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도 74세. 지독히도 못살고 힘들었던 시절, 아무것도 없는 땅에 노력을 심고 살아온 그 세월이 아득하기만 하다. 불혹의 나이에 시작한 농촌인생. 거기엔 세 가지 소망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농촌에 도움이 되고 마지막으로 흙과 더불어 노후에 정리하는게 그것이다. 이제 밤나무·산머루단지 6천여평을 가꾸며 북한강이 끝나는 자락에 삼악산 온 언덕을 정원삼아 편히 살고 있으니 그 소망들은 다 이루어졌다. 거기에 이 나이에도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쉼없는 의욕에 감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생을 돌아보려 한다.

교직에 있던 난 해방 후 퇴직하고 역시 교편을 잡고 있던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 후 17년 남편따라 옮겨 다니다 보니 4남매의 출생지가 모두 다르고 고향도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를 찾고 싶은 욕망에 초조해졌다.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주고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점점 커졌다. 그러던 내게 기회가 왔다. 6·25동란으로 주인없는 농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난 경험도 없이 전기불도 없고 글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마을에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갔다. 처녀들의 동구 밖 출입은 물론 젊은 남녀 간의 대화도 흉이 되던 그곳에서 난 당연히 손가락질거리였다. 그래도 아랑곳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인사하고 농사일도 배워가며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병이 나면 푸닥거리나 굿에만 매달리던 사람들을 항생제나 주사로 치료하고 군에 간 남정네들의 편지도 대독·대서해 줬다. 편지를 쓰고 읽는 일은 글 한자 모르는 그곳 사람들에겐 큰 일이었다. 그래서 난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밤마다 날새는 줄도 잊고 배우는 순수하고 소박한 그네들 모습은 눈물겨웠다. 서서히 그곳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 갈 무렵 남편의 전근으로 팔봉생활을 마감했다. 그후로 오랫동안 변함없는 그리움으로 남은 팔봉생활 3년. 그 그리움과 그네들이 보여준 농촌의 참모습은 내 남은 삶을 농촌으로 향하게 했다.

남편의 직장따라 가게 된 강원도. 40세 되던 봄 남편이 타지로 장기 연수를 가면서 난 농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춘천시 석사동의 과수원 부지 3천여평을 임대해 영농자금 5만원을 들고 들어갔다. 도시에 계셨던 시집의 반대와 주변의 만류도 날 막진 못했다. 점토질로 된 과수원땅은 굳을대로 굳어 있었고 지형이 낮아 배수도 안됐다. 미군기지였던 땅이라 오랫동안 배어있던 자동차 기름 탓에 잡초조차 안 자라고 가뭄때면 땅이 돌처럼 굳어 파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난 그 땅을 살리기로 했다.
먼저 구덩이부터 팠다. 쓰레기와 잔돌을 깔고 연탄재와 흙을 얹어 퇴비를 덮고 그 위에 묘목을 심었다. 여자는 집밖 출입도 못하던 그때, 바지에 밀짚모자 쓰고 잡초도 안 자라는 쓸모없는 땅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괭이질하는 내게 던지는 사람들의 조소와 야유는 참기 힘들었다. 그럴수록 「두고보자」며 이를 악물었지만 첫소득은 절망적이었다. 나무가 어리고 냉해까지 겹쳐 판로도 막막했다. 익숙치 못한 농사일에 가정일까지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몰골은 말이 아니고 손에 물집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 힘으로 이룬 농장과 정원 가득한 꽃들을 보며 시름을 잊어야 했다. 내몸이 부서지지 않는 한 다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겨울에는 연탄배달로 정신이 없었다. 방한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마스크를 하고 배달하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리어카 한 대당 배달료 3백원으로 겨우내 일해 벌면 10만원. 그렇게 번 돈으로 이듬해 농사를 할 수 있었다.

농사에 어느정도 자신도 붙을 무렵인 68년, 제3회 전국 새농민상 노력상을 받게 됐다. 전업농도 아니고 뛰어난 것도 없는 평범한 내게 새농민상은 용기가 됐다. 수상자가 받는 저리자금 2백만원으로 내 이름으로 된 과수원농지를 마련, 맘껏 농사를 지었다.

