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잔뼈가 굵고 언뜻언뜻 귀밑에 흰머리가 비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땀을 흘리고 의지를 키우며 살아온 충남 보령땅. 이곳은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고루 풍부하여 예부터 「만세 보령」으로 불려왔으며, 인심이 후하고 가뭄·홍수 등 천재지변이 거의없는 천혜의 땅으로 꼽혀 왔다.

포도농사 10년. 엊그제 시작한듯한데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지난 85년 봄, 보령땅에 포도나무를 심는다는 말에 이웃과 친구들이 어렵다며 만류하던 것을 뒤로 하고 「이 친구들아 두고봐, 멋지게 해낼테니. 천안 입장은 되는데 이곳은 왜 안돼」라며 오기속에 시작했던 일이 바로 엊그제 일만 같다. 그때까지 나는 노지딸기로 10여년 농사를 짓다가 점차 영농의 한계를 느끼고 대체작목을 찾던 중이었다. 딸기농사를 그만두게 된 데는 나름대로 쓰라린 연유가 있었다.

지난 72년 남포면 제석리 대야마을에서 <보교조생> 딸기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한포기당 5천원씩 하는 딸기모종 2만포기를 사기 위해 당시 6만~7만원 하는 황소를 팔아 치우자 이웃에선 호기심 반, 비웃음반이었다. 아예 대놓고 딸기가 무슨 돈이 되느냐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나는 딸기에만 열심히 매달렸다. 일손을 거들던 인정많은 동네 아주머니들도 행여 적자나 나지 않을까 주인인 나보다 더 걱정이었다. 3년 정도 지나 농사에 이력이 붙어 주위 사람들에게 슬쩍 딸기경락서를 보였더니 모두들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웃 농가들이 앞다투어 논딸기 농사에 뛰어 들었다.
농사라면 벼와 보리농사밖에 모르던 마을에서 70여가구나 딸기농사에 참여해 벼는 벼농사대로 짓고 모내기 전에 앞그루로 딸기농사를 해서 벼농사의 몇배 수입을 올리니 온동네가 그야말로 새로운 활력으로 넘쳐났다. 나를 부르는 동네사람들의 말도 「딸기박사」로 통했다.

그러나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딸기모종의 육묘부터 수확·선별까지 열심히 일해주던 사람들이 모두 자기네 농사에 매달리게 되면서 인근마을 사람들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매일 사람이 바뀌다보니 선별상태가 아주 불량했다. 세번만 같은 말을 반복하면 듣는 사람의 얼굴빛이 달라지니 혼자 속으로만 애를 태울 수밖에 없었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최상급 품질로 인정받던 우리집 딸기에 대해 「선별이 옛날 같지 않다」는 상인들의 충고가 뒤따랐던 것이다. 또한 딸기시세도 5월초에는 괜찮았으나 중순이 지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쳤다.

심사숙고한 끝에 수확시기를 앞당길 요량으로 하우스 시설 1천평을 지었다. 그러나 바람이 거센 곳이라 84, 85년 2년동안 연거푸 호된 태풍에 하우스를 다 날리고 나니 더이상 딸기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
때마침 누군가 천안 입장에서는 <거봉>포도 농사를 지어 고소득을 올린다고 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사실 확인을 위해 포도의 고장인 천안 입장을 찾아 안면이 있는 사람집에 들어가 보니 가지가 휘어지도록 탐스럽게 매달린 <거봉>포도를 담을 종이상자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15명의 인부가 해질녘까지 수확하는데 하루 8백여상자를 수확했다. 서울·대전 등지의 백화점에서 출하하기가 무섭게 날개돋친듯 팔린다는 것이다. 출하계산서를 보니 당시 도매시세가 <거봉> 한관에 5천5백원, <캠벌얼리>는 1천8백원선이었다. 다른 포도농장을 방문해보니 밭에는 이미 <거봉>을 모두 심었고 일부는 논을 메워 막 심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입장 농민들은 <거봉>을 재배해서 한평당 1만원이상 소득을 올린다고 하는데, 나는 여태껏 2천평에 노지딸기 농사를 지어 15명의 인원으로 하루 꼬박 작업을 해도 2관반 목상자로 80여상자 정도를 딴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대략 계산을 해보니 쌀 한가마가 5만원가량 할 당시에 포도농사는 잘만 하면 하루평균 4백여만원대에 이르는데 비해 딸기는 약 50만원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우선 5천평 정도의 땅을 구해 포도를 심자. 한평에 만원씩을 수입으로 잡고 5천평이면 5천만원. 일년 농가소득으로 5천만원을 올린다. 정말 꿈만 같았다.

