말씀조차 안하시고 우시던 모습, 이 못난 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자전거에 매달고 오셨다가 일속에 파묻혀 살면서 제대로 친정 한번 다녀가지 못하는 내 형편을 보시고는 말없이 오셨던 길로 되돌아 가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 너무나도 큰 아픔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에게 항상 웃는 모습으로 대하시고 장난스런 목소리로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분, 나에게 밝게 살아가는 길을 소리없이 가르쳐주시던 나의 아버지. 한동안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자동화하우스를 짓는 일 역시 자연히 늦춰졌으며 하우스에 옮겨 심기위해 준비해 둔 1만포기의 오이모종들은 각종 병으로 시들어 갔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게 엉망이 돼버릴 것 같아 내가 나를 꾸짖으며 서둘러 마음을 정리했다. 1993년, 넓은 들판에 벼이삭이 모습을 드러낼 무렵 성동면 삼호리의 중심지인 들판 가운데엔 보기에도 시원하고 멋진 자동화하우스들이 웅장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신기하게도 두겹짜리 부직포커튼이 저절로 하늘을 열고 닫았다. 반듯반듯한 둥근 기둥들은 어떤 태풍에도 끄떡 없을 것 같았다.
아침 저녁으로 초가을의 새촘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 현대화된 하우스안에 꿈에서도 그리던 오이모종들을 옮겨 심을 수가 있었다. 너무 나이가 차서 옮긴 모종들은 활착하는데 많은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 온갖 정성과 노력 끝에 노란 병든 잎은 차츰 윤기가 반질거리게 좋아졌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오이모종들이 어느덧 내 키를 넘어 나와 키재기를 하고 마침내 여리고 여린 포기 포기마다 노오란 오이꽃이 피던 날의 감격은 아마 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힘들고 빠듯한 생활은 계속 되었으나 일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농사일이 나는 그저 좋았다. 시동생들의 뒷바라지가 되어준 8년간의 딸기농사, 갑자기 허리디스크 증세로 고생하는 남편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던 참외농사, 한해 농사 지어서 번 돈을 모두 막내시동생 집 사는데 보탠 토마토농사, 그리고 지금까지 내 모든 것을 대신해준 오이농사, 이젠 제법 익숙해진 수박농사와 2만여평의 벼농사.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던, 내 모든 것을 다 바친 흙에 대한 사랑이었다.
열심히 사는 나날에 “행복”
흙과 함께, 그리고 흙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너무나 대견스럽고 착하게 자란 중3짜리 큰 아들과 언제나 어리게만 보이던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아들. 농사야 최선을 다해 지으면 문제가 되질 않았는데 옛어르신들 말씀대로 어느덧 자식농사 걱정을 해야 하고보니 어려웠던 시절에도 언제나 꿋꿋하셨던 시부모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고 고개가 숙여진다.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지 않으셨던 두분을 보면서 난 결코 그렇게 살지는 않으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지게 되니 아이들은 역시 나의 분신임에 틀림없는 것같다. 어찌됐든 흙을 믿고 모든 것을 바친 내가 그 사랑만큼 내아이들을 믿고 보살핀다면 결코 내꿈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 믿어본다.
난 오늘도 오천여평의 비닐하우스에 내 꿈을 심게 해줄, 아직은 작고 싱싱한 어린 수박모종의 잠을 깨우기 위해 부지런히 차에 시동을 걸어본다. 함박이슬을 머금은 수박모종들은 나에게 “깨워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인사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따뜻한 두손으로 가만히 만져주며 답해본다. “그래, 올해도 부지런히 씩씩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나에게 환한 기쁨을 주지 않을래?”라고. 언제나 태양은 늘 똑같은 빛으로 떠오르지만 그 빛속에 내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나는 행복하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온 나날들. 그런 나의 삶을 사랑하는 나는 언제까지나 '흙 속의 진주`로 살아갈 것이다.
   
  [최종편집 : 1998/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