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현재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살아갈 이 지역은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호남의 명산 월출산(月出山)이 있어 「신령스런 바위」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전남 영암(靈岩)군에서도 다시 「아름다운 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미암(美岩)면의 선황리이다.
1950년, 나는 이곳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소농의 3남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64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일을 돕고 있는데 교육장상을 받고서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실을 가슴아파하시던 담임선생님께서 농촌지도소 사환자리를 알선해주셨다. 지도소에 다니면서 농업서적을 읽고 공부를 하며 차츰 새로운 농업에 눈을 뜨게 됐다.
75년 군복무를 마치고 76년말 결혼을 하면서 본격적인 영농을 시작했다. 결혼 후 본격적인 영농을 시작했다. 결혼 후 작목선택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 처음 시도한 것이 한우사육이었다. 축산은 준비하는데 시일이 걸려 80년 초에야 구색을 갖출 수 있었고 83년 농민후계자로 선정돼 한층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어 소파동이 덮쳐왔고, 시설채소와 화훼로 작목을 전환했으나 이 또한 경험을 쌓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89년은 나에게 매우 의미가 있는 한해였다. 어느새 우리 나이로 마흔에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협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달은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동안 오뚝이처럼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몇차례, 하늘도 더이상 내려다보기가 민망했던지 「농협」이라는 구원의 손길을 나에게 뻗쳐 준 것이다.
이 해에 나는 학산농협과 협의하여 이 지역의 후계자와 젊은 농민 10명을 모아 작목반을 조직하기로 하고 선진 작목반 견학과 작목 개발 그리고 하우스 설치방법 연구 등을 시작했다.
마침내 작목이 결정됐다. 풋고추를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학산농협의 도움으로 땅을 빌렸고, 자금을 지원받아 하우스를 설치했다. 2월 어느날 이 고장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도 힘든 늦추위가 강풍과 함께 찾아들어 이제 고추모종이 꽃을 피우던 하우스의 비닐이 절반 이상 찢어지는 등 피해가 났지만 농협의 지원으로 비닐을 교환하고 영양제를 뿌려 관리한 결과 고추에는 큰 이상이 없어 얼마후부터는 풋고추 생산이 시작되었다. 풋고추를 수확할 때의 기쁨도 컸지만 전량 서울로 출하돼 판매대금이 농협 통장에 입금됐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에게 89년은 나에게 슬픔을 안겨준 해이기도 했다. 농사에 성공하고 집안에도 신경을 쓸만 하니까 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쏟아지는 8월의 폭염 속에 아버님을 영원히 흙으로 모셔드리면서도 한가지 위안을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아들이 단 한번이나마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렸다는 것이었다.
학산에서의 풋고추 농사가 성공하자 90년 어느날 미암농협 상무(현재 삼호농협 최규용상무)가 미암에서 하우스 작목반을 결성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와 나는 흔쾌히 응했다. 내가 사는 곳이 생활권은 학산면이지만 행정구역은 미암면인 때문이었다.
이 무렵 미암면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미암면은 주민의 3분의1이 어업에 종사하는 어촌형 농촌으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한 「목포 세발낙지」가 사실은 이 지역 특산품인데 영산강 개발사업으로 바다를 막는 바람에 어업에 종사해 온 사람들이 삶의 토전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농민후계자와 어업에 종사하던 젊은이등 10명을 모아 「월출고추작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작목회 명칭은 이 지역의 명산인 국립공원 월출산에서 따온 것이다. 자금융자와 토지 임대, 자재구입 등을 미암농협이 철저히 지원해주니 걱정되는 일이라곤 농사가 잘 안되면 어떡하나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학산에서의 경험이 있어 내심 자신이 솟았다.
그런데 미암농협은 아직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나를 우수 농민후계자로 추천해 11월7일부터 2주간 대만 연수를 다녀오는 기회를 주었다. 너무나 엄청난 배려였다. 대만 연수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 주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후계자농장은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산물을 재배하고 봉지에 담아 슈퍼마켓에 직접 공급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기후가 달라 원예분야에서는 기대했던 것만큼 배우지 못했다.
