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7남매중 차남이다.
그이와 내가 만나 것은 85년 5월 아주 앳된 모습으로 회사에 입사해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사내연애를 한 덕분에 늘 조심해야 하는 것에 갈증을 느끼며, 짧은 만남 뒤에 오는 허전함과 그리운 마음들을 우리는 노래로 달래곤 한다.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치 그것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같은 착각을 하고 했었다.
그런 열정적인 그리움으로 발 동동 구르던 시절들을 뒤로 하고 그는 사표를 제출했고, 농사를 짓기 위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쟁을 뚫고 입사한지 겨우 1년이 지나 사표를 제출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장가가기 위한 계획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결심을 했노라며 오히려 나를 설득시켰다.
시골에 가서 연로하신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단다.
난 너무 뜻밖의 일이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며칠 전에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시다고 연락이 온 것을 기억해냈다.
큰형님은 서울에 사시고 부모님만 시골에 남아 농사를 짓고 계시다는 얘기를 간혹하곤 했었지만 이런 결단을 내리라곤 짐작조차 못했었다.
사실 난 시골에 가서 생활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거절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가 혼자 시골로 떠난 후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그의 따뜻한 사랑의 온기가 필요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는 그를 택해 정착한 곳은 먼 이국의 땅과도 같은 강원도 철원. 모두가 낯설고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만 지면 더 요란하게 들려오는 대남방송이 무서움을 더했고, 칠흑같은 어둠은 시골생활에 대한 심한 회의감마저 안겨주었다.
고운 손마디는 밉살스럽게 변해갔고, 하얀 피부는 까맣다 못해 윤이 나도록 타버렸다.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려 영영 가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첫해 여름, 시댁의 논과 밭은 대부분이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침식사를 새벽에 마치고 경운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들어가야만 했다.
식구들이 고추를 따러 가는데 나도 한 몫을 하고 싶어 따라나섰다.
처음엔 남편과 슬슬 장난도 쳐가며 고추를 땄다. 하지만 아침의 신선한 바람이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자 어김없이 나타나는 지겨운 더위가 또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허리, 팔, 다리가 쑤시고 한숨은 저절로 나오고….
『어허! 아가야 그렇게 약해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단다. 앞으로 반나절이나 해야 하는데, 힘들면 그늘에 가서 쉬거라.』
내 모습이 보기 딱했던지 시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구나』하고 쉬려고 했지만, 난 이내 『나 자신에게 도전해 봐야지』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추밭이 왜 그리 넓디 넓은지 따고 또 따도 산 넘어 산, 강 건너 강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열심히 했다.
나도 오기가 생겨 열심히 땄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손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손에 묻어난 땀방울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자신감과 보람이 넘침을 느끼고 있었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나태한 생활을 했던 나에겐 땀방울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인 것인지 몰랐다.
시부모님과 남편은 언제나 더위와 싸우며 일하고 계신다.
『아버님 이제는 집에서 좀 쉬세요』하고 말씀드렸더니 『그게 무슨 소리냐. 사람은 본디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밥 맛도 좋고 기운도 좋아지는 거란다. 이게 나의 건강 비결이지. 그리고 농사꾼은 농작물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단다』하고 대답하신다.
아버님의 이 정감어린 말씀에 나는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저녁식사는 정말 꿀맛이었다. 보리밥에 고추장·고추·상추쌈은 그 어떤 호화로운 만찬보다도 더욱 훌륭한 식사임을 새삼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제서야 땀방울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누가 선물하듯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알뜰하게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어머님을 따라 마늘밭을 손질하고, 감자를 캐고, 야채를 가꾸고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얼굴은 검게 그을어 갔고 손은 마디마디 물집이 생기더니 이내 군살로 자리잡았다.
길이 너무 험해 덜컹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남편과 농약을 치러 전방에 갈 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난 남편을 졸라 경운기에 부착된 고압식 분무기의 기계작동법을 배워 기계조작과 농약 호스를 잡아주는 일을 아버님과 같이 하며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삼복더위에 방제복을 입고 마스크를 하고 논에 들어가 온 논을 누비며 농약 호스를 끌고 나가 농약을 살포하는 남편은 얼마나 힘이 들까』그리고 예전엔 수동식으로 농약을 치셨다는데 수십 통의 물을 길어다 농약을 치셨을 아버님을 생각하니 힘든 줄을 모르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벼 한포기라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농약 호스에 닿아 쓰러진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며 『풍년이 들게 해 주세요』라고 누군가에게 빌었다.