풍작을 목전에 둔 순간 수해가 덮쳤다. 저지대의 우리집 과수원은 호수로 변했다. 며칠 후 물 빠진 자리에 남은 것은 힘없이 달린 잎뿐, 터질듯 잘 익었던 열매들은 땅 위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불모지에 쏟은 내 피같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슬픔과 허탈감을 가눌 수 없었다. 농촌을 떠나기로 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가는 거다. 전업농들도 포기한 불모지를 내가 손댄게 무리지.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고 모진 마음을 먹으려하는데 내 발목을 붙잡는게 있었다. 「새농민상」이 그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공무원 부인이...」하는 조소의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그래서 난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화훼·관상수재배로 다시 한번 승부를 걸기로 했다. 먼저 객토사업과 토질개선부터 시작했다. 중장비는 커녕 리어카도 귀한 시절의 객토작업이란 버려진 쓰레기로 매립하는게 최선이었다. 여름철 쓰레기 분리작업은 쓰레기 악취와 파리떼로 먹은 걸 다 토해내게 했다. 썪은 짚에 인분을 재워 퇴비도 만들어 썼다. 그렇게 고생하다 보니 물빠진 그 땅도 비옥한 농토로 바뀌었다.
배수로를 뚫어 수해걱정도 없앴다. 그 땅에 시작한 화훼와 채소는 성공적이었다. 딸기재배농가가 없던 춘천에서 처음 들여온 딸기재배도 훌륭한 소득원이 됐다. 서울 과일시장에서 주먹만한 딸기를 처음 본 후 딸기밭까지 찾아가 몇날며칠을 딸기밭에서 일하고 품삯 대신 받아 온 모종으로 시작된 딸기재배였기에 내겐 그만큼 큰 의미였다.
관상수 재배도 성공적이었다. 개나리·회양목·사철나무·삼목 등 뿌리만 내리면 날개 돋친듯 팔려 새벽부터 밤까지 작업해도 수요를 대지 못할 정도였다.
딸기재배가 확산되고 노지재배가 비닐촉진재배로 바뀔 무렵 과잉생산으로 값이 떨어질 것 같아 양록사업에 손을 댔다. 당시 희귀동물인 사슴은 농가에서 엄두도 못낼 고가품이었지만 살기가 나아지면 녹용은 주요 농가소득원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인 사슴의 사육은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과식과 체중과다 때문에 분만시 수없는 사슴이 죽어나갔다. 녹용·녹혈의 판로도 문제였다.

질좋은 녹용을 생산하는게 판로의 최선이라 생각하고 온 산을 돌아 헤매며 신선한 풀만 뜯어와 먹였다. 품종개량도 시도했다. 대만산 꽃사슴을 사육하던 당시 꽃사슴의 10배나 되는 고가의 우수종 「레드디어」와 「엘크」 사슴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난 유전공학을 공부하여 「레드디어」 수사슴과 소형 꽃암사슴과의 잡종생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짝짓기와 출산의 실패는 자궁파열과 분만사고로 이어져 거의 목장 존폐의 위기에까지 왔다. 다행이 잡종은 3대째 오면서 녹용의 질이 순종에 버금갈 정도로 우수해졌다. 막대한 손실과 오랜 연구 끝에 거둔 성공이었다.

내 사슴목장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면서 전국에서 목장견학과 문의&서신&전화로 밤낮이 따로 없었다. 그때부터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양록사업은 농가 소득을 올리면서 도시인들도 농촌으로 부르는 계기가 됐다. 그때 붙여진 「사슴할머니」란 별명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그렇게 호황을 누리던 사슴 업계도 80년대 말 수입자유화로 큰 타격을 받았다. 뭔가 우리만의 것을 재배해야 한다. 강원도에 널린 산·들을 이용하면 어떨까. 포도주로 유명한 독일의 포도밭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산에도 자생하는 천연 과실들이 있는데…. 생각한 것이 무공해산 머루였다. 야생종도 채취하고 모종도 사서 재배해보며 산머루와 씨름한지도 7년째다. 딸기와 6년 사슴과 20년 승부한 것에 비하며 머루와의 7년은 긴 세월도 아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지만 온 산야에 산머루가 자라 한국 머루주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것이 지금의 나의 꿈이요, 마지막으로 내몸을 사르고 싶은 일이다.

강원도에 처음 들어가 온갖 고생하며 과수원을 시작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새집을 짓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생각하던 흙벽돌을 내손으로 짓기 시작했다.

과수원 작업 틈틈이 흙벽돌 5천여장을 구워가며 지어 그해 겨울 방과 부엌만 있는 초라하나마 집모양을 갖춘 내집이 생겨났다. 3년 후 마루도 놓고 분합도 달고 백석회로 벽을 발라 총공사비 25만원으로 그럴듯한 개량주택으로 완성했다. 마침 공무원 부인이 손수 지었다 하여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농촌계량주택이 농촌에 보급되는 계기가 됐다. 팔봉시절 늘 마음 아팠던 열악했던 농가 모습을 본 후부터 생각한 주택개량의 꿈이 이뤄진 셈이다.

손때 묻은 흙벽돌집에서 내 젊은 20년을 보내고 60세 되던 해 경춘가도 삼악산 언덕 지금의 집으로 옮겼다. 발아래 북한강에서는 아침 햇살에 물안개가 연봉을 타고 오르고 온종일 산바람·강바람 넘나들고 햇살도 넉넉하다. 정원엔 한뼘만한 묘목때부터 커 온 정원수들과 토종꽃과 야생화들이 숲을 이루고 겨울이면 마른가지에 피는 얼음꽃이 일품이다. 우리집은 대문이 없다. 누구나 잠시 들러 쉬어간다. 내가 없을 때도 들렀다가 쪽지 한 장 써놓고 가면 된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보물은 자연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낌없는 생명을 주는 자연은 신비 그 자체다.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면서도 홀로 가질 수 없는 무주공산을 이렇게 가까이 둘 수 있어 행복하다.

내 인생에 생명과 삶과 꿈을 엮어 준 이 고마운 자연에 감사하며 자연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던 내 선택에 감사하여 이제 남은 인생도 이와함께 하련다.
   
  [최종편집 : 1996/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