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1년 9월 25일 충남 공주군 이인면 달산리 「아래달밭」이라는 두메산골에서 6남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국민학교 4학년을 끝으로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남의집 머슴살이를 가야만 했다.
그것도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장리쌀로 꾸어다 먹은 쌀 한가마가 1년후 한가마 반으로 불어 그 빚을 갚기 위해 1년을 살아줘야만 했던 것이다.
흐느끼시는 어머님과 정든집을 뒤로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던 그날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선다.
쌀 열다섯말에 1년을 머슴 살고난 이듬해에는 살 세가마에 1년을 더 보냈다. 어린 나이에 2년동안 남의 집살이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형도 국민학교졸업과 동시에 나와 함께 남의집살이를 했다.
2년후 정든 집 부모님 품안에 다시 돌아왔건만 1년 뒤에는 학교에 보내 주시겠다던 부모님의 말씀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우리집 형편은, 아침저녁 꽁보리밥 또는 밀기울수제비·쑥범벅 등으로 끼니를 이었고 점심은 굶기가 일쑤였다. 겨울에는 고구마 몇 개와 동치미 등으로 살아갔다.
그토록 어려운 환경속에 처해있어도 배움을 그대로 끝낼수는 없었다.
나는 고된 하루하루 일에 시달리면서도 밤이면 야간학교(재건학교)를 찾았다.
야간학교에 입학하던 65년봄 선배들이 이끄는 4H에 가입하여 고구마 다수확과제를 이수, 그해 가을 군내 1등 이라는 영광을 안은 것은 7년여의 4H 활동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농촌에 정착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참외·수박·오이·토마토·가지 등을 재배하여 리어카에 가득 싣고 어머니와 함께 몇십리길을 걸어 이곳저곳 5일장을 누비며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봄·가을이면 언제나 사방공사장을 찾아 일을 다녔다.
어떤 때는 10여km나 되는 먼 거리여서 새벽에 집을 나서면 캄캄한 밤에나 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일을 한 대가로 밀가루를 받아다 아침·저녁 끼니를 잇고 있던 보릿고개때에 밤사이 도둑이 들어 반포대 남은 밀가루마저 가져갔을 때는 정말 만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4H 활동을 하면서 장관상을 받은 클로버 메달(금5돈쭝)을 팔아서 동생의 중학교 입학금으로 사용한 일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공장에 취직이나 하라고 하시던 부모님의 말씀을 뿌리치고 몇십리 떨어진 중학교에 가서 몰래 입학시험을 본 동생이 수석을 차지했으니 부모님 마음인들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나는 내가 못배웠으니 동생들만큼은 배워한다고 생각하고 그 고귀한 클로버메달을 팔아서 입학금을 대줬던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던 68년12월 어느날 나는 결단을 내렸다. 4H 활동도 좋고 어려운 가정에 힘이 되어주는 것도 좋지만 공부를 더 해야만 한다는 결심에 부모님께서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통보를 받고 외가에 가신 틈을 이용하여 편지 한통만을 남겨둔채 보름동안 땔나무를 해서 팔아 모은 돈 1천5백원을 가지고 서울행 급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이었다. 서울에 첫발을 내딛고 이리갈까 저리갈까 망설이다가 10원짜리 시내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 영등포역이었다. 농촌생활에 검게탄 나의 모습은 사기꾼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기엔 안성맞춤이었던지 검은 손길이 찾아왔다.
그들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해주었더니 고향친구 만났다며 반갑게 악수까지 청하며 일자리가 있는데 보증금이 필요하다면서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1천2백20원이 총재산이라고 보여주었더니 『곤란한데 … 그러면 첫봉급타면 갚어』라고 하면서 봉투에 넣어서 다시 주면서 공장에 가서 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수출품을 싣고 갈테니 버스 종점에 가서 기다리라면서 좌석버스값 15원을 안내양에게 건네 주었다.
취직을 하는가보다 싶은 반가움에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오류동 종점에서 해가 지도록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가 하도 고파서 포장마차에서 30원짜리 라면 한그릇을 사먹고 라면값을 내려고보니 봉투속에는 돈크기만한 백지 몇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오갈데 없는 나는 춥고 배가 고파 문전걸식을 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진짜 거지가 된 나는 꽁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던 고향과 부모형제 생각이 간절히 났다. 후회해본들 돌아갈 차비조차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류동에서 영등포역까지 걸어 며칠을 역전에서 지내며 사기꾼들을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죽고싶은 심정뿐이었으므로 한강변에와서 죽어버릴까 하고 눈물만 흘리다 돌아서기를 수없이 했다.