모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수고했어』하는 남편의 말 한마디로 모든 피로를 씻을 수 있었고, 시원한 산들바람을 받으며 오는 기분은 정말 상쾌했다.
나는 화목하고 편안한 가정을 만드는데 나의 정성을 쏟기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다. 시부모님 모시는 일 또한 조심스럽게 실천해 나가지만 간혹 서운해 하시는 기색이라도 보일 때면 무척이나 죄송스러워 혼자 눈물을 보인 적도 많았다.
삶이란, 변하고 변하는 가운데 자기의 진실된 노력으로 주어진 환경을 개척하여 자기가 바라는 생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행히도 벼농사를 비롯해 밭작물들이 모두 풍년이 들어 여름에 힘들었던 만큼 기쁨 또한 컸다.
경운기로 벼를 운반하기에 너무 힘이 들어 트랙터를 구입해야만 했다.
그리고 벼를 말리는 일 또한 생각보다 힘이 들었지만 열심히 일을 해서 수매한 결과 2백50여 가마가 모두 1등을 받았고, 쌀은 2백여 가마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애써 지은 농산물은 왜 그리도 자주 가격이 곤두박질치는지.
뿌린만큼 거두리라는 말은 맞지만 수익금으로서는 이어지지 않는 까닭에 맥이 빠지곤 했다.
나는 이에 주저하지 않고 영농교육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남편과 함께 교육을 받는 극성을 떨었다.
탁아서 보모교육을 농민교육원에서 3박4일 받고, 동해수련원에서 부부동반 통·반장 연수교육을 2박3일 받고 돌아와 우린 마을 일에 앞장 서기로 계획을 세워 나갔다.
우리 마을은 철원군 동송읍에서 1km 떨진 곳으로 1백80여 가구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남편은 88년 1월 오덕1리 4H회를 결성하는데 앞장을 섰다.
첫 4H회 결성 모임에서 회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토의한 결과 마을에 문고를 설치,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의 의욕과 노력만으로는 문고를 설치할 수 없었다.
동네 어른들은 4H회원들의 취지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고 비웃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4H회가 있었지만 1년도 못가 흐지부지됐다』는 것이다.
회원들은 이에 주저하지 않고 자금마련에 나서기로 했다. 농협에 부탁하여 농협 상품의 상하차 작업을 우리 회원들이 맡기로 하고 9명의 회원이 3개월 동안 이마을 저마을 다니다 보니 비료·농약·소금·창고정리·육묘상자 등 농협의 상품은 안 다루어 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소금을 하차 할 때는 땀과 소금이 온몸에 배어 짠 냄새가 나도록 야간작업을 하고 밤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나도 4H회에 가입하여 남편과 회원들의 남편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여성회원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적극 권하는 것이었다.
난 좀더 부지런해야 했다. 식사준비, 빨래, 집안청소를 마치고 4H에 필요한 서류는 정리해서 타자 치고 각종 현수막과 공고문은 직접 붓글씨로 써서 게시판에 붙여야 했다.
우리 회원들의 모습은 결국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마을회관 2층을 문고방으로 쓰기로 허락을 받아냈고 그동안 마련한 자금으로 4백권의 도서와 지역유지분들이 후원해 주신 도서 1백50권을 비치할 수 있었으며 책상과 책꽂이, 기타 집기들은 4H회의 뜻에 적극 호응하신 마을주민들이 준비해 주셨다. 이렇게 하여 회원들은 농촌지도소 소장님과 이장님, 지역기관장님을 모시고 <샛별마을문고>현판식을 갖게 되었다.
마을문고의 확대 발전과 주민들의 의식과 교양 향상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운 4H회원들은 초·중·고교생에게 4H회원들의 활동목적과 의지를 홍보하기 위해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야유회겸 백일장을 실시하고 있다. 또 문고는 활발하게 운영이 되어 교양문서·전문서적만을 대출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주민들의 독후감 모집을 하고 시상도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공부방을 마련해 주기 위해 문고를 넓혀 전과목 참고서와 사전 등을 비치했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지켜볼 때면 힘과 용기가 솟아났다.
