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스물하나에 남편을 만났다. 시집와서 산지 벌써 7년, 그동안 아이가 둘이나 되면서도 왠지 아줌마소리에 낯설고 쑥쓰럽기만한 순박한 농촌아낙이 되었다.
나의 조부모님과 시어머님은 6·25를 겪은 피난민이다. 혈혈단신 어렵게 살아오신 탓에 한 마을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손녀딸과 군 제대를 앞둔 까까머리 아들을 천생연분의 백년가약을 맺어주셨다.
중·고등학교를 제주도에서 마쳤기에 어렸을 때 보았던 남편을 성인이 되어 결혼을 전제로한 부담되는 면회를 다녀왔다. 생면부지의 남남도 아니라 따스함과 믿음이 있어 좋았다. 제대를 한달 남겨놓고서 약혼식을 올렸고 곧 결혼식도 치렀다.
남편도 집안도 다 좋았지만 어린 나이의 결혼생활은 모아둔 돈도 없고 배워둔 살림솜씨도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이라해야 15가구밖에 되지 않아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시골구석이여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밥을 짓는건 시집살이하는 며느리라면 누구나 겪는 고초(?)일 것이다. 친정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밥상도 모자라는 잠 때문에 미루던 내가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날 때 나 스스로도 놀랐다.
농촌으로 시집오길 기피하는 요즘 세상에 그래도 나만큼은 시부모님과 함께 열심히 살리라 마음먹으면서도 반복되는 고된 일속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친정을 담 너머에 두고 꽁치 한마리라도 건네주는 이웃새댁을 보면 부러웠고 친정에 가고 싶었다.
88년 5월 한창 못자리준비를 할무렵 첫딸을 낳았다. 손자이길 무던히도 바라시던 시부모님께서는 서운함을 안겨 드렸지만 첫아이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애가 애를 낳았다』며 포대기를 사오신 친정어머니는 농촌으로 시집보내놓고서 내심 마음에 걸리셨던지 열심히 살라고 신신 당부하셨다. 당신이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한 탓에 장남에게는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실 때마다 장남은 장가도 못가보고 늙어죽겠다며 고집피웠던 일들이 송구스럽게 밀려왔다.
농사일로 바쁜 중에도 따뜻한 미역국을 끓여주시는 시어머님이 고마웠고 한편으로 죄송해서 누워있을 수 없었다. 심한 젖몸살로 온몸이 빨려드는 듯한 아픔속에 보채는 아이를 업고 빨래며 새참까지 준비해야 했다.
나의 이런 고충을 아시는지 모르는지 새참이 늦어 일꾼들 배 곯겠다며 들어오신 아버님께 난 항상 낮잠 실컷자고 나오다 들킨 며느리처럼 당황스럽게 죄스러웠다. 차라리 못하는 일이지만 들에 나가 일하고 싶었다. 집안일은 일로 쳐주지도 않는 농촌주부의 중노동이란 갑절이나 힘들었고, 동분서주하면서도 미안해하고 눈치보려니 마음도 무겁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들에만 나가면 해방된 듯 좋을것 같은 마음으로 농약치기를 하게 됐다. 모내기가 끝나고 하는 농약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벼가 자라 알갱이가 맺힐 때면 분무기호스가 보이지 않아 잡아당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끌려가지 않는 호스를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부르트는 아픔을 참으며 열심히 당겨야만 했다. 한번은 고성능분무기호스에서 농약이 새며 남편의 몸에 호스가 감긴 적이 있다. 남편은 넘어지면서 농약대를 휘두르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신고있던 까만고무신을 벗어 던지고 달려갔던 기억이 지금도 농약칠 때마다 생생하다.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경운기·고성능분무기까지 다루며 1인2역의 몫을 해내고 있지만 아무리 잉꼬부부라도 천장 도배할 때는 싸운다는 말이 있듯 농약칠 때 한두번 다투지 않은 부부는 없을 것이다. 벼 한포기라도 건지려는 악착같은 애착과 노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까.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황금들판을 이룰때 우리도 영농자금을 얻어 콤바인을 구입, 추수를 했다. 콧구멍·얼굴 할것 없이 여기저기 쌓인 먼지를 보며 서로 웃었다. 아이를 어머님께 맡겨두고 남편은 운전하고 나는 벼포대를 받아 경운기에 실었으며 아버님은 그것을 집으로 나르셨다. 들판에서의 힘든 하루였지만 땀을 흘린 보람이 탈곡통 가득 쌓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 건강하시던 친정아버지의 입원소식을 접했다. 쉰둘 한창 나이에 술도 못드시던 분이 간암이라니 믿을 수 없었고 3개월 시한부선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여든이 넘은 노모를 보살피며 병상에 누워있는 남편까지 간호하느라 많이 야위신 친정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코에 호스를 꽂은채 어서 시부모님께 가보라며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 첫아들을 잃고 어렵게 얻은 딸자식이 보고싶어 그렇게 찾았으면서도 금방 돌려보내야 하는 마음을 헤아리니 절로 눈물이 복받쳤다.
