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1월 12일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으니 벌써 결혼한지도 6년이 넘었다. 내가 6년째 근무하던 면사무소에 온통 국화향기가 가득하던 85년 9월 어느날, 민원실로 양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젊은 청년이 들어섰다.
『실례지만 남홍숙씨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친정언니와 남편 셋째 형수의 소개로 남편과의 만남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평택에서 3천평의 밭에 수박1만포기를 재배한다고 했다. 수박이 한포기에 두덩이씩 달리면 5백만원씩만 받아도 1년에 1천만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그의 설득과, 평택에서 내가 살고 있는 경북예천까지 왕복 8시간의 거리를 멀다않고 오가는 정성이 고마워(?) 결혼을 하게 됐다. 나 자신이 농부의 딸이긴 하나 학교와 직장에만 다녔고 힘든 농사일을 해보지 않아 두려웠지만, 남편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며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 제2의 인생을 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박농사는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3월말경부터 1만개의 포트에 흙을 넣고 포트 하나하나마다 씨앗을 심어 6~7일 후에 싹이트면 아침 저녁으로 물을 줘야하며, 저녁에는 동해(凍害)를 입지 않도록 거적을 덮어줘야 했다. 떡잎이 4~5장 나오면 밭에다 정식을 해야하는데, 동네 아주머니 10명이 5일정도 심어야 했다.
난생 처음으로 밥광주리를 이고 다니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새참으로 국수를 삶는데 물을 적게 잡아서 국수가 떡이 되어 다시 삶기도 했다. 가끔 남편에게 힘들다고 투정이라도 부리면 시골에서 밥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핀잔도 받았지만, 속이 깊은 남편은 밥광주리도 날라다 주고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었다.
당시 우리는 소 7마리를 키우고 있었으므로 남편은 꼭두새벽부터 쇠풀을 베어다 먹이는등 비가 와도 쉴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 성실하여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귀신』이라고 부르는 남편은, 1등 농사꾼이 되어 10년 후에는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나도 농촌생활에 빨리 익숙해져서 남편을 도와 꼭 성공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남편이 들에 나갈 때마다 따라 나갔다. 비가 오면 수박순에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순을 걷어올려주고, 5일에 한번씩 곁순을 잘라 세력이 열매로 많이 가도록 해야했다. 열매가 어느정도 굵어졌을 때 장마가 오면 열매마다 짚을 깔아주고 물이 고인 비닐은 구멍을 뚫어 배수를 시켜야 하는등 수박농사는 잔손이 많이 갔다.
농촌생활이 비록 힘이 들고 도시주부들처럼 깨끗한 생활은 할 수 없으나 고딘 중에도 나날이 달라져가는 수박밭을 보면 보람을 느꼈고, 힘든 일도 척척 해내는 자신이 스스로 대견해질 때가 많았다. 수박농사에는 거름이 많이 필요하다며 남편은 비오는 날도 쉬지 않고 트랙터를 몰고 3km나 떨어진 돼지농장에서 돼지똥을 싣고 와 수박밭 공터에 쌓아 놓았다. 동네 아주머니들께서는 『새댁이 돼지똥냄새나는 신랑과 어떻게 살 수 있을까』수군대기도 했고, 길바닥에 돼지똥을 흘려 놓았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신혼생활 10개월쯤 됐을때 농사꾼의 애환과 즐거움을 KBS 라디오 <황인용·강부자> 코너에 투고해 그 글이 방송으로 나왔을 때는 고된 중에도 너무나 기뻤으며, 원고료로 받은 5천원으로 남편의 장화를 사주기도 했다.
아침 저녁으로 수박밭에 붙어 일한 결과 농사가 잘돼 수박이 채 익기도 전에 밭떼기 장사꾼이 연신 드나들며 7백만원까지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남편은 1천만원의 소득을 바라보고 지은 첫농사라며 팔지 않았다.
진짜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수박을 따서는 차운임을 아끼기 위해 수원에서 목장을 하시는 형님네 1t 트럭을 빌려와 싣고 평택·송탄·오산·수원을 돌며 상회에 판 뒤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가 보통이었다.