12월 말부터 정식한 고추모종은 순조롭게 자라서 91년 2월말부터 출하가 시작됐다. 나는 풋고추 출하를 앞두고 회원들에게 생산도 중요하지만 철저한 품질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했다. 선별은 최대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하도록 교육하고 감독했다.
월출풋고추는 서울 가락동 시장으로 전량 공동출하됐다. 마음 조이며 결과를 기다리던 우리는 마침내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20kg 한상자당 다른 고추보다 1만원 이상을 더 받았다는 것이다. 4월에는 농협 주관으로 하우스단지 현장에서 농산물 출하대회를 가졌는데 군수님까지 오셔서 격려를 해주었다.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나는 4월 26일부터 10일간 개인적으로 일본 연수를 다녀오게 되었다. 당시 이바라키현 농업실천대학에는 동생이 2년 예정의 장기 농업연수를 하고 있던 터라 일이 쉽게 추진됐다. 그곳의 각종 농산물 시험장과 피망단지, 수경재배 및 고사리 재배농가, 시장 등을 두루 견학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일본의 앞선 기술을 하루속히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고추수확을 마치니 처음엔 망설이던 사람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자 하여 나는 농협과 협의해 회원 26명, 단지 면적 1만8천평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작목회가 커진 만큼 물량도 많아질 것이므로 농협창고를 이용해 공동선별과 포장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제는 월출작목회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 풋고추도 가락시장에서 경매가 이루어지기 포장방법도 10kg 규격상자로 바꿨는데 다른 풋고추보다 상자당 5천~7천원을 더 받았다. 게다가 서울청과주식회사에서는 우리의 품질을 인정해 우리 작목회를 우수출하주 제1호로 등록해주기까지 했다. 소비자가 신뢰하는 상품만을 고집해 온 생산자들의 승리인 것이다.
이해 5월 도지사님께서 초도순시때 우리 하우스단지에 오셔서 격려와 함께 의욕을 북돋아주시며 저온창고를 지을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농협창고가 비좁아 선별장으로 이용하기가 불편함을 아신 군수님도 50평의 조립식 농산물집하장을 건축하도록 자금을 지원해주셨다.
우리 작목회의 풋고추는 공동선별, 공동출하로 전량 농협을 통한 계통출하를 했는데 92년 출하액이 약5억원이었다. 당시 미암농협은 판매사업부문에서 10억원의 실적으로 전남 도내에서 2위를 했다. 그러니 우리 풋고추 단일작목이 미암농협 판매사업 실정의50%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농협과 농민이 호흡을 함께 할 때 지역발전과 농가소득증대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월출고추작목회는 다시 회원이 44명으로 대폭 늘었고, 고추재배 면적도 무려 3만평으로 확대됐다.
92년 11월에는 우리나라 농민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이달의 새농민」으로 선정돼 농협중앙회님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꿈같은 일이었다. 나는 그 상을 받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농촌을 굳건히 지킬 것이며 지역 주민의 소득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기둥이 될 것을 몇번이나 다짐하였다.
그해 12월 우리 부부는 새농민상 수상자들과 함께 일본연수를 다녀오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못가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뜻밖의 부부동반 해외연수를 떠나게 됐으니 모처럼 아내에게 진 빚을 갚은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했다.
연수를 하는 동안 우리는 일본에서는 유기농업이 매우 활발하며 학교 급식도 유기농업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이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농가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앞선 기술을 속히 들여와야하겠다고 생각했으며 그때부터 일본농가와 교류를 해오고 있다.
93년도 우리 작목회의 판매액은 9억8천만원이 되었다. 조합원이 1천명 정도이며 영농규모 또한 영세한 이 지역 형편으로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우수농산물,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농산물 생산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 유기농업이었다. 나는 작목회장을 다른 회원에게 물려주고 광주·전남지역 환경운동단체인 「광록회 」에 가입하는 한편 양질의 퇴비를 생산하기 위해 마을 회원들과 함께 톱밥과 왕겨·생계분과 발효제를 사들였다.
