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가서 돼지 키우고 꽃 재배하고 버섯농사 지으면서 살자-.』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논에 심어진 벼를 파로 알았다는, 그야말로 「서울내기」의 표본인 남편의 『시골에 가서 살자』는 제안은 그냥 한번 해본 소리로 밖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신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하였기에 이제 다시 고향에 가서 산다는 것은 아는 모든 이들에게 실패자임을 인정하고 「오죽하면 시골로 살러 왔나」하는 눈초리를 견딜 각오가 없이는 결정하기 힘들었지요. 그러나 결국 주위의 만류와 염려 속에서도 이곳 나의 고향에 내려온지 10년. 그동안의 농촌생활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농촌이야말로 노력 여하에 따라 사람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임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85, 6개월된 딸아이를 안고 세식구가 이사올 때 남편이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빚을 갚고 나니 융자받은 돈 1백5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고향엔 친정할아버지·할머니가 계셔서 일단 이삿짐은 옮겨왔지만 앞으로 어찌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남편이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당장 다시 이사가자는 나에게 『딱 5년간 살아보자』는 약속을 하였지만 나의 투정을 무마하기 위한 지키기 힘든 약속이었지요. 그때 마침 마을에서 회관가게를 인수해 운영해 보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매일 많은 사람들과 부딪쳐야 하는게 거북하고 싫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믿음과 의지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무장을 하게 하였고 패배의식으로 살아가는 이곳 농촌에서 꼭 성공하고 싶은 욕망과 내 삶을 보람있게 살아보자는 각오를 했습니다.
시골에 정착한 첫해 남의 밭을 빌려 참깨를 뿌렸습니다. 처음으로 남편은 씨앗을 심어본 것이지요. 어느날 자못 흥분된 모습으로 그이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답니다.
『글쎄, 내가 심은 참깨가 파랗게 싹이 터올랐다구!』
어린아이처럼 상기되어 기뻐하던 그 모습을 영영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양돈·국화·표고·느타리재배 네가지 작목을 놓고 숙의한 결과 타지역보다 춥고 산이 많은 지형, 기후적 특성을 고려해 표고를 재배하기로 정했습니다.
86년, 접종 후 3년된 구 표고목 2만본을 처분하는데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간접적으로 익힌 상식만 갖고 2만본을 선뜻 인수하기엔 벅찼지만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기술도 빨리 향상시킬 수 있다며 남편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차도 못들어오는 벌채현장에 종균을 넣어 놓은 나무인지라 우리가 정한 재배장으로 옮겨오는 일부터 어려움은 시작됐습니다. 때마침 시작되는 농사일과 겹쳐 일손을 구하기도 힘들었고 땅이 녹아 질퍽거리는 산길은 산너머 산이었습니다. 밥도 제때 못먹고 애쓰는 남편은 꺼멓게 얼굴이 타고 수척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재배장의 나무를 깎고 풀을 베고 옮겨온 종균목을 정리하여 세우니 넓은 산이 온통 표고목들로 늘어섰습니다. 대견스런 마음이 심란하더군요. 앞으로의 일들을 고려해서 우리는 마을에서 처음으로 농촌형 트럭인 세레스를 구입했습니다. 우리집 큰 머슴이요, 마을에서 제일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아침이면 가게문을 닫고 버섯나무가 빼곡한 산으로 출근합니다. 고온성 종균을 넣은 나무인지로 물을 흠뻑 주고 나무를 누인 후 다시 물을 줘 뒤집어 세워주는 작업을 해줘야만 버섯이 나옵니다. 처음엔 가느다란 나무도 무거워 들지 못하고 숨만 헉헉거렸죠. 칭얼대는 딸아이를 향해 연신 「까꿍」소리치며 종일 종균목과 씨름하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제법 팔에 힘이 올라 굵은 나무도 거뜬히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되더군요.
두껍고 딱딱한 참나무껍질을 헤집고 올라온 버섯들. 그 신기하고 대견스러움. 그때 맛본 기쁨이 바로 사진에서 보는 노우의 중요한 미소의 원천이 아닐까요. 버섯을 따는 일은 손톱 밑이 터지고 노랗게 물집이 생겨도 기쁜 작업이었지요. 제일 잘 생긴 버섯을 따 남편에게 내보이며 『이 정도면 최고가 아닐까요?』하면 아니라고 합니다. 버섯을 출하하는 남편을 따라 서울 가락시장엘 갔습니다. 정말 우수한 품질의 버섯이 참으로 많더군요. 시장에서 만난 선도농가들로부터 들은 경험담은 그 어떤 교육보다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값진 대화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쉬워질 줄 알았던 버섯 재배가 하면 할수록 일도 많고 힘들었습니다.