딸기 대체작목을 포도로 굳힌 다음 나는 곧바로 묘목을 주문했다. 한그루당 8백원씩, 모두 1천5백그루를 구입했다. 딸기농사를 하던 논 1천4백평을 팔고, 외숙네 개간한 땅 6천평을 빌렸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과수재배 책자가 우리나라의 기후나 토양조건에 알맞은 재배서가 아니라 일본의 번역서라는 것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됐던 것이다.
포도나무를 심을 때도 먼저 토질의 형편을 살피지 않고 책에 의지해 심다보니 표토에 심어도 될 것을 포클레인까지 불러서 사과구덩이를 파고 심었다. 또 가설을 해도 괜찮다는 안내서에 따라 7월에 덕을 가설했으니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렇게 2년동안 수확 하나없이 포도밭에 모든 꿈과 정열을 불사르며, 낮에는 포도에 파묻혀 지냈고 밤에는 읍내 서점에서 구해온 포도 재배법 책자를 노균병과 흰가루병이 헛갈리면서도 달달 외웠다.
5천평의 넓은 면적을 단번에 시작하여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몸까지 좋지 않아 남자 인부까지 고용하면서 수입 한푼없이 투자만 3년을 하다보니 논 1천4백평을 판 돈이 흔적없이 사라졌다.
포도농사로 만 4년째 되던 해인 89년에는 두번의 태풍피해에도 다행히 <거봉>포도 5천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러나 87년을 고비로 <거봉>시세는 곤두박질쳐 한관당 3천원선에 거래돼 오히려 <캠벌얼리>만도 못했다.

이듬해인 90년에는 나무도 충실하고 꽃도 잘 나와서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했다. 하지만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의 6월19일이 들이닥쳤다. 이날부터 25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평생 그런 엄청난 비는 처음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해도 소용없는 일. 이 비로 보령시 일원 거봉포도원 3만평이 일거에 문을 닫고 말았다.
비가 그친 뒤 포도밭에 가보니 연약한 꽃대는 모두 다 썩었고 덩그러니 빈 나무만 서 있었다. 이 참담한 심정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 그보다도 수확도 없는 빈나무에 일년내내 농약만 계속 쳐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하기만 했다.

날이 개고 약치는 시기를 조금 늦췄더니 일주일 후엔 이미 연약한 가지와 잎에 노균병·흑두병·흰가루병 등이 침투해 있었다. 가까운 친구 한 명이 자기 포도원에 농약을 치고 우리 포도까지 사흘을 연거푸 치더니 농약중독이 돼서 말도 못했다. 이왕 망한 놈의 포도, 새로 심기로 작정하고 선진지 견학이나 열심히 다니자는 생각에 농장은 팽개쳐 두고 입장으로, 김천으로, 경산으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조금은 마음이 진정됐다. 마음을 고쳐잡고 91년 봄 최고의 수확을 거둘 포도나무를 눈물로 베어내고 그 자리에 <대봉> 2천그루를 심었다. 아내도 여기서 더이상 물러날 수는 없다는 굳은 결심아래 대천에서 17년간 운영하던 피아노 교습소를 그만두고 농장이 있는 이곳 주교면 신대리로 옮겨왔다.
시련은 이제 그치는가 했더니 넘어야할 산은 또 있었다. 제초제를 쳐도 쉽게 죽지 않는 잡초가 있어서 91년 5월 중순경 호르몬제가 섞인 제초제를 무심히 뿌린 것이 또다시 어려움을 몰고 왔던 것이다. 약을 뿌린지 1주일쯤 지나 포도잎이 약간 말리는 것이 보여 냉해인가 하고 무심히 생각했다. 그런데 20여일이 지나도록 펴지지 않고 새잎 끝이 곱슬머리처럼 오그라들었다. 정신이 퍼뜩 나서 여러 곳에 알아봤더니 큰일 났다는 것이 아닌가.
「나무들이 다 죽으면 어떻게 하지.」 수많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번을 스쳐 지나갔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천행으로 포도잎은 정상을 되찾았고 기도 덕분인지 한그루도 죽지 않았다.

그동안 품종도 다변화하여 <대봉> 2천그루, <거봉> 3백그루, <캠벌얼리> 7백그루, 기타 새로운 신품종이 다수 자라고 있다. 이중 3천그루는 성목 최성기로 80%는 거뜬히 수확할 수 있다 . 그래서 지난 94년에는 3천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큰 이변이 없다면 올해에는 갑절 이상은 기대할 수 있을것 같다.

처음 포도농사를 시작할 때엔 기고만장해서 큰소리치던 나도 이제는 많이 겸손해졌다. 포도에 관한 교육이라면 어디든 쫓아다녀 농협연수원의 포도재배 기술교육과정을 2회나 수료했으며, 농촌진흥청의 기술교육 등에도 부단히 쫒아다녔다. 이론 무장과 현장에서의 쓰라린 실패의 경험으로 이제 포도농사라면 조금은 눈이 트이는것 같다.

나의 포도농사가 안정된 궤도에 오르자 관심있는 이웃들이 다수 상담해 왔다. 그때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남을 따라 하는 농사를 짓지 말라고 권고한다.
지난날 이웃과 더불어 딸기농사를 짓듯 우리 마을이 포도주산단지로 손꼽히는, 그래서 온 마을에 포도밭에 묻힌 보물을 찾아 땅을 일구는 농민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날 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최종편집 : 1995/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