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2년 경남 삼천포시 송포동 <당시는 사천군 남양면 송포리> 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때 우리집은 논밭 몇백평이 전재산이었다.
위로 누님 한분과 아래로 동생 넷을 둔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67년부터 부모님께서 해오시던 농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본체력이 약한 나에게는 낙타허리처럼 굽은 골짜기 논밭을 소를 몰아 경작한다는 것이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스무살이 채 되기도 전에 나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하여 내 또래들이 도회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부러워 두어차례 서울등지로 무단가출을 해보기도 하였으나 한달도 못돼 귀향하고 말았다.
스물서넛되던 70년대중반부터 자의에 의한 영농이 시작되었다.
77년 봄 결혼한 나는 장남으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벼·보리농사 수입으로는 생활의 안정을 기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기에 이르렀다.
나는 포도농사가 소득이 높다는 말만 듣고 재배기술도 없으면서 78년 거봉계통인 피오네품종을 한그루에 2백원씩 구입해 심었다. 79년과 80년 두해동안 포도가 탐스럽게 열렸다.
알이 굵고 맛이 좋아 정말 좋은 품종을 선택했구나 하고 만족해했는데, 그것은 잠깐이었다.
81년에는 유과기인 6월 중하순경부터 심한 흰가루병과 열과(裂果)현상이 발생하여 잘 자라던 포도알에 경화현상이 나타났고 송이째 흡사 석류가 터지듯이 하얀 씨를 드러낸채 포도알이 터져버리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피오네를 재배하는 농가가 없어서 캠벌얼리를 재배하는 농가에 물어보기도 했으나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포도재배경력 4년째인 내 지식만으로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이듬해인 82년에는 심한 화진현상이 발생하여 또 한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다. 거봉계 포도의 단점이 화진현상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서너해 동안 포도송이는 잘 영글어주었고 유목이라는 점에서 질소질 비료도 시비하는등 일반 품종과 다를바 없는 관리를 했기 때문인지 5월 중하순경까지 잘 자란 화방이 6월초 개화직후부터 화방 날개의 가지가 아닌 화수 전체가 모두 말라들어가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나 싶어 가슴이 요동을 쳤다. 뒤에 알고보니 이것이 곧 거봉계 포도의 단점인 화진현상이었다. 그해 여름 그나마 화진이 덜난 송이를 골라 두송이씩 묶어서 한송이로 만들어 시장에 출하하는 촌극을 빚어야 했다. 그렇게 알이 굵은 포도를 처음 본 소비자들은 이게 무엇이냐며 한알씩 맛만 볼뿐 팔리지도 않아서 나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82년 포도농사에서 농약값과 비료값도 못건진 나는 그해 12월 영농진단을 해 보았다. 곰곰 생각해보니 고급종이라는데만 마음이 끌려 모두를 재배가 어려워 꺼리는 피오네 품종을 선택한게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포도나무를 심은지 5년동안 실패만 거듭한 나는 주위사람들의 권유로 품종갱신을 위해 지난해에 마련해둔 캠벌얼리 묘목을 83년 봄 피오네발에 보식을 했다. 83년 한해만 더 승부를 걸어보고 영 가능성이 없으면 그때에는 베어낸다는 각오가 서 있었다.
83년 봄 피오네 나무가 잘 자라 어우러진 포도나무사이로 캠벌얼리 식재를 마친 나는 4월부터 7월까지 「포도 1백20일 작전」이란 현수막을 포도밭 어귀에다 써 붙이려고 했으나 올해도 실패하면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낼 자신도 없어 마음속에 현수막을 걸고 포도재배에 사력(死力)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인근 군(郡)에서 같은 포도품종을 재배하는 농가를 알게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왕복 1백km가 넘는 길을 3년동안 매년 여름 견학삼아 다니기도 했다.
험한 산비탈에 성목이 다된 그분의 농장에는 밤알만한 포도알이 새까맣게 잘 익어가고 있었다.
나는 하얀 봉지안에서 검은색을 발하며 밀가루 화장을 한 것같이 뽀얀 과분에 싸여 있는 포도를 넋나간 사람처럼 이송이 저송이 들여다보다가 일순간 한가닥 희망이 솟구쳐오름을 느꼈다.