한편 4H회원들은 정월대보름날 복조리와 바가지를 판매하여 그 이익금으로 60세 이상 노인 60여분을 모시고 조그마한 선물과 부녀회원들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대접해 하루를 즐겁게 해드리고, 어버이날에는 홀로 계신 노인분들게 꽃을 달아드리는 등 조그마한 일부터 찾아나갔다.
나는 남편을 따라 농촌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적응하여 나갔다. 농번기 탁아소를 운영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이장님의 제의를 받고 시부모님과 상의해 허락을 받았다.
이장님은 마을회관방을 내주시고 부녀회에선 벽지를, 4H회에서는 방을 도배해주었고 난 폐품을 이용해 예쁘게 꾸며놓으니 훌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노인정에서는 한달동안의 간식비를, 농협에서는 녹음기와 장난감을 보내주셨다.
덕분에 15명의 유아들과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농번기 탁아소를 무사히 운영하게 되었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농번기에 유아들과 자유놀이인 집중력, 질서의식, 양보심, 정리정도, 언어능력을 중점적으로 실시하는 동안 말을 잘 하지 못하던 우남이가 제법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더니 노래도 잘 따라 부르게 됐다. 말이 없고 언제나 울기부터 하던 은경이도 친구들과 잘 어울려 노는 모습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엔 유아들중 몇 명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많은 신경을 써야만 했다.
유아들이 잠자는 시간에는 간식 준비와 유아들의 옷을 세탁해야만 돌아갈 때 입힐 수 있는 어려움도 뒤따랐다.
놀이터에서 놀고 나서 안으로 들어올 때는 꼭 손을 씻고 들어오도록 지도했더니 얼마가지 않아 유아들은 스스로 손을 씻고, 대소변도 혼자 볼 수 있게 되었다.
편식을 하는 아이, 음식을 흘리며 손으로 마구 집어먹는 아이, 의사표시를 울음으로 하는 아이, 고자질 잘하는 아이등 처음엔 각양각색의 성격을 갖고 있던 아이들이 제법 의젓해져갔다.
또 유아들을 들로 데리고 나가, 모내기 하는 모습과 쌀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들려주고 질문을 하면 농촌아이들답게 대답도 잘했다.
자연공부를 하고, 논둑에 둘러앉아 간식을 먹고, 노래 부르며 게임을 하기도 하고, 시냇가에 나가 소꿉놀이를 실시하는 동안 유아들은 더욱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폐품을 이용해서 놀이지도를 하고 유아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해 놓으니 유아들도 좋아하고 잠재능력을 찾을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은 동네 어른들께 인사 잘하는 유아들로 통하고 있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농번기 탁아소를 끝내고 나니 다시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져 농협 주부대학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되는 기쁨을 안았다. 학교를 졸업한지 7년만에 다시 맞은 학창(?)생활, 그리고 농협에서의 교육은 나에게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신혼생활의 병아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내가, 주부대학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동시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13주간의 교육은 그동안 타성에 젖었던 나를 적극적이고 자부심을 가진 주부로 변모시켰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확신에 찬 하루하루의 일과를 보낼 수 있었다.
한편 남자회원들은 마을 부녀자들의 숙원이던 오덕교 밑의 빨래터를 시멘트와 자재 등을 지원받아 주민들과 회원들이 힘을 합쳐 설치했고 예전에는 오덕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던 우물을 보수해 정기적으로 청소를 하고 있다. 또 4H 회원들은 힘을 합해 마을회관 주변에 마을 표지판과 게시판을 설치했다.
마을의 단결을 위한 체육대회 <화합의 한마당 잔치>가 벌써 두 돌을 맞이했다. 어설프게 시작한 나의 농촌생활은 4H 활동으로 굉장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앞으로 남편을 도와 특수작물을 재배해 보고 싶고, 농촌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앞장 서서 일할 것이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의 이정표에 멋을 더한 순간임을 굳게 믿으며 노력을 숭상하기보다는 한탕주의가 유행하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려고 이상만 높이 잡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보인다. 그들은 어려운, 더러운 가치있는 삶의 보람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타인을 나무라는 나 자신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 속에 포함되면서도 말이다.
강한 신념과 노력만이 현재와 미래의 나를 존재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흙물 밴 손을 물에 담그며 또 다른 내 모습이 비쳐지길 기대하게 될 것이다.
  [최종편집 : 1990/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