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하늘 위로 바삐 날아가는 작은 새 한마리. 그 끝을 따라 여운처럼 맴도는 두어송이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하늘빛이 해맑다. 약해지는 의지를 채찍질하며 마음을 굳게 해준건 저 하늘이었다. 오늘보다 내일, 올해보다 내년을 기대하며 꿈을 심고 잡초처럼 모질게 앞만 보며 헤쳐온 세월을 지켜봐준 것도 바로 저 하늘이었다. 지금은 노시부모님 두 분과 장성한 4남매 등 7식구와 밭 8천여 평과 암소 8마리, 감귤과수원 5천여 평을 임차경영하고 새집까지 지어 번듯하게 산다. 누가 봐도 풍족하고 행복한 중농가정 농촌주부인 지금의 나. 하지만 28년 전 새인생을 시작했던 출발점부터 지금까지를 거슬러 올라오면 다시한번 맛보고 싶은 행복의 세월과 생각조차 몸서리쳐지는 불행의 세월이 모자이크처럼 얽혀진다. 지난 오십평생의 파란만장은 나만이 비춰보는 여생의 거울일 뿐 자랑으로 내세울 묘안도 이론도 없다. 하지만 내 손끝으로 만들어진 터전들이 말한다.
「행복은 땀으로 씻어줘야 하는 노력의 열매」라고.
나는 한라산과 바다의 중간인 준산 간 영세농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그때 더구나 막내인 난 학교교육은 기대할 수 없고 그저 짧은 공부와 집안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리고 한라산정 하얀 눈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1969년 초겨울, 난 25세의 성숙한 신부로 다시 태어났다. 시댁은 초가삼간 작은 집이었지만 당시엔 너나없이 초가집이었으므로 흉 될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행복한 꿈과 설렘 속에 시작한 신혼생활에 이내 큰 변화가 생겼다. 남편이 공무원 채용시험 경찰직에 합격해 경찰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정말 기뻤다. 그 시절엔 농촌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고 웬만한 청년들은 하나같이 도시로 나갈 궁리만 할 때였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워낙 완고한 시아버지께 감히 말도 못 꺼내고 고심하던 차에 도시 생활을 이룰 명분이 생긴 게 무엇보다 기뻤다. 초라한 단칸 셋방이지만 그렇게 행복한 도시생활이 시작됐다. 1년이 지난 후 금상첨화로 앵두같이 고운 첫딸도 순산했다. 행복을 싣고 거침없이 달려온 줄기는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세 딸의 어머니로 중년인생에 다다랐다. 처음엔 모자란 줄 몰랐던 월급봉투도 붙박이처럼 한결같은 두께로 느는 식구와 크는 아이들의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숨이 찼다. 그러는 중 남편이 느닷없이 사표를 냈다. 당황하고 막막했다. 살길이 떠오르지 않은 우린 결국 농촌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시댁은 시골중의 시골이었다. 비포장 마을안길 농로에 구멍가게 하나 없는 오지마을로 돌아오던 날, 기울어진 초가오막 앞에서 되 뇌인 말은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하나 보다”였다. 시댁에서 우리 몫으로 준 경작지는 가시덤불과 돌무더기로 덮인 뼘치땅. 그나마도 시댁땅은 돌밭이라 바위틈에 씨를 뿌려 호미끝으로 농사지어야 하는 곳이었다. 낮엔 파리떼, 밤에 모기떼와 싸우며 가시덤불에 긁히고 돌부리에 찢기는 생지옥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도시생활을 대가를 비싼 이자로 치른다는 서글픈 생각뿐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농사, 가난한 농촌을 실감했다. 하지만 난 입술을 깨물었다. 『고생끝에 낙이 오겠지….』
드디어 때가 왔다. 정부에서 축산진흥정책으로 농가에 암소입식을 장려한다는 거다. 남편과 의논 끝에 소를 키우기로 했다. 사실 그곳은 소를 키우기에 유리했다. 경지로는 볼품없지만 광활해서 소 방목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었다. 힘은 들었지만 내 힘으로 꾸려갈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차츰 축산지식을 넓히고 전문 축산인으로 자리 잡느라 수저 들 시간조차 없었다.
남편의 교통사고 전갈을 받은 것은 그렇게 바쁜 어느 날이었다.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병원까지 갔는지 모르겠다. 병실 문을 여니 아침나절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삽시간에 박제인간처럼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숨이 막혔다. 「우리 가족은 끝났구나.」5남매로 늘어난 아이들과 노부모를 어떻게 혼자 감당하랴. 더구나 시어머니도 병상중이라 그 수발에도 손이 모자라던 중인데 남편마저 식물인간으로 돌변했으니. 차라리 나도 따라죽고 싶었다. 몇 밤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잠도 못자고 괴로워하는 날 붙잡은 것은 5남매를 살려야 한다는 모성애였다. 당시 17세이던 큰딸 아래로 13,11,8,6세의 올망졸망한 5남매는 내게 바위 같은 부담이면서 절대적인 용기이기도 했다.
