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6·25가 한창이던 50년 11월 아버지를 보지도 못한 유복자의 몸으로 나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세살 위 누나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중학교는 졸업했지만 극심한 한해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4km가 넘는 중학교를 다녀오면 여름엔 산과 들에서 품을 베어 퇴비를 만들며 혼자 일하시는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65년 중3때 집 뒤 야산에 구덩이를 파고 처음으로 수박을 심었다. 그러나 수확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나의 수박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년간 농사를 지으면 고등학교에 보내준다는 어머니 말씀에 나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밤엔 농업서적을 뒤졌다. 의심나는 사항이 있으면 농촌지도소로 달려갔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수박은 가뭄으로 시들어갔다. 거북이등처럼 갈라진 저수지 한가운데 샘을 파고 물을 길어 타들어가는 농작물에 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타들어가는 대지를 적실 수는 없었다.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하늘이 하는 일 어떻게 하겠느냐며 내년에 다시 잘 짓자고 하셨다. 나도 다시 용기를 내어 67년에 재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66년 경험을 살려 토마토의 배꼽썪음병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석회를 넣었다.

봄에는 대나무로 조그마한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토마토와 참외씨를 파종하고 미리 장만해 두었던 퇴비를 고랑에 듬뿍 넣어 수박을 직파했다. 그러나 67년까지도 가뭄이 계속될 줄이야 정식은 했지만 6월까지 불볕더위가 계속되면서 작물들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다했지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결국 신경과로로 입원을 했다. 갑자기 농촌이 싫어졌다.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너 없이는 못산다』며 극구 만류하셨다. 서울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라도 보고 오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설때 내려오신 작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작은 아버지는 점심은 막걸리로 때우며 행상을 하고 있었다. 나를 인쇄소에 데리고 갔는데 행인지 불행인지 방금 사람을 채용했다고 했다. 서울에서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보시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좋아하셨다.

68년 남의 야산 3천여평을 얻어서 수박을 재배하였다. 69년에는 수박출하를 며칠 앞두고 시들시들해지더니 결국 대부분이 고사했다. 허탈한 심정으로 농촌지도소로 달려갔다. 연작재배에 따른 만활병이라고 했다. 대책은 박이나 호박에 접목을 하면 된다고 했다. 책방에 들러 수박재배책을 사 읽고 또 읽었다. 70년 봄 대나무로 비닐하우스를 짓고 박씨앗을 싹틔워 흙을 채운 비닐포트에 심었다. 산접, 감나무 접목식, 활접의 세가지 방법으로 정성껏 2천5백개를 접목했지만 실패했다. 주위에서는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좌절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박씨를 심고 수박씨를 사다 2천5백개의 박에 활접하여 수분관리를 철저히 한 결과 거의 1백% 활착되었다. 그런데 덩굴은 온밭을 뒤덮었지만 수박이 열리지 않았다. 마침 출가한 누님과 매형이 찾아와 며칠에 걸쳐 순을 쳤더니 그때부터 수박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기뻐하셨고 농협과 지도소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왔다. 시장에 출하했더니 다른 수박은 상대가 되질 않았다. 돈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개선장군처럼 들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께 알려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의 기쁨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상 외의 큰 수확을 올려 밭7백평을 샀다. 또 개간지 3천여평을 빌려 또다시 성공하니 우리 수박밭은 선진지 견학장소가 되었다. 밤낮으로 다른 사람들의 하우스를 돌며 접목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하여 우리마을 일대는 벼농사에서 수박으로 작목전환이 이뤄졌다.

노지재배수박이 장마철에 출하되어 가격이 폭락되는 점에 착안, 대나무 활죽으로 소형터널을 만들어 재배하니 또한 남들이 출하하지 않는 6월중순 출하가 이뤄졌다. 그렇게 터널 수박재배가 시작되었다. 73년부터는 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7백평에 하우스를 짓고 2월초 봄배추를 정식하였다. 그런데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대나무를 반 쪼개어 지은 비닐하우스가 바람에 뼈아픈 상처만 남긴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75년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 25세때 어머니의 재촉으로 우리 마을에 외갓집이 있는 처와 결혼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6년3월에는 논 4백평을 팔고 대신 밭 2천5백평을 매입하여 그 해 수박농사로 당년에 토지 구입비를 다 뺐다. 우리집 수박은 목포원예공판장에서 언제나 최고 시세를 받았다. 78년에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고향집을 팔고 광주에 집을 지어 출퇴근 농사를 지었는데 만고병의 발생과 80년 사회불안 등으로 농사를 크게 망쳤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임시로 외딴집을 짓고 8천5백평의 밭에 가을무를 심었다. 81년에는 밭을 더 확보하고 개간지 6천평을 7백70만원에 추가 매입하였다. 82년에는 수박 재배면적이 1만평을 넘어섰다. 집이 외딴곳이어서 마을안에 집을 새로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땅구입이 어려웠다. 이듬해는 1만7천여평으로 늘렸다. 말이 1만7천평이지 하루가 멀다하고 농약을 쳐야 했으므로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가꾼 덕택으로 다른 농가의 두 배를 받고 상인에게 팔았다. 모든 빚을 청산하였다. 수박 수확이 끝난 뒤 가을에는 무를 심었는데 상인이 찾아와 무를 팔라고 했다. 좀더 길러야게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여서 1만7천평의 무를 2천3백50만원에 팔았다.