그런데 마침 영암군에서는 유기농산물을 생산하려는 농민들이 「신농회」라는 모임을 조직했는데 나도 부회장을 맡아 참여하게 됐다. 우리는 회장인 전남대 농대 박흥섭교수의 지도로 퇴비를 만들었다. 퇴비는 발효상태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 그래서 잘 혼합되도록 포클레인으로 여섯번이나 뒤집기를 해주었다.
퇴비를 만드는데 투자한 돈은 농가당 1백80만원 정도였는데 나중에 퇴비를 하우스로 운반하니 경운기로 무려 60대분의 퇴비가 만들어졌다.
올해초 이 퇴비를 고추 촉성재배할 땅에 넣었다. 황토흙에 검은 퇴비가 깔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그리고 곧 이랑을 만들고 지금까지해오던 비닐멀칭을 하지 않은채 곧바로 고추 모종을 정식했다. 또 고추모종과 모종 사이에는 쪽파를 심었다. 쪽파를 심은 것은 일본연수때 멜론과 고추를 재배하던 농민이 쪽파를 혼식하면 선층의 피해가 방지된다고 설명해준 것을 참고한 것이다. 나는 또 비닐멀칭 대신 볏짚을 절단해 하우스 전 면적에 깔아주었다. 말하자면 볏짚멀칭을 한 것이다. 볏짚을 절단해 하우스 전 면적에 깔아 주었다. 볏짚멀칭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 시도한 것인데 현재 고추가 한창 자라고 있으니 그 결과는 지켜볼 일이다.
볏짚멀칭은 비닐멀칭과 비교할 때 단기적으로 경제성이 떨어진다. 인건비가 무려 7배나 더 드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 방법이 토양을 살리고 작물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 병해충을 막아줌으로써 이익이 될 것이란게 나의 생각이다.
하우스 고추재배에 있어 잿빛곰팡이병이나 흰가루병·진딧물은 상당히 끈질긴 적이다. 볏짚으로 멀칭한 우리 하우스에서는 아직 잿빛곰팡이병과 흰가루병의 기미가 없어 살균제를 뿌리지 않고 있다. 볏짚이 수분을 조절해 습도 유지가 잘 되므로 병해가 없는듯하다. 다만 진딧물이 다소 발생하기에 번개탄을 이용한 훈증처리를 해주고 있다.
올해 우리 50여회원의 고추판매목표는 15억원이다. 모두가 고추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에 현재까지의 작황은 매우 순조롭다.
올해 우리의 목표 가운데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은 수출농업에 도전하는 것이다. 일부 회원들이 꽈리고추와 피망을 수출하기로 뜻을 모으고 무역회사와 교섭중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표적인 미작지대로 알려져 온 영암군을 풋고추·김장고추·수출고추의 대명사로 발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저공해 김장고추 재배를 위해 비가림 하우스단지로 4만여평이 조성되고 있어 올 가을부터는 영암에서 생산된 저공해 김장고추 재배를 위해 비가림 하우스단지로 4만여평이 조성되고 있어 올 가을부터는 영암에서 생산된 저공해 김장용 고추가 자신있게 전국으로 달려갈 것이다. 나는 지난 2월에 결성된 영암군 김장고추비가림작목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지금 우리 농촌은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농민들은 신명을 잃어버렸고, 농정은 불신을 받는다.
지난해 12월, 부족한 내가 전국농업 기술자대회에서 농업기술상 본상을 받게 됐던 것은 농민들에게 다시 신명을 불러 일으키라는 명령이요, 격려였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행히 우리 지역은 월출고추작목회의 성공으로 농민들이 자신감과 희망에 부풀어 왔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한목숨 다할 때까지 이 땅을 지킬 것이며 후손에게 오렴되지 않은 흙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월출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듯 희망도 함께 솟아오르는 이 지역 농업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최종편집 : 1994/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