시댁에 돌아온지 몇시간만에 임종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이 시동생결혼이라 바로 갈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산에 묻던날 거칠고 험난한 삶 가운데서도 언제나 정직하고 묵묵히 일하시던 모습을 영원히 가슴에 새겼다. 남편과의 결혼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였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한편으론 혼자 노모를 모시며 고생하실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친정에 쌀도 보내주고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준 남편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계절이 몇번 바뀌고 도시사람들이 피서니 휴가니하며 내려올때도 우리는 개미처럼 일했다. 90년 모내기철에 둘째딸을 낳았다. 한달이 넘도록 아이를 보러 건너오시지 않는 시아버님이 야속했다. 딸이든 아들이든 모두 소중한 자식인데 종가의 맏며느리서 책임과 의무는 대단한 것임을 느껴야했다. 손아랫동서가 아들을 낳으니 내게 주어지는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디 갈데라도 있으면 떠나련만 「차라리 죽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혼자되신 친정어머니에게 더이상의 불효녀는 될 수 없었다. 죽을 용기를 갖고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며 어린딸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농촌생활을 할때 남편과 함께라면 억수장마 속에서도 쟁기를 부릴 줄 아는 농부의 아내가 될 것 같았다. 꽃밭과도 같은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면서 좋아했던 나는 힘든 농사에 눈을 뜨게 됐으며 시부모님과의 생활이 쉬운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어렵고 조심스럽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철없는 며느리를 가르치며 사시는 시부모님 심정은 더할테지만 남편이 워낙 효자이다보니 며느리 위치는 더욱 어려운 자리였다. 죽도록 일만 하려는 남편이 무능하게만 느껴졌다.
대학 나와 농촌에서 살려는 남편더러 도시로 가자면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나의 일기는 매일 슬픔으로 메워졌다. 혼자 울다 지친 내게 남편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충고를 했다. 『네가 비록 농촌에서 힘들게 산다고 하지만 도시사람도 세끼밥 안해먹고 빨래 안해입는건 아니잖니. 일하는 행복을 아직 몰라서 하는 소리지 이게 다 내 살림이라 생각하고 일에 애착을 느껴봐. 농사지을 내땅이 있고 우린 아직 젊으니 무엇이 걱정이냐. 난 대학나와서 농사짓지만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산다. 남이 두엄지고 장에 간다고 덩달아 나설 수는 없잖아.』 시아버님이 신경통으로 한쪽 어깨가 불편하게 되고 아이도 많이 컸고 해서 눈으로 보이는 농촌의 현실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터리를 친 논에 써레질을 해야하는데 갯벌논이라 기계로는 평평하게 고르기가 어려웠다. 결국 내가 운전을 하고 남편은 트랙터 뒤에다 묵직한 사다리를 매달아 논이 깊은 곳에는 살짝 들어올리고 흙이 뭉친 곳은 힘껏 눌러 고르기로 했다.
처음 다뤄보는 기계라 두렵고 서툴기만 했다. 나름대로 똑바로 가는데 남편은 뒤에서 똑바로 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겁이 나서 돌아가는 핸들을 부둥켜안다시피 꼭 껴안고 눈도 깜박이지 않은채 정신을 집중해도 역시 잘 안되었다. 답답했던지 남편은 『야, 똑바로 가, 똑바로. 눈은 얻다 두고 댕기냐, 매깨비같이 그러고 있지말고 똑바로 가란 말이야!』하고 소리쳤다. 전라도 특유의 투박한 어투에 매깨비가 뭔지도 모른채 그저 미안하고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참았다.
91년에는 마늘과 보리를 많이 심었다. 해마다 논뒷그루작물로 보리를 심었는데 그해는 특히 보리가 대풍년이었고, 일손이 없어 논과 밭에서 살다시피 해야 했다. 남들은 손으로 쑥쑥 뽑는 마늘도 갯벌땅에 심어 단단해서 일일이 삽으로 캐야 했다.
유난히 덥던 한낮의 짜증에 비라도 왔으면 했는데 밤새 폭우가 쏟아졌다. 보리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빗소리에 놀라 시아버님을 깨웠다. 아버님은 큰일났다며 하우스로 달려가셨고 남편과 나도 뒤따랐다. 누군가 바닥을 비닐로 감싸 덮어 놓았고 아버님이 물꼬를 군데군데 자르자 고였던 물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30마지기나 심었던 보리를 하우스속에 널어 말렸는데 여기저기에 살찐 보리들이 둥둥 떠있었다.
천행으로 보리를 전부 잃지는 않았지만 나는 물에 젖어 살이 찐 보리는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우스 밑바닥에 비닐을 사전에 대비했던 아버님을 보며 세상에 농사만큼 산경험을 토대로 하는 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과대학을 나온 남편도 아버님께 배워야 했다.
