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5년 충남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333에서 가난한 농민의 3남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편이 워낙 어려웠던 탓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살고 계신 숙부의 소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연탄 배달부·자동차조수·식당배달원·정비공장공원 등으로 생활하며 야간 중학교를 다니던 69년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72년 형제들과 어머님을 모시고 시골의 얼마남지 않은 전답과 보잘것 없는 집을 팔아 외기가 있는 대덕군 진잠면(현재는 대전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 3형제는 정미소를 임대하여 주위 사람들의 협조속에 그런대로 생활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미소가 그런대로 유지되던 중에 방위소집 영장이 나와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생업에 종사할 때 정미소 임대기간이 만료되자 가족들은 서로 헤어져 자립하기로 했다. 77년 형님은 서울로 떠나고 동생과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남의 집 단칸방에서 생활을 하며 마을주민의 권유로 포도밭을 임대하여 포도농사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하는 살림과 생소한 포도농사였기에 우리 형제들이 어머님 회갑때 해드렸던 금반지 석돈까지 팔아 영농비에 보태는등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5백만원이라는 나에게는 정말로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새로운 집을 장만하고 이듬해의 임대료를 지불하며 영농비도 저축하는 등 조금 여유가 생기자, 나는 남들보다 조금만 더 일찍 포도를 수확할 경우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온재배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일본의 포도원예 서적을 구입하여 번역을 부탁해 여러차례 읽어보고 연탄·톱밥·폐타이어 등을 연료로 사용하여 전국에서 최초로 가온재배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순수익 8백만원이라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그후 2년동안 더욱 많은 소득을 올려 2천만원을 저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의 영농준비를 하던 중 주인으로부터 임대료를 세곱으로 올려달라는 말을 듣고 저축해 두었던 돈을 찾아서 평소에 마음먹었던 장사를 시작했다. 그 시기에는 슈퍼마켓 붐이 일던 때라 농사를 짓는 것보다 수입이 좋았고 81년 3월에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장사가 어느정도 기반이 닦여갈 무렵 어머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수술을 받은 결과 다행이 완쾌는 되었으나 많은 병원비를 지출하게 돼 사채를 이용하게 됐다. 장사로 남는 이익금은 사채이자를 충당하기 바빴고 드디어는 슈퍼마켓도 문을 닫고 집까지 팔아 사채를 정리해야만 했다.
우리 부부는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옛말이 있듯이 젊음을 재산으로 지난날 경험이 있던 시설포도 재배를 하기로 결심하고 남은 8백만원을 갖고 농사 지을 땅을 물색하던 중 85년 10월 현재 살고 있는 논산군 연무읍 마전리에 정착했다.
이곳은 지역여건이 논산훈련소와 인접하여 땅값이 싸고 황토흙이며 야산지역이라 일조시간이 길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가진 돈 8백만원으로 보아둔 4천3백평의 땅을 구입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여 외지사람인 나는 생소한 연무농협에 찾아가 상담한 결과 농협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대전에 남아계시던 노모와 효주·효선 두 딸을 데리고 내려와 단칸방에 세를 살면서 부부가 황무지를 일구기 시작하여 포도묘목을 소주밀식으로 심고 간작으로 고추도 심었다. 어렵게 장만한 땅이었기에 소중히 알고 우리 부부는 피곤도 모르고 밤을 낮삼아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 들리는 소리는 『젊은이, 생각 잘못한게 아냐? 무엇을 못해 황무지에 잠도 안자가며 그 극성을 떨고 있나. 이곳 젊은이들도 모두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형편인데 미친 짓 그만하고 도회지로 나가라』는 등의 격려의 소리가 아닌 감당하기 어려운 조소의 소리였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며 노력한 결과 그해 고추에서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가을에는 일년동안 자란 포도나무 위에 1천평의 비닐하우스를 농협구매로 연동으로 지을 수 있었다.