황망 중에 어느 정도 마음을 잡는가 싶었는데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셋째딸이 아빠의 사고를 비관해 제초제를 음독했다. 어미의 애절한 기원도 마다한 채 「내가 죽어 엄마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딸아이는 끝내 눈을 감았다. 남편이 식물인간이 된 지 두 달만에 딸의 죽음을 치러야 하다니.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저주했다. 남편도 오랜 간병 끝에 생명은 구했지만 심한 골절과 뇌손상으로 정상회복이 불가능한 1급장애자가 됐다.
20개월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퇴원하던 날, 비명횡사한 딸의 원혼을 가슴에 안고 불구의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시골집 문앞에 이른 우리 모습은 패잔병의 몰골이었다. 휑하게 눈만 커버린 아이들 앞에 할 말이 없었다. 흐르는 눈물만이 그간의 안부를 대신했다. 20개월을 매일 엄마 아빠 돌아올 날만 손꼽던 자식들 앞에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하고 로봇처럼 앉아있는 불구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모라는 굳건한 울타리가 와르르 무너지는 절망감은 아니었는지. 그래도 자식에겐 희망을 주는게 부모 아닌가.
난 아이들을 불러 태연히 말했다.
「너희 아빠가 저렇다고 실망하거나 기죽지마라. 지금은 불편하지만 몇 달 후면 걷고 일도 할 수 있다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참고 기다리면 그전처럼 건강한 아빠로 돌아온다.」
  난 그날부터 「억척인생」을 시작했다. 내 한몸이라도 다 바쳐 반듯한 가정을 찾을 거라는 어미로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쪼개 우선 급한 불만 끄는데도 어느새 밤이고 돌아와 환자수발하다 보면 새벽이 되는, 밤낮이 따로없는 생활이었다. 눈앞의 일은 남녀 일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했다. 돌무덤을 없애고 흙을 덮어 밭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이왕 농사에 명줄을 걸었으니 한번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개간공사를 의뢰해 한달여만에 2천여평 농경지를 만들었다. 늘어난 농경지를 삯기계로 하느니 그 돈으로 경운기 한대를 사 직접 짓기로 했다. 조작이 미숙해 거북이걸음을 하면 「여편네가 겁도없이 아무데나 몰고다닌다」 「저모양으로 기계를 굴리면 1년도 못가 망가질거다」며 사람들은 눈을 흘겼다. 하지만 넓은 발 위로 경운기를 힘차게 굴리는 승리감은 시시콜콜한 입방아쯤 쉬 씻어주었다. 자신감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줬다. 매년 불모지를 개간하고 소를 기르는 노천 축양장도 마련했다. 하루 세 번 사료급여와 물주기로 소 관리시간이 준 만큼 농작업시간을 늘렸다. 그덕에 매년 개간해 늘린 8천평 농경지도 무난히 운영했다. 암소들도 모두 어미소로 자라 5~6마리 송아지를 출산해주는 복덩이였다. 아이들도 자라 농번기엔 한 사람 몫을 거뜬히 해주니 농사는 갈수록 늘었다. 그래서 감귤과수원 5천평을 임차했다. 임차받은 나무들은 관리소홀로 고사직전이었다. 쌓아둔 퇴비를 듬뿍 퍼넣으며 한철내내 매달리니 나무들은 활기를 찾아 쑥쑥 가지를 뻗었고 검푸른 잎에도 윤기가 돌았다. 꽃이 피는 봄부터 감귤이 열리는 늦여름까지는 관리가 소홀하면 일년농사 망치는 시기라 늘 시간이 모자라 헉헉댔다. 그래도 일에 빠져있는 무아경이 행복했다.
세월은 기억을 지우는 약이지만 그래도 가슴에 집요하게 자리하는 면면의 아픔들은 있다.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보며 「너도 가출할게 뻔하니 며느리로 인정할 수 없고 상속지분 재산권도 임의처분하겠다」는 시아버지와의 갈등, 시어머니도 암수술로 장기입원해 수발하느라 다지은 농사를 버려야 했던 일,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대소변 범벅으로 고목등걸처럼 땅바닥에 뒹굴던 남편과 울다지쳐 엎드려 잠든 막내아들의 애처러운 모습들은 나만이 곱씹어야 하는 슬픈 추억이다. 하지만 이제 애물단지같던 아이들도 번듯한 직장인과 학생이 됐고 소닭보듯 하던 시아버지도 애쓰는 모습에 마음을 여셨다.
요즘엔 잔병치레 한번 없던 내 몸도 세월에 못이기는지 관절통이 잦아진다. 하지만 아직 고생이 끝난건 아니다. 고삐를 늦출 때가 아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처럼 진정 강한 어머니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1급장애자이지만 내게 행복을 가르쳐 준 고마운 남편과 함께 쌓이고 쌓인 만장설화를 하나씩 풀어가며 황혼길을 거닐 그 날은 아직 저만치 있기 때문이다.
   
  [최종편집 : 1997/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