지금 힘들다고 쉬운길로 돌아가면 쌓이고 쌓여 결국엔 처음에 가려던 길보다 더 험한 길에 이르니 투정부리지 말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라 하셨던 아버님 말씀이 생각났다. 시간이 지난 후 그 말씀이 진리란걸 깨닫게 되니 아버님의 가슴이 유난히 넓게 보인다.
보리를 거둬낸 자리에 지금껏 해오던 농법을 달리해 어린모를 심었다. 못자리를 따로 만들지 않아 궂은 일은 덜했으나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려움도 많았다. 상토값이 한 포대당 3천5백원이나 되어 일반흙과 복합비료를 섞어 직접 상토를 만들어 썼다. 처음엔 구입해 온 상토와 다를바 없이 잘 자라던 어린모가 뿌리발육이 되지 않아 군데군데 하얀 곰팡이가 생겼다. 영양부족인가 싶어 영양제와 곰팡이 억제 농약도 써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38도가 넘는 하우스 속에서 더운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모를 살리려고 물을 주며 지켜봤지만 한가닥 희망도 저버린채 6백상자를 뒤엎어야 하는 시련을 맞았다. 어린모가 상자에서 떼어질 때마다 자식을 잃은 부모 심정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갖은 고생끝에 다시 모를 심었는데 제법 파릇파릇 자라던 모가 갯벌논에는 듣지 않는 제초제의 약해를 입어 빨갛게 타죽었다. 하나하나 다시 심으면서 흘린건 땅보다 눈물과 한숨이 더 많았다. 모가 부실하자 온갖 잡초들이 뽑고 또 뽑아도 무성하게 돋아났고 속상하신 아버님은 논에도 안나오셨다.
설상가상이라더니 밭에는 1천포기나 심었던 고추모가 이유없이 말라죽어버렸고 1천6백평에 심었던 마늘도 값이 폭락해 80만원에 팔았을땐 엉엉 울어버렸다. 아이 보랴, 들에 밥 해 나르랴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보람이나 희망이 없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시부모님을 도시로 보내드렸다. 힘든 농사, 눈으로 보지 않으면 한시름 놓으실 수 있을거라는 남편의 배려였다. 어렵고 조심스럽던 시부모님들이 떠나시자 잠시 편하기는 했지만 시부모님의 빈자리까지 채워야할 땐 시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마음은 나만이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안계시니 몸도 마음도 힘든 탓인지 남편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매일밤 식은땀을 흘리면서 얼굴근육이 당겨 입을 벌리지 못했다. 이비인후과에서 치과에 이르기까지 가볼만한 병원은 다 가보고 물리치료·레이저치료·쑥뜸까지 다 해봐도 진통이 일시적으로 멈출 뿐 약기운 떨어진 새벽이면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 동서의 출산으로 어머님마저 내려오실 수 없어 혼자 어찌할바를 모르는데 아버님께서 내려와주셨다. 벼는 수확기에 이르렀고 남편은 인천 기독교병원에서 3차신경통이란 진단아래 세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사람이 먼저인지 일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이 다루던 콤바인으로 다른 사람이 벼베기작업을 해주었는데 주인을 알아보는지 기계는 자꾸만 고장이 났다. 그럴때마다 난 오토바이를 타고가 부속을 사왔다. 도둑질만 빼고 뭐든 배워두라며 시아버님께서 가르쳐주신 오토바이가 한몫을 했다. 30kg이 넘는 벼포대를 받으면서 남편이 하루빨리 완쾌되어 운전석에 앉아있길 간절히 바라며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남편은 퇴원하고서 힘든 일은 할 수 없었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건강의 중요성을 가슴으로 느끼게 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서툴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운기며 콤바인·트랙터까지 다룰 줄 아는 억척스런 촌부가 되었다. 처음 9천평으로 시작한 적지 않은 논이 어느새 2만 여평에 이르렀다. 시집와서 심었던 밤나무며 감나무가 가을이면 풍성한 과실을 안겨준다. 이제 남편은 회복되어 작은 마을이지만 이장직과 화산농협대의원직을 맡아 바쁜 가운데도 좋은 일을 해나가고 있어 자랑스럽다.
도시 생활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마냥 그리던 것과 함께 그게 얼마나 덧없는 일이었나 생각해본다. 무릇 내가 이 작은 진리를 깨닫는데 내 생의 3분의1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 생을 다시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시기가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얼마만큼 최선을 다해 열심히 그 역경을 헤쳐나가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비가 많이 오면 논의 침수와 벼의 도복이 함께 하는 자연의 시련이 간척지 논을 떠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임을 나는 안다. 자신있게 농토를 지키려는 남편과 함께 먼훗날 농군의 아내로서 후회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련다. 그리고 소문난 효부가 되기보다는 시부모님의 마음을 편히 해드리는 보통며느리로 살고 싶다.
   
  [최종편집 : 1993/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