그해 쌀한가마 시세가 7만원 정도였으니 큰 돈이었다. 그해 12월 마을 어른께서 자기 집터를 사라고 해 너무 고마워 달라는 가격을 다주고 그 땅을 샀다. 84년 봄 퇴비농사가 원칙이라는 생각에 퇴비를 많이 구해 넣었다. 수박은 잘 되어 밭떼기로 4천5백만원에 팔렸고 꿈에 그리던 새집을 지을 수 있었다. 가을무도 싹이 난지 얼마 되지 않아 팔렸다.

85년에는 마을 이장일을 보았다. 2만평의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일을 본다는 것은 힘든 것이었다. 85년 농사가 끝난 뒤 이제까지 지어온 농사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인력에 화학비료·농약으로 지은 농산물이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을 생각한 끝에 밭 3천4백평에 철재 비닐 하우스를 짓기로 결심, 실면적 2천3백평의 비닐하우스를 짓고 1만2천평의 밭은 남에게 임대했다. 개간지 밭 3천평에 수박과 가을무, 2천평의 농에는 벼농사, 2천3백평의 비닐하우스에는 겨울철에는 총각무, 봄철에는 수박, 가을에는 호박을 재배하여 소득면에서는 2만 여평의 농사를 짓는 것보다 높았다.

90년에는 철재파이프를 뽑아내고 밭아래 있는 논 5백평을 사서 12m하우스 15채(2천5백평)를 지어 12월 총각무를 파종하였다. 봄에는 수박을 재배하고 다시 8월초에 수박을 파종 접목하여 하우스에 정식하여 10~11월에 수확, 서울로 출하하는 방식이었다.

92년에는 박용선조합장과 상의하여 농협수박작목반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도포농협 수박작목회가 구성되었고 초대회장이 되었다. 2월부터 7월까지 수박재배와 토양관리, 병해충 방제 등에 대하여 매월 1회씩 기술회보를 발간하였다. 저공해 수박을 생산하기 위해 그해 2월에는 전문가와 독농가를 초빙하여 유기농업에 대해 교육하였다. 그해 6월18일 우리작목회는 제1회 도포농협 수박작목회 품평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여 좋은 평가와 함께 회원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93년 11월 밭 2천5백평에 실면적 1천8백평의 12m 철재하우스 10채를 더 지어 역시 총각무와 연2기작 수박을 재배하였다.

94년 7월에는 5백여명의 면민이 참석한 가운데 제2회 수박품평회를 개최했고, KBS 6시 내고향 프로에도 방영되어 회원들은 감격스러운 시간을 가졌다. 그해 6월 1차 수박을 수확하고 남들은수박을 다뽑아 버렸으나 나는 수박을 다시 관리하여 2차 수박을 5t 트럭 약 11대분을 더 수확하여 무려 3천7백만원이라는 추가소득을 올렸다. 우수농가로 선정되어 일본연수도 다녀왔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그러나 수박만은 우리 수박에 크게 못미침을 보고 잘만 하면 일본시장까지도 석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95년 2월 군단위 원예연합회 결성과 지도사 공동운영체 도입을 추진하여 새로운 농촌지도사업을 개척하고 계신 영암군지부 김상봉지부장을 만났다. 지부장님은 『군내 모든 생산자 조직을 통합하여 연합회를 만들고 품목에 따라서는 협의회를 결성하는 한편 영암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상표를 통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평소부터 생각하고 있던터라 나는 적극 동의했다. 95년 5월 36개의 수박작목반이 모여 회원 9백40명의 영암군 수박협의회가 결성되고 초대회장이라는 큰 짐을 맡았다.

95년 첫사업으로 영암군 수박품평회를 영암실내체육관에서 성황리에 개최하여 영암월 출수박을 대내외에 자랑했다. 그해 우리 부주는 농협중앙회 「9월의 새농민」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더욱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로 환경을 보전하면서 저공해 우수농산물을 생산, 국민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생산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지난날의 가난을 생각하면서 더욱 봉사하는 자세로 수박을 사랑하며 흙과 더불어 고향을 더욱 살찌우리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최종편집 : 1996/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