87년 봄에 세운 비닐하우스가 강한 바람에 날리기도 했으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첫 포도수확과 간작으로 심은 고추수확으로 2천만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여기에 힘입어 가을엔 농장에 20평짜리 내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자립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고 판단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작목반을 구성키로 결심하고 우리 집으로 마을 주민들을 초청해 조생종 포도인 <델라웨어> 를 연동식 하우스로 재배할 경우 일손이 적게 들고 시설재배이기 때문에 농약사용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며 극조생종이므로 다른 포도가 수확되기 전에 출하할 수 있어 유리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또 포도나무가 자랄 때까지 간작으로 고추 등 시설채도 재배가 가능하고 더욱이 이 포도는 전국 재배면적의 0.2%밖에 안돼 희소가치도 충분하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잎담배와 벼농사가 주소득원이었고 포도재배는 생소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부담이 가기 때문인지 주민들이 선뜻 응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농협과 상의해서 마을 주민들에게 농협 구매사업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뒤 결국 10명의 회원으로 「승지작목반」을 결성할 수 있었고 내가 작목반장을 맡게 되었다.
89년 봄에 포도나무 묘목을 심고 우리 집을 반원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하였다. 그해 가을까지 작목반원은 16명으로 늘었으며 3만평의 시설포도단지를 조성할 수 있었다.
같은해 충남농촌진흥원장님과 농협 도지회장님께서 격려차 우리 지역을 방문해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 고품질 생산이 요구되므로 선진국인 일본연수를 권유했다. 나는 지체없이 10일간의 일본연수를 떠나 포도밭의 토양관리·비닐피복시기·가온시온도 조절·수분관리·탄산가스발생기의 중요성 등을 배우고 그곳 농협을 방문하여 선별·포장·판매하는 과정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
일본연수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반원들에게 과학영농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고품질 생산에 필요한 농자재인 열풍기·자동환풍기·탄산가스발생기 ·변온기·잠적호스등을 농협으로부터 구입해 설치했다.
당시는 포도나무가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소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때이므로 간작인 오이농사에 주력하게 되었다. 나는 반원들과 함께 전국의 오이 주산지를 여러차례 견학하여 기술을 습득하고 농협과 농촌지도소를 통하여 기술교육을 받아 영농에 임한 경과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90년에 연무농협 관내 최우수 작목반으로 선정되는 보람도 맛보았다.
91년이 되지 반원들은 전년에 소량의 포도수확을 해본 결과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적극적으로 따라주었다. 더욱더 용기를 얻은 나는 지난해보다 포도밭 비닐피복을 20일 일찍하고 가온을 시작했다. 포도맹아에 휴면타파처리를 하고, 간작을 중단하고, 비닐멀칭으로 지온상승을 꾀하고, 자동환풍기를 사용하여 온도를 조절하는 등 철저한 관리로 당도를 5월7일 전국에서 첫번째로 출하하는 농민이 되었다.
한편 나는 관내 52개 영농회를 찾아다니며 진실로 땀흘리며 노력하는 30대 젊은층을 대상으로 재래식 시설을 현대식으로 바꾸고 기술정보를 교환해 농산물개방에 대비하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소득작목으로 지역농업을 발전시키자고 설득하여 결국 「연무농촌부흥회」란 작목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 그후 회장으로 선출되어 현재의 재래식 시설로는 농산물 수입개방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대식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현대식 시설을 갖춘 전국의 여러 선진지견학을 통하여 새로 지을 하우스를 설계하였다. 우선 14명의 회원이 농협공동구매로 자재를 구입하고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그 추운 겨울에도 몸을 녹여가며 서로 도와 열심히 일한 결과, 평당 6만~7만원이 소요되는 것을 4만원 정도에 해낼 수가 있었다.
한편 마을의 포도작목반원들은 최선을 다하여 농사를 지었으나 선별·포장·판매에서 문제점이 발생해 시장에서 제값을 다 못받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나는 다시 일본연수를 제의하였고 반원 전원이 5박6일의 일정으로 농업기술교류센터가 문을 열면서 첫번째 손님으로 일본 연수교육에 들어갔다.
반원들은 야마나시농협을 방문해 선별·포장·판매 등 농민이 땀흘려서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면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꼈고, 농협에서 영농에 필요한 농자재를 적극 지원하여 영농에 불편함을 최소화시키는 것을 배웠으며 동경 대전청과 공판장에서는 농협을 통해 출하된 농산물이 판매되는 과정을 보고 돌아왔다.