그러나 수박값은 예상했던 것보다 절반도 받지 못했다. 상회에서 제값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트럭에서 15만원도 못되는 값으로 수박을 따서 실어다 파느라 우리 부부는 지쳤으나 품삯과 씨앗값 등으로 투자한 4백만원의 절반도 아직 건지지 못했기에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수박을 3분의1밖에 수확하지 못한 상태에서 20여일동안 장마가 계속됐다. 장마에 견디지 못한 수박이 모두 갈라졌다. 아침에 수박밭에 나가면 밭은 벌겋게 핏빛을 띠고 줄기는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어느날 저녁, 장대같은 소나기가 온밭을 집어삼킬 듯이 퍼부어댔다. 수박밭 공터에 쌓아놓은 돼지거름이 떠내려가면 수박밭도 망가지고 아까운 거름이 유실될 것같아 우리 부부는 잠도 자지 않고 밤10시부터 손전등을 들고 나가 짚단으로 막았으나, 거름이 너무 많아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물은 미친듯이 이리저리 빗속을 뛰어다니며 비닐과 널판지를 찾아서 갖다대고 짚단을 날라서 막는둥 떠내려가는 거름을 막다보니 벌서 날이 밝았다. 몸은 온통 거름범벅이 되어 있었고, 돼지 똥냄새에 절어 있었다. 남편과 나는 너무 서러워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평소 강인하다고만 느껴졌던 남편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농촌에 시집와서 애쓰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해 수박농사에서 얻은 소득은 3백만원밖에 안돼 품삯과 씨앗값도 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패는 삶의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포기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생각 저생각 끝에 남편은 총각때 해보았던 목장일을 다시 해보겠다며 우사를 짓기로 했다.
86년 10월, 벽돌을 사서 트랙터로 싣고 와 직접 미장일을 하는 등 근 한달 동안에 걸친 작업끝에 60평의 우사를 지었다. 남편이 직접할 수 있는 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혼자 했는데도 후계자자금 6백60만원이 다 들어갔다. 그러나 마당에서 눈비를 맞으며 지내다 가끔씩 달아나 수박밭을 망가뜨리던 소 7마리가 이젠 제집에 들어가 안정된 생활을 하다 다리를 편히 뻗고 잘 수가 있었다. 소들이 제집에 들어간지 이틀만에 나는 예쁜 딸을 낳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그해부터 소값파동이 시작돼 2백만원이 넘던 소값이 1백만원 이하로 떨어졌다. 게다가 큰소 한마리가 고창증으로 죽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사료값을 댈 수가 없어 소를 반값도 안되는 값으로 처분해 버리고 나니, 그토록 힘들여 지은 우사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이듬해에는 호박과 수박농사를 반반씩 짓기로 했다. 호박은 마디마디 열리는 채소여서 수량이 너무나 많았다. 20개들이 상자에 넣으면 1백50여상자가 훨씬 넘었는데, 비오는 날에도 매일 수확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값이 좋지 않아 20개들이 한상자에 5백원이 고작이었다. 시세가 나쁠 때는 인근시장에서 아예 받아주지도 않아 운임을 들여 서울 가락동 도매시장에 가지고 가면 2백만원밖에 쳐주지 않았다. 이를 본 서울 형님네랑 언니들이 이웃집에 팔아 주기도 했으나, 수량이 워낙 많아 반의반도 채 팔지 못하고 그대로 썩혀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대로 밭에 버려진 호박을 보면 나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수박도 농사는 잘 지었으나 중간상인의 농간으로 시원한 값이 나오지 않아 겨우 씨앗값만 건졌다. 수박을 끝내고 시금치를 해보았으나 시금치 또한 물량이 넘칠때 출하를 한탓으로 씨앗값도 건지지 못한채 헛수고만 하였다.
지금에 와서 실패원인을 분석해 보면, 채소농사는 남이 안할때 수확하도록 해야만 제값을 받을 수 있는데 물량이 넘칠 때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니 팔리지 않아 밭에서 그대로 썩힐 수밖에 없었던 것같다.
87년 11월 첫애의 돌을 맞아 우리집에 오셨던 시어머님께서 『남에게 맡겼던 배과수원을 가꿔보라』고 하신 말씀에 우리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됐다.
우리는 과수원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호박농사와 함께 해보기로 하고, 서점을 뒤져 책을 사고 농촌지도소를 통해 참고서적을 얻어와 밤을 지새우며 읽었다. 이웃에 배과수원을 경작하고 계신 분을 찾아 물어보는 등 배나무의 생리를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웃집 아저씨께서는 『비록 배나무 수는 3백주라고 하나 모두 40년생인 고목이며, 6년동안 줄곧 남의 손으로만 경작해 수확이 시원치 않을 것』이라고 일러 주셨다. 그동안 거름을 한번도 주지 않고 화학비료만 줘 나무세력이 좋지 않았다.
남편은 시간이 날때마다 돼지똥을 실어와 구덩이를 파고 한나무에 두손수레씩 푹푹 집어 넣었다.
이듬해 4월15일이 되자 배꽃이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만발해 달빛 쏟아지는 밤의 배과수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5월에는 열매를 솎아주고 6월초부터는 배봉지를 씌워야 하는데, 봉지 씌우는 아주머니들이 없어서 밤에 3km나 떨어진 다른 동네에 가서 이집 저집 다니며 일손을 구해와야 했다.
곡식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면서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한밤중에도 눈만 뜨면 과수원을 한바퀴씩 돌아본다. 그리하여 지금은 배나무마다의 특성을 훤히 알고 있다.