나도 해보자. 새로운 기술을 배워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이렇게 되겠지. 나라고 못할리 있나…. 나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83년의 농사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자연환경이 좋았던지 아니면 온 정성을 쏟아 마지막 승부를 건 때문인지 83년에는 흰가루병도 열과도 화진현상도 없이 포도송이가 잘 영글어 8월 하순 포도알에 붉은 색이 돌무렵 이번에는 포도의 에이즈격인 만부병이 번진 것이었다.
그해 12월 포도나무를 베어낼 작정으로 톱을 들고 포도밭엘 나갔지만 6년을 전심전력해 키운 나무들을 본 순간 베어낼 마음이 삽시간에 없어져 버리는게 아닌가.
그런 내면에는 과잉생산이 우려되는 캠벌얼리보다 거봉계 포도가 전망이 훨씬 밝다는 말을 포도재배농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2~3년 더 속으며 기다려보자. 운이 좋은 피오네는 또 생명을 2~3년 더 연장하게 되었고 내 마음은 벌써 다 큰 피오네나무 밑에서 막대기처럼 꽂혀 있는 캠벌얼리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84년엔 또 하나의 포도밭이 생기게 되었다.
그해 나는 아이들 둘 둔 부모마냥 큰 피오네와 작은 캠벌얼리의 관리에 여념이 없었다.
봄바람이 한결 따뜻해지면서 새 묘목에서 자라는 새순이 빨간 닭벼슬처럼 탐스러웠지만 피오네가 금년에는 또 어떤 재주를 부릴지 나는 봄부터 주눅이 들어 있었다. 이때쯤이 남양지역의 포도재배 절정기였던지 포도 작목반이 4개나 조직되면서 생산된 포도는 제주도로 잘 팔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포도작목반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오랫동안 포도농사를 지은 분들의 경험담을 듣고 1년에 한번씩 경북·경남·충북일원의 포도주산지를 견학하면서 포도에 대한 견문을 넓혀나가길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84년 포도가 채 맺히기도 전에 엉뚱한 곳에서 또다른 변고가 생기고 말았다. 5월쯤 잘 자라던 새가지들이 여기저기서 시들기 시작했다. 왜 이런가 하여 손을 대면 부러져 가만히 살펴보니 시드는 가지마다 호랑하늘소 애벌레가 우글거리는 것이 아닌가. 무슨 놈의 벌레가 가지 속에 들어온 흔적도 없이 가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여기저기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이 가까웠던 탓에 나의 포도밭에 유독 빨리 찾아온 모양이었다. 시드는 가지를 모조리 꺾어 버려도 이튿날 다시 밭에 나가면 또 어제만큼 포도가지가 시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떤 대책을 세울수가 없었다.
6월이 되어 벌레가 들지 않은 가지에서는 포도가 열리기는 했으나 단위 결과현상이 심하게 발생하여 한송이에 포도알이 큰것 작은것 들쭉날쭉으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나는 또 85년 포도농사에 도전했다. 도전이 아니라 심어져 있으니 베어내지도 못하고 또 한해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주워들은 이야기와 농협에서 실시하는 포도교육 참석등으로 나의 포도재배기술은 조금씩 나아져 85년에는 전년도에 노균병이 잎에 들어 조기낙엽된 탓에 포도가 적게 열린 것을 제외하고는 열과현상도 만부병도 그리고 흰가루병도 화진현상도 노균병도 단위결실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가지 속에서 월동하는 호랑하늘소 방제법을 알아내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려야 했다.
해마다 여름이면 인근 피오네재배 농장을 들러보지만 내가 가꾼 포도가 점점 더 좋아짐을 발견하고 어느덧 포도농사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나 86년부터 과실의 성숙기에 나타나는 잿빛곰팡이병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라 91년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가 되고 말았다. 나의 끈기와 잿빛곰팡이병과의 싸움은 올해로 7년째가 된다.
85~86년엔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포도농사에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진주시장에 출하한 포도중에서 내 포도가 가장 돋보이게 되었고 가장 높은 값이 팔렸다.
그러던중 남해안지역 농민이라면 잊을 수 없은 87년 7월 15일의 태풍 셀마호와 그해 8월 31일의 다이너호는 나의 포도농사를 깡그리 짓뭉개 버리고 말았다.
포도작목반 총무로 일하던 7월 15일 아침. 나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경북 일원의 포도주산지와 경남 통영 일원의 양다래·유자, 경남 사천의 시설포도재배지를 견학하기 위해 반원들과 길을 나섰다.