우여곡절끝에 중부시장에서 쌀과 계란을 파는 상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배달을 나갔다가 모 교육원 원장이라는 그집 주인의 제의에 따라 교육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교육원 식당에서 식기 닦는 일을 시작으로 사환을 거쳐 1개월후부터는 필경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못다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다보니 피로한 몸을 이기지못해 코피를 쏟은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2년간의 노력끝에 70년 9월에는 고졸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배움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편지한통 전하지 못했던 불효자식이 고졸자격증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던 날은 부모님과 형제들은 물론 동네사람들까지도 모두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그동안 배움으로 인해 중단했던 4H활동과 가정을 돕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4H면 연합회장과 지소연합회장직을 맡아 꽃길조성?꽃동산가꾸기?마을안길청소?퇴비증산 등 많은 일들을 공동작업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결과 72년에는 모범4H로 선정되어 도지사 표창을 받게 되었다.
7년여의 4H활동을 하면서 각종 과제이수로 받은 상장과 표창장은 23개나 된다.
새마을운동 사업이 한창일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73년 12월 군에 입대했다. 형이 입대한지 1년 뒤였고 수개월뒤 동생도 입대하게 되었으니 세형제가 군복을 입게된 것이다.
1년만에 휴가를 얻어서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가정은 파산돼 있었다.
부모님은 빚에 쪼들리다못해 어디론가 고향을 떠나셨고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은 담임선생님 집에 있었고, 국민학교를 갓졸업한 동생은 형수께서 친정집으로 데리고 가서 살고 있었다. 또 막내동생은 국민학교 3학년을 다니다만채 외가에서 살고 있었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여동생은 「작은오빠 정처없이 떠납니다」라는 편지 한통만 남긴채 고향을 떠났다.
만나는 동생들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흐느낄 때, 더구나 「엄마한테 데려다 달라」며 울부짖는 열한살짜리 막내동생을 볼 때 군복을 입은 나로서는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상황에서 원망스런 눈물만이 앞을 가렸다.
이렇게 가정이 파탄에 빠진 것을 본 나는 찢어질듯 아픈 마음을 억누르고 남은 휴가일정을 포기한채 부대로 복귀하여 장기복무를 지원했다.
동생들 학비와 식생활비를 지원해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빈속으로 전역해봐야 돌아갈 집조차 없는 처지였으므로 전역후 농촌으로 돌아가서 못이룬 나의 푸른 꿈을 펼쳐나갈 자금 목표액 1천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저축을 해나갔다.
군에서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유휴지를 활용하여 고추·상추·배추 등을 재배해 장병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는데 힘을 기울였고 시간만 있으면 영농서적을 사서 읽으면서 전역 후의 미래를 설계했다.
상관들의 총애를 받으며 보람있는 군생활이 계속되는 동안 장기복무를 지원할 때 세웠던 나의 목표액 1천만원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남들은 인사과 선임하사관이란 좋은 직책을 버리고 왜 농촌에서 땅을 파려고 하느냐면서 말렸지만 81년11월30일부로 8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고 전역을 했다.
군생활을 하는동안 부모님이 살고계신 곳도 찾게 되었고 나도 결혼을 하여 지금은 국민학교 6학년과 4학년에 다니는 남매를 두고 있다. 동생들도 모두 제자리를 찾게되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으로 변모하였다.
내가 전역을 하여 정착하게 된 곳은 고향과는 좀 떨어진 충남 서산땅이다.
이곳을 제2의 고햐으로 믿고 밭2천6백45평, 임야 3천평을 사들여 블록으로 단칸방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8년이란 세월동안 일손을 놓았다가 다시 농사일을 하려니 손바닥이 부르텄고 코피를 쏟은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으나 달이 밝으면 밤이라도 어김없이 밭에 나가서 일을 했다.
남들의 「올빼미」라는 농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업농시대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서 그날그날 한 일은 영농일지에 꼬박꼬박 기록을 하여 다음해의 영농설계를 하는데 중용한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1년동안의 농사에 대한 손익을 파악하여 수지타산이 맞는 작목선정과 새상품개발을 하는 데에 활용했다.