87년, 벌채일을 맡아서 해줄 사람이 있어 험하고 힘든 조건의 산을 계약했는데 그 사람이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으니 남편은 다시 벌채를 주도하게 되었죠. 대규모사업도 아니라 장비를 대서 할 입장도 못되고 막상 시작하고 보니 버릴 수도 가져올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40분쯤 걸어올라가서 베어놓은 나무 2~3개를 묶어 차가 닿는 곳까지 끌고 내려오는 작업을 꽁꽁 언 도시락을 먹으며 해야 했지요. 끌어내려 쌓아놓은 나무들이 수북이 쌓이자 남편과 둘이서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1m20cm 길이로 백묵표시를 해놓으면 남편은 표시대로 자르고, 잘려진 나무를 끌고 빼내어 옮겨쌓는 일은 내몫이었습니다. 나만큼 큰 나무도 한참 일을 할땐 별 무리없이 들어다 쌓을 수 있는 힘이 생기더군요. 제법 많은 양의 나무를 확보하였고 재배장으로 옮기는 일이 남았습니다. 차에 가득 싣고 재배장에 부려 놓으면 굵은 나무와 가는나무를 선별하여 쌓는 일은 내가 했지요. 굵은 나무엔 손길이 많이 가는 저온성 종균을, 가는나무엔 고온성 종균을 접종하기 위한 작업이지요.
다음차가 오기 전에 내려놓은 나무를 쌓기 위해 필사적으로 옮겼고 무거워 들기 힘든 나무는 기차레일처럼 나무를 늘어놓고 굴려서 옮겨갔습니다.
3월의 신선한 바람이 있어도 온몸엔 땀이 흐르고 얼굴은 뜨겁게 화끈거렸습니다. 허리를 구부리는 것보단 펴기가 힘들고 밤이 되면 땀이 아닌 열이나며 온몸은 두들겨맞은 사람처럼 아팠습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입안은 소금이라도 한줌 먹은 것처럼 짠물이 나오더군요.
어둡기 전에 한차 더 실어와야겠다며 산으로 간 남편은 소식이 없고 부려놓은 나무는 모두 정리가 끝나도 차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골짜기에선 짐승소리가 들리고 주변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둠이 밀려오자 나는 지친 몸을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눕혔습니다. 놀람도록 아름다운 하늘이 거기 있었습니다. 눈부신 별바다, 구름에 걸쳐진 조각달, 어둠의 투명함-. 하늘은 온통 거대한 보석이었습니다. 눈물이나오더군요. 그 눈물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지요.
『요나엄마 뭐 할게 있어 시골에 와서 이 고생이유?』
『서울에 오면 입에 풀칠못할까봐 그 고생이냐.』
나를 측은히 여기는 이웃·친구·친지들. 그러나 몇년 후엔 다른 눈으로 나를 보게 될 겁니다. 이 아름다운 곳에 아늑한 한 가정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멀리 남편이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차가 수렁에 빠져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올 수 있었다더군요. 아름다운 세계를 체험한 나는 남편이 소중했고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찼습니다.
종균접종을 기계화하여 신속하게 하기 위해 선도농가를 방문, 정보를 얻고 차 엔진과 모터를 연결, 하루종일 구멍을 뚫어도 열 발생이 적은 드릴을 만들고 개량된 접종기를 구입, 비교적 순조롭게 1만본의 괄목을 접종했습니다. 그때 드릴을 잘못 사용하여 입은 상처가 손에 거머리처럼 흉터를 남겨 주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88년, 둘째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전업농을 하기 위해 가게를 정리하고 조그만 빈농가를 사서 이사를 갔습니다. 산속에선 좋은 품질을 생산할 수 없었기에 5천평의 평지밭을 구입해 표고재배장 조성에 힘을 쏟았지요. 서울근교 하우스단지가 철거되어 싼값에 매매된다는 소식을 듣고 2채의 하우스를 매입, 마을사람 몇명과 함께 뜯어 왔습니다. 농사가 끝난 초겨울 남편과 함께 땅에 묻혔던 녹슨 부분을 잘라내고 새 파이프를 잘라 끼우고 부분부분 녹슨 곳은 페이퍼로 닦은 후 녹방지용 페인트를 칠해주었습니다. 하우스 3채가 지어졌고 표고목을 옮겨넣는 작업으로 겨울나기는 보람되고 분주했습니다.
