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는 농사일을 모르고 자랐다. 친구들이 학교를 다닐 때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군을 제대한 뒤에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2남 1녀를 두었다. 이후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서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지만 나의 방종과 방탕의 생활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정적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져 비로소 나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빚 독촉으로 마음이 불안했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나는 비로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신앙심으로 마음을 정리해 나갔다.
90년 12월 31일 아내의 권유로 들어간 모 기도원에서 들은 목사님의 설교가 나의 가슴을 때렸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칠십이 넘은 노인이 사업을 시작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다는 설교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당시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문제로 연일 세상이 떠들썩했고 생명산업인 농업의 사양화로 농지전용 및 휴경논 문제가 방송과 신문사회면 머리기사로 자주 보도되었다. 농산물 시간의 기방으로 농업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농지들이 농지를 버리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버려진 땅을 얻어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아내는 노발대발 반대를 했다. 희망이 없다며 다들 떠나는 판에 바보처럼 왜 농촌으로 들어가느냐는 거였다. 아내에 대한 설득은 차차 하기로 하고 나는 여천 일대 휴경논을 찾아 다녔다. 휴경지가 많다 해도 농사짓기 편한 평야지대는 그 어디서도 휴경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주로 산간지대에 산재해 있어서 농사짓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렇게 6개월을 헤맨 끝에 하나님의 점지처럼 나에게 다가온 곳이 현재의 수암산 해발 250m 산간 분지의 휴경논 3만평이었다.
나는 그곳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인지 생신지 몰라 살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처럼 다가온 집단화한 휴경논 3만여 평. 근 10여년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휴경지라기보다는 산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나의 머릿속에서는 그 황무지에 장밋빛 청사진이 화려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유휴경지를 임차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관리하는 조건으로 원만하게 무상 임차할 수 있었다. 그곳은 길도 나 있지 않고 가뭄이 심한 곳이었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1.5km 길을 개척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휴경지 개척의 환상적인 장밋빛 꿈은 말 그대로 환상일뿐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인가로부터 4km나 떨어져 있는 산중에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외딴 임시가옥을 짓고 전화는 물론이고 전깃불조차 없이 호롱불을 켜놓고 밤을 지내는 일은 너무도 무서웠으며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한여름 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나를 아는 사람들의 말없는 비웃음이었다. 뼈를 깎는 어려움이었으나 오히려 큰 자극제로 받아들여 오로지 땅을 일구는데만 모든 열정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당신들이 나를 비웃을지 모르지만 5년내에 나를 동경하도록 만들겠다고 신념을 불태웠다. 아내도 수없는 날을 혼자 눈물로 달랬다. 아내는 내가 용기를 잃을 때마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겨 주었다.
그래도 버려진 땅을 일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최악의 가뭄이 94년 여름을 강타했던 것이다. 이젠 정말 죽었구나 하는 무력감에 절대절망의 위기감을 느꼈다.
깊은 산중에서 타들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학영농의 장밋빛 꿈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2년차의 냉해에는 「1년쯤이야」하며 넘길 수 있었지만, 연속으로 자연재해를 입으니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타들어가는 논을 바라만 보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렇게 좌절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제일먼저 찾아간 곳이 여천군청 한해대책 상황실이었다. 대형 암반관정 시설사업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답변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 다음날부터는 아예 상황실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땅이 아니나」며 하소연에 하소연을 거듭한 끝에 어느 정도 관계자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데 성공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전기를 끌어 들이는 문제가 또 앞을 가로막았다. 한전에서는 200m까지는 전선주를 설치해주지만 가옥 하나에 1.5km가 넘는 먼 거리라서 8천여 만원의 자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관정지원은 따놓은 상태였지만 전력공급이 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뜻이 있다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한해 대책사업으로 대형 암반 관정에 한해 전력을 지원해주라는 한시적 예외조항이 생겨난 것이다. 전력공급확인서를 받고 대형암반관정시설 신청을 하기 위해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8월 중순이었다.
때마침 태풍이 두 차례 상륙하여 100m 이상의 단비를 뿌려주어 그나마 여름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해 태풍을 효자태풍이라 이름 지었다. 그렇게 하늘이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나 해결되니 또 다른 문제가 다가왔다. 하루 350t 이상의 농업용수를 취수할 수 있는 지하수를 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였다.
농업진흥공사 수맥탐사팀에 의뢰하여 수맥탐사를 해야 했는데 물이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가슴을 짓눌러 왔다. 이곳의 진입 부근에 레미콘 공장이 있는데 그 것에서 9공을 시추하였으나 실패한 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100m 이상 높은 이곳에 수맥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이 모든 지원사업이 백지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감이 하루 하루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수맥탐사를 위하여 관계자들이 도착했다. 며칠에 걸쳐 여러 곳을 탐사한 결과 물이 있다는 최종 결론을 듣고는 넘치는 기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깊은 산골 분지에 전천후 과학영농을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시 가슴이 부풀었다. 94년 한해는 어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힘든 한해였다.
95년, 대형 암반관정 시설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나의 새로운 영농설계도 더욱 구체화되었다. 마침내 하늘을 찌를 듯 한 지하수가 용솟음쳤다. 하루 취수량 450t으로 굴착 관계자들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각 전답으로 배관시설이 진행되고 한전에서 전선주 26개를 세워 전기가 공급되니 4년 동안 어둔 밤을 밝혀주던 호롱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깊고 깊은 산중에 바야흐로 문명의 세계가 열렸다.
우리 부부는 그 감격에 밤을 꼬박 지샜다. 너무 뜻 깊은 밤이 아닐 수 없었다. 전천후 과학영농의 꿈이 이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곳은 해발 250m 높이의 산중 분지로 오염물질 유입은 물론 전혀없이 인근 전답으로부터 3km 이상 떨어져 있는 청정지역인데다 지하 150m의 암반지하수로 경작하기 때문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그래서 96년부터는 쌀의 고급화는 물론 식품의 안전성과 신선도를 높여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산·가공·판매 전략을 수립했다. 또 환경친화적 유기농업을 연차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도청으로부터 청정미 생산단지로 지정을 받아 농약과 화학비료를 5분의1로 줄여나갈 계획을 세웠다.
농산물검사소로부터 저농약 품질인증을 받아 고품질 청정미 생산에 성공하여 농협을 통하여 전량 계통 출하하였으며 소비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감자·맥주보리·깨·콩 등 부작목과 농기계 작업 수입도 짭짤하여 연소득 1억 원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지난해 4월에는 여천군민의 상, 11월에는 제1회 전남 식량작물 부문 농업인대상, 농협중앙회 우수 작목반장 등의 상을 수상했다.
MBC에서는 약 15분에 걸쳐 우리 부부의 영농생활상과 고품질 청정미를 홍보해 줌으로써 광고효과까지 높였다.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진입로 1.5km를 개설한 것을 비롯해 산간분지 버려진 휴경전답 3만여 평의 경지정리를 통해 1백% 기계화 영농이 가능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은 순수하게 자력으로 일군 것이다. 만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시작을 안했더라면 오늘의 부와 명예, 산중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몇 해 안에 연 2억 원이 넘는 소득을 올려 농업분야 최고의 농업 경영인이 될 것을 재삼 다짐해 본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신 나를 아는 모든 분과 군청, 면사무소, 농협조합장님과 지도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사업에 실패하여 초라하기 그지없던 나를 마음으로 위로해주고 신앙심으로 붙잡아 준 아내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최종편집 : 1997·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