경북지역의 견학을 마치고 경남 통영을 향해 달리는 차창밖으로 셀마호의 영향으로 간간이 쏟아지는 소나기와 시커먼 구름들도 날씨가 심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통영에서 비를 피해가며 양다래와 유자견학을 마쳤으나 사천에 도착했을때는 장대비를 넘어 동이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저녁무렵 삼천포에 도착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강풍과 빗속을 헤매며 2km 떨어진 집에 도착해 맨먼저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플래시를 비춰보니 다행히 아직 포도송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포도밭쪽으로 몰려올때마다 무수한 잎새와 덩굴을 파도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이 밤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차안에서 마신 술로 취기가 올라 현기증에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나 혼자서 포도나무 모두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집으로 와서 태풍이 부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이틑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태풍과 포도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창문을 얼어보니 바람은 멈추었고 날씨도 이내 맑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마당에 흩날려 있는 가재도구와 슬레이트조각으로 태풍피해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포도밭으로 가보려고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보나마다 뻔할텐데….
용기를 내어 가본 포도밭 풍경은 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부러져 나간 시멘트기둥, 끊어진 철사줄, 잎과 포도송이는 찢겨 땅에 나뒹굴고 포도나무는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의 심정을 어찌 글로써 나타낼 수 있겠는가.
아내와 나는 아무말없이 끊어진 철사를 다시 잇고 기둥을 바로 세우고 송이가 남아 있는 포도는 다시 봉지를 씌웠다. 남은 포도라도 수확하겠다고 애써 관리를 하는데 47일만에 태풍 다이너호가 또 기습하고 말았다. 다이너호는 그나마 남은 포도마저 깡그리 빼앗아가 버려 거의 실농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87년도에 농민후계자로 선정돼 나의 영농에 또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해마다 한번씩은 태풍을 겪으면서도 나는 포도농사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이왕 포도농사를 지으려면 7월 하순 델라웨어 수확을 시작으로 8월 중하순 캠벌얼리, 9월 중하순 피오네 수확까지 수확기간을 2개월정도 연장할 계획으로 87년도에 델라웨어 품종을 심었다.
86년까지 농협에 출하하여 제주·진주로 팔려나가던 포도는 86년부터 농장현지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하여 88년부터 생산된 포도 전량이 여름피서객을 상대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새로운 포도원이 속속 개원되었고 88~89년에 도로가 포장되면서 더위를 피해 맑은 공기를 찾아오는 도시민의 인파로 해서 농장직판이 성황을 이뤘다. 이 무렵 선물용 소포장상자를 개발하여 소비자의 기호에 부응하면서 소득을 늘려나갔다.
87년이후 태풍이 줄어들고 차츰 성목이 되어가는 포도나무에서는 수확도 늘어났으며 80년대 중후반 내림세이던 포도시세도 90년대 들어 회복되어 포도농사와 더불어 15년 외길을 걸어온 나의 소망이 차츰 결실을 맺는것 같다. 91년에는 포도작목반장과 농민후계자회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아내의 소망이던 현대식 주택을 지어 지난해 5월 오두막 신세를 면하고 이사를 했다.
그러나 아직도 포도농사에서 풀어야 할 숙제는 너무나 많다. 매년 7~8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으로 인한 불안정성, 포도수확기의 강우로 인한 열과와 병해로 인한 수확량의 감소는 매년 겪어야 하는 홍역이 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농촌지도소의 도움으로 일부는 비가림재배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92년에는 델라웨어품종에 시설하우스를 설치하였고 피오네공장의 비가림시설을 현대식으로 바꿨다. 조생종인 델라웨어는 7월 이전에 생산을 완료함으로써 출하를 앞당겨 높은 가격을 보장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태풍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피오네품종은 잿빛곰팡이병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돼 오늘도 시설하우스와 비가림시설의 포도재배에 전심전력을 쏟으며 포도농사가 순조롭게 잘 이뤄져 다시 고소득작목으로 보장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농민들 모두의 노력으로 농가소득이 도시민소득을 앞질러 우리 주위에도 아기울음소리가 들리고 우리마을에도 언젠가부터 끊겨버린 취학아동이 다시 생기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나는 오늘도 포도나무와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최종편집 : 199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