특히 82년부터 밤고구마 조기재배를 시도하여 매년 높은 소득을 올렸으며 남부지방보다 늦게 출하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가격차이를 줄이기 위해 수년동안 연구한 끝에 88년에는 남부지방과 같은 시기에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터널조기재배법을 개발하게 되었으며 89년에는 이 재배법을 이용, 7월초에 출하해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밭농사를 주작목으로 하다보니 화학비료에 의존한 농사보다는 퇴비를 이용하여 유기농업을 하는 것이 지력을 증진시키는 것은 물론 무공해 곡식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아래 축산농가라면 모두 잊어지지 않는 83년에 임야를 처분하여 한우 15마리를 사들였다.
풀한줌이라도 더 베어다주며 사양관리에 노력을 했지만 소값은 계속 폭락하기만 했다.
나는 기왕 축산을 하려면 낙농의 길을 택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아서 한우를 모두 처분하고 젖소 초임만삭우 5마리를 구입했다.
초지 한평없이 시작한 초창기에는 10여km 떨어진 곳까지 다니며 경운기로 풀을 베어다 먹이며 온갖 정성을 다해 관리를 했다.
이듬해부터는 일부 밭을 제외하고 모두 사료포로 이용하니 풀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고 매달 2회씩 원유값이 나오니 일정금액씩 저축도 할 수가 있었다.
86년에는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었다.
그동안 젖소에서 우유와 송아지를 팔아 모은 돈과 농민후계자자금 8백만원으로 농지를 구입하기로 하고 여러군데 물색해 보았으나 서해안 개발지역으로 임해공단이 입주하게 되어 땅값은 하늘처럼 치솟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아저씨 한분이 『자네라면 내땅을 적당한 금액에 주겠다』하시기에 시가보다 월등히 싼 금액인 평당 1만원씩 2천평을 구입하게 됐다. 이제는 가정생활도 안정되어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으나 단칸방 신세를 면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새로 구입한 땅위에 새집을 짓기로 하고 부푼 마음에 몇날을 밤잠까지 설쳐가며 설계도를 만들어 집을 짓고 88년8월에 새집으로 입주하였다.
30평짜리로 비록 블록벽에 슬레이트지붕을 올렸지만 보일려 시설에 목욕탕?응접실?입식주방 등 현대식으로 갖추었으니 어느 누구의 집도 부럽지 않았다.
젖소는 계속해서 암송아지만 낳아주었고 사양관리·질병예방 등에 정성을 다하니 건강하게 자랐다.
모든 청예작물은 비닐백 사일로를 만들어 급여하는 방법으로 높은 유지방을 얻을 수 있었고 사료값도 절약하는 동시에 많은 우유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88년 가을 또한번의 절망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목초종자를 인수하러 시내에 나갔다가 과속으로 앞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상대방 오토바이 뒤에 타고가던 사람이 크게 다쳤다.
결국 그토록 아끼던 젖소착유우와 육성우 모두를 처분하여 1천만원을 치료비와 합의금으로 지불했다. 급히 처분하다보니 제값도 못받았다.
나는 잠시 실의에 빠졌으나 이보다 더 큰 고난들도 무난히 이겨 나왔다는 자부심으로 적은 자금으로 시작할 수 있는 양돈을 해보기로 하고 농협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9마리의 어미돼지를 구입했다.
1백여평의 축사를 내손으로 새로지었다.
한때는 돼지값 폭락으로 실망도 했었으나 9마리의 돼지가 새끼를 낳아 1백여마리가 무럭무럭 자라 출하시가 된 설날을 전후하여 돼지값도 회복이 되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난해에는 벼농사 8백평을 비롯해 고추?밤고구마?벼농사?여름오이 등으로 1천1백여만의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봄에 조직하여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던 밤고구마 작목반을 활성화시키는데 최선을 다함은 물론 작목반장으로서의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또 지난날의 실패와 좌절의 고통을 교훈삼아 미래의 대농장주로서의 푸른 꿈을 키우며 흙을 사랑하는 농촌의 기수로서 나의 젊음을 복지농촌건설의 밑거름으로 바치고자 한다.
  [최종편집 : 1990/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