남편이 배농사에 전략을 쏟자 이웃집 아저씨께서 배재배업자 모임인 「이화회(梨花會)」에 가입시켜 주셨다. 회원 25명으로 구성된 이화회는 김헌웅초대회장님의 결단력있는 리더십과 회원들의 단결력이 뛰어나 나날이 발전하였다. 임원들은 바쁜 농사일에도 회원들의 과수원을 번갈아 찾아다니며 지도를 해 주었다.
특히 배에 관해서는 『백과사전』이라고 별명이 붙은 김회장님께서 남편의 성실함에 감동,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20km나 떨어진 우리 과수원을 방문해 기술지도를 해 주셨다. 남편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단숨에 달려가 배워오곤 했다. 그리고 우수하다는 농장을 찾아다며 선진기술을 습득했다. 배나무밭에 자란 풀은 제초제를 살포하지 않고 20일 간격으로 1년에 5회씩 낫으로 잘라 버렸다.
과수원 일은 수박농사에 비해 여자에겐 힘든 작업이었으나 묵묵히 일했다. 열심히 농사지은 결과 배는 굵고 맛도 좋았다.
드디어 배를 처음 수확하던 날, 이화회 김회장님께서는 배광주리 10와 의자 5개를 손수 사오셔서 하루종일 일을 같이 하시며 배포장 방법과 배수확하는 방법에 관해 소상히 가르쳐 주셨다. 그날 일은 너무나 고마워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배시세도 좋고 농사도 잘되어 그해 배에서 나온 총수입이 1천5백원이나 됐으며, 호박농사에서도 2백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배과수원을 경영한지 올해로 꼭 4년이 된다. 그사이 배나무 묘목 1천그루를 수박농사 짓던 곳에 심어 올해부터는 적은 양이나마 수확을 할 수 있게 됐다. 남편이 『어린 배나무는 우리들의 꿈나무』라면서 배가지마다 햇볕이 골고루 들도록 줄로 가지를 묶어놓아 보는 이마다 마치 관상수같이 예쁘게 자랐다고 칭찬한다.
가을에 배를 수확한 뒤에는 곧바로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줘 나무의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며, 전정도 남편의 뜻대로 나무를 만들기 위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하고 있다. 남편을 보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화회에서는 매년 11월에 선의의 경쟁을 휘해 자체 품평회를 하는데, 우리가 배농사 10년 이상의 회원을 물리치고 해마다 2,3등을 한다. 남편은 매년 1등만 하는 김회장님을 이겨 보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과수원을 경작해본 결과 농사를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포장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남편과 내가 직접 배포장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2등품으로 포장한다. 그대신 배값은 다른 농장의 배보다 한상자에 1만원 정도 더 받고 있다. 지난해는 <신고> 2천상자를 생산해 6천6백만원의 소득을 올려 남편 이름이 「농민신문」에 올랐다. 남편은 10년 안에 우수독농가가 되어 매스컴을 타보겠다던 꿈이 실현되었다며 너무나 좋아했다.
이화회에서는 90년 7월에 5박6일 일정으로 일본농촌현장을 견학했으며, 91년 7월에는 전남 나주원예시험장과 호남의 선진 배과수농장을 견학하는 등 과학영농에 힘쓰고 있다. 남편 또한 다같이 잘살아야 한다며 우리마을 과수재배 농가들에게 과수농법에 관해 지도, 우리가 과수원을 경영한 후부터는 이웃집 농사까지도 덩달아 풍년이다. 모두들 남편의 말을 잘 따라주니 어느덧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있는 듯하다.
반면 과수원경작 4년동안 쓰라린 경험은 얼마나 많았던가.
89년에는 숙기에 접어든 <신고> 에 황분충이 발생해 다른 과실에 더이상 번지지 못하도록 3백그루의 나무마다 병든 과실을 따내고 이미 떨어진 과실을 주우니 90여상자나 되었다. 그것을 과수원 모퉁이에 땅을 파고 묻을 때의 느낌이란…. 또 90년에는 반도 채 수확하지 못한 상태에서 태풍이 몰아닥쳐 시련을 겪었다.
숱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나면과 나는 각자의 소중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남편은 1등농사꾼이 되는 것이고, 나는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촌부로서의 몫을 다해가며 1남2녀를 훌륭히 키우는 것이다.
앞으로 3년후 우리들의 꿈나무가 다 자라게 되면 연간 순수익 1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땅은 결코 주인을 속이지 않는데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도시로, 도시로 향한다.
우리 농촌이 보다 더 잘사는 날이 빨리 와서 도시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농촌으로 되돌아왔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날은 꼭 오리라고 믿는다.
제2의 고향인 평택에 살게된지 올해로 7년째인 나는, 성실한 남편과 함께 마을 어른들의 신임을 받으며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에 큰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내일도 땅을 일구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 이슬방울과 풀내음을 벗하며 우리 농촌을 묵묵히 지켜나날 것이다. 흙과의 쉼없는 대화를 나누며….
  [최종편집 : 199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