봄엔 종균넣기작업과 돋아나는 저온성 버섯따기, 여름이면 고온성 버섯작업, 버섯채취 등으로 초겨울까지 노력하는 만큼 소득을 주는 작업은 이어집니다. 온가족이 함께 출근하여 일하고 딸아이가 길어오는 샘물로 점심을 지어먹고 함께 노래도 부르는 풀내음 짙은 산속에서의 생활. 고생되고 힘들게 바라보면 한없는 괴로움일 수도 있지만 봄·여름·가을·겨울, 농촌은 풍요로운 삶을 만들 수도 있는 아주 낭만적인 곳이지요.
92년,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기술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남편의 뜻에 따라 표고작목반을 조직하였습니다. 작목반에서 필요한 나무는 많은 양이라 도유림 산 30ha를 계약, 대규모 벌채사업을 하였습니다. 집에서 차로 1시간 30분을 가야하는 현장, 새벽 동트기전 찬바람을 가르며 남편은 매일 출근했지요. 깊은 도로를 내고 하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제반 여건을 조성하는 작업의 어려움은 경험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것입니다. 10만본 이상의 표고목 확보, 잡목 4백트럭분의 벌채도 끝이 났고 작목반의 출발도 성공적이었습니다. 1만5천본을 접종하여 활착을 위해 나무를 쌓아 놓았다가 때가 되어 종균목을 바로 세울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침 군부대에서 일손돕기 지원을 나왔고 40명의 군인아저씨는 요술쟁이처럼 일을 모두 끝내 주었습니다. 하늘의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92년 자금을 지원받아 새집을 짓게 됐지요. 우리가 살 집이나 편리한 구조로 직접 설계를 해보라는 남편의 배려로 마음으로만 그려왔던, 꿈에서 그리던 집을 내손으로 설계하여 시공에 들어갔습니다. 자재를 사오고 인부를 구하고 간이숙소를 지어 밥을 해주면서 현장감독을 겸하는 일은 힘이 들어도 보람이 커서 즐거웠습니다. 문고리 하나까지도 내가 선택할 수 있게 배려해준 남편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해 정보보조를 받아 20평의 저온저장고도 갖추었고 14채의 버섯재배하우스도 지었습니다.
지난해엔 작목반에서 <표고버섯 무료시식회> 를 가졌습니다. 다양한 요리방법을 몰라 대중화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다 요리하던 것을 모아 소개하였지요. 작목반원과 부인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여 뷔페식으로 치른 순수한 우리솜씨의 시식회엔 약 4백명의 손님들이 참석해 기대이상의 칭찬과 좋은 반응을 얻었고 행사를 계기로 작목반원은 협동과 단결을 확인하는 한편 자긍심을 갖게 됐지요.
농촌은 낙오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며 농촌에 사는 것은 부끄러울 수 없음을 이제야 느끼게 되었군요. 처음 이곳에 왔을때 느껴야 했던 수치심, 패배의식, 따가운 시선들-.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무 세우기, 물주기작업, 버섯따기 등 전분야에서 전문가소리를 들을법한 세월이 흘렀고 남자손 못지않게 손마디가 굵어졌지만 이제 진심으로 농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루과이라운드(UR)에 대처하여 전천후 계획생산을 할 수 있는 톱밥재배사를 건립하는 일이 숙제입니다. 그리고 표고재배 후 나오는 많은 양의 폐원목을 분쇄, 유기톱밥을 만들어 관상수를 재배할 계획이며 표고가 공공장을 설립, 부가가치를 높일 계획입니다. 나의 숨은 바람이지만 표고버섯 전문식당을 운영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요.
아침 창을 열면 솔잎내음 짙은 맑은 공기가 쏴하고 밀려들고 언제고 벌컥 벌컥 마실 수 있는 맑은 물이 풍부한 이 축복된 땅에 나의 앞으로의 삶도 아름다운 자연의 한부분으로 포함시킬 것입니다. 나는 영농후계자가 되길 원하여 예비후계자로 등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아직은 농가부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려운 농촌의 현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그 노력과 자세로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사는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나는 나의 일을 즐겁게 하며 내게 주어진 환경을 사랑하며 내 인생을 즐겁게 살아갈 것입니다.
   
  [최종편집 : 199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