우리 작목반은 91년 결산 결과 4억원이라는 계통출하실적을 올려 관내 작목반 중 전년에 이어 두 번이나 최우수작목반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나는 농산물 출하의 불편을 덜기 위해 작목반 숙원사업인 농산물 집하장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사업계획서를 제출했고 마침내 도비와 군비 70%를 보조받아 91년 12월에 무사히 준공하였다. 그 결과 눈비가 와도 아무 불편없이 농산물을 출하할 수 있게 되었다.
92년 포도작목반원들은 연수교육을 통해 보고 배운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전년보다 20일 앞당겨 비닐을 피복하고 가온을 시작했다. 지온계를 사용하여 지온관리를 점검하고 변온기를 부착하여 시간대별 온도조저를 철저히 했으며 부족한 탄산가스를 보충하기 위해 시설채소에서만 사용했던 탄산가스발생기를 구입, 설치하여 예년에 비해 송이가 크고 당도도 높은 전국에서 첫 출하한 농민이 되었다.
출하한 포도는 전량 소포장을 하였는데 시장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으며 이곳을 방문하신 도지사님과 농촌진흥원장님으로부터 많은 격려의 말씀도 들었다. 그 후 7월3일에는 전국선도농어민으로 초청돼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는 영광도 누렸다.
이밖에 농협에 찾아가 겨울에 난방기에 사용되는 유류공급 과정에서 시중 주유소가 양을 정확히 지키지 않는 횡포를 막기 위해 농협에서 유류를 일괄 공급할 수 있게 주유소를 설치할 것과 유기농법 발효퇴비공장 건설, 농자재 백화점 설치 등을 요청했던 바 농협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해 주유소·농자재백화점은 92년 10월부터 운영되어 많은 혜택을 보고 있다. 또 92년 9월에는 농협중앙회의 「이달의 새농민」에 선정되는 보람도 있었다.
나는 철저한 관리로 영농에 임하며 해마다 3주의 포도나무를 실험용으로 다양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영농법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92년 봄 연무농촌부흥회 정기총회를 무사히 마치고 하우스시설은 현대식으로 설치했으나 입식작목이 마땅하지 않아 회원들에게 과수 신품종 입식과 생산에서 판매까지 영농기술을 직접 익힐 수 있도록 일본연수를 설득하였다. 그 결과 93년 3월3일부터 3박4일동안 연수를 할 수 있었고 나라현(縣) 시설포도단지와 관광농장 등을 순회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신품종 과수묘목을 심고 연수를 통해 배운 고품질 생산만 하면 우리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부흥회원 70명은 현재 농산물수입개방에 대비, 방어농업에서 수출농업으로 전환한다는 의지가 대단하다. 회원들이 갖고 있는 아쉬움이라면 진정으로 농촌을 지키며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지원되는 각종 농촌지원사업이 몇군데의 흐름을 통하지 말고 공신력있고 지역사정을 잘 아는 농협으로 일원화해 선정·선발하는 제도가 빨리 정착되어 목소리 높은 사람보다 묵묵히 살아가는 젊은이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나는 농협에서 추진중인 농산물직판장·쌀가공공장·발효퇴비공장·농기계수리센터 등의 사업을 하루빨리 준공할 수 있도록 얼마전 강력히 건의했다. 농협에서도 금년내 준공을 목표로 추진한다니 이런 모든 것이 갖춰지면 농민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어 고품질 생산으로 농산물 수입개방에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곳에 정착하여 내 가정을 지키며 내 마을, 내 지역이 잘살 수 있도록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때론 객지인이란 단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일도 많았지만 여기에 연연치 않고 내가 이끄는 농촌부흥회원들과 함께 지역별로 특성에 맞는 작목을 입식하고 전문연구소를 세워 더 살기좋은 농촌발전에 힘쓰겠다.
나는 이미 6회에 걸친 해외연수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배워 실천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선진지견학을 통한 좋은 품질의 농산물생산에 최선을 다하여 농산물 수입개방에 대처, 어려운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을 진정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사회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말없는 아내에게 항상 미안하고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하는 두 딸에게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나의 인생 포도와 함께 하면서 내일의 꿈을 위해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린 포도밭에서 내일을 설계하며 영농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겠다.
   
  [최종편집 : 1993/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