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여름, 나는 오랜만에 회사에서 휴가를 얻어 고향을 찾아갔다. 4년만의 귀향이었다.
집안이 가난했던 탓으로 고향에서 가까스로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에 올라와 철공소에 근무하면서 야간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2급기능사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국내 유수의 재벌기업인 H중공업에 당당히 입사할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한 댓가로 나는 표창도 여러차례 받았고, 입사한지 4년째되던 해 봄에는 상당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넘겨다보기조차 힘들다는 품질관리실의 주임으로 발령을 받기까지 했다.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근무지인 울산으로 떠나던 날, 나는 앞으로 금의환향이 아니면 절대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4년 만에 나는 비록 「금의환향」은 아닐지라도 남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위치에 올라서 있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의 규모를 일러주고, 그곳에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맡고 있는가를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받고 있는 몇 달치의 월급이 시골에서 1년동안 뼈빠지게 일해서 번돈과 거의 맞먹는다는 것도 은근히 자랑할 셈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귀향 첫날 밤 고향 친구들을 만나고 난다음, 나는 내가 크게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 고생이 많겠구나.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말아라. 무슨 일이건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생기는 법이다.』
친구들은 되레 나를 위로했다.
그럴만도 했다. 완근이라는,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소를 30여마리나 키우는 목장주가 되어 있었고, 나와 단짝이었던 영기는 특용작물을 심어 해마다 1천여만원의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는데, 지난해에는 참깨와 수박을 심어 2천여만원을 벌었다고 했다.
그날밤 늦게서야 집에 돌아온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까지 내가 잘못 살아왔고, 또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공장의 규모가 얼마나 크고 각종 자동화된 시설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침이 마르게 설명할 때, 친구들이 『녀석두, 참! 그래 그게 네거란 말이냐!』하고 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이튿날엔 부끄러워서 밖에 나가기조차 싫어졌다.
이틀동안을 두문불출하고 지낸 나는 부모님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말씀드렸다. 예상했던대로 부모님께선 펄펄 뛰셨다.
『아니, 네가 정신이 있니, 없니? 남들은 대학을 나오고도 취직을 못해서 난리인데, 뭐 사표를 내고 농사를 지어? 네가 등 따습고 배부르니께 못허는 말이 없구나.』
말도 못 꺼내게 했다. 시골에서 살다가는 장가도 못하고 몽달귀신이 된다면서, 부모 가슴에 못을 박을 참이냐고 하셨다.
그러나 사내자식이 망하건 흥하건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사업을 펼치는 일이 안정된 월급장이 생활보다는 훨씬 값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망설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인생을 유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휴가에서 돌아온지 한달만에 나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러나 나는 묵묵히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거들었다.
농사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힘들었고 어려웠다. 그러나 농촌생활을 하나 하나 배우고 익혀야하는 나에게는 농사일이 반드시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이듬해 봄, 나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새로 개간한 야산밭 3천평을 빌어 참깨를 심었다. 90만원을 융자해주고, 농촌지도소에서는 수시로 밭에까지 나와서 자상하게 기술지도를 해주었다. 그해 참깨농사는 평년작 수준이었다. 참깨를 거둔 후에는 2모작으로 알타리무우를 심었다. 그런데 예상치못한 가뭄이 계속되어 무는 파종한지 열흘이 넘어도 싹이 나오질 않았다.
밭을 갈아엎고 재파종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밤을 새워가며 무밭에 물을 주었더니 겨우 싹이 트기 시작했는데, 가뭄으로 재파종까지 했기 때문에 수확을 했을 때에는 값이 폭락하여 인건비조차 못건지게 되었다.
첫해 농사를 실패로 끝낸 나는 실의에 빠져 집안에서 빈둥거리고 놀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앞으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고 가꿔야할 것인지, 농사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평택평야를 거쳐 충남 당진에 닿은 것은 집을 떠난지 5일만이었다.
나지막한 야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곳에 꽤 너른 호수가 있었고, 30~40호되는 마을이 산기슭에 오붓하게 모여앉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금붕어와 가물치를 키우는 양식장이 있었다. 주인을 만나 양식법을 물었더니 키우고 싶으면 새끼를 사다가 직접 키워보라면서 잘 가르쳐주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어서 마을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았더니 다행히 양식경험이 있는 한사람이 치어의 사육법에서부터 성어의 관리요령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튿날 전북 임실에 있는 내수면개발시험장을 찾아갔다.
시험장 직원은 내가 가물치 양식을 해보고 싶다고 하자 아주 좋은 생각이라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가물치는 수온이 섭씨15도 이상이 되면 사료를 무제한으로 공급해 줘야 하므로 사료조달이 문제인데, 마을 앞에 동림 저수지가 있으므로 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저수지 가에 있는 논에 50평 크기의 웅덩이 2개와 1백평 크기의 웅덩이 하나를 중장비를 동원하여 파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키넘게 파헤쳐진 논을 둘러보며 혀를 차고 비웃었다.
『저러다 지치면 살림 거덜내 놓고 또 도시로 뛰쳐 나가겠지.』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주위사람들의 이같은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어장 만드는 일을 도와주셨다.
웅덩이에 1m 깊이의 뻘밭을 만들어 수초를 심은 다음, 당진에 가서 치어 1마리에 6백만원씩 3천마리를 사다 넣었다.
가물치는 온수성 어류이기 때문에 여름철이면 하루가 다르게 컸다. 마침 여름철이면 농한기이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동림 저수지에서 그물을 쳐 물고리를 잡아 양식장에 넣어주었다.
성냥개비만한 치어들이 9월쯤에는 어른 팔뚝만하게 자랐다. 무게도 1마리에 7백~8백g씩이나 나갔다.
1kg이면 당시에도 5천원씩 팔렸기 때문에 이듬해 여름부터는 출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게 다시 한번 시련을 안겨주었다. 9월들어 시작된 늦장마가 너무 오래 계속된다 싶었는데, 어느날 밤새도록 뇌성번개가 치고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더니 기어이 둑이 무너지고 만것이었다.
빗속에서도 서둘러 허물어진 둑을 막았지만 애써 다 키워놓은 가물치가 절반가량이나 저수지로 빠져나갔다.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마을사람들 몰래 다시 치어 2천마리를 사다 넣었다.
이같은 실수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양어장에서 지내는데, 하루는 면사무소 산업계에 근무하는 친구가 찾아왔다. 양식계(繫)를 조직하고 공동어업면허를 얻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저수지에서 사료용 물고기를 마음대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규정에 의하면 양식계는 저수지주변 마을에 1년이상 거주한 주민 20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구성하게 돼있다고 했다.
그냘 저녁부터 나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양식계를 조직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치려면 혼자나 미치게.』
『지금까지 논농사 밭농사만 지어갖고도 안굶고 잘살았네.』
그러나 나는 내수면 양식업이란 절대로 미친짓이 아닌, 전망이 밝은 고소득사업이라는 것과 앞으로 우리 농촌은 논밭에만 의존하지 말고 소득원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게다가 가물치는 육식성 어류로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인공사료가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기업이나 돈많은 양식가들이 뛰어들지 못해 돼지처럼 과잉생산될 우려가 없습니다. 저수지를 이용해 사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고, 횟감으로는 민물고기중에 가물치가 제일일뿐 아니라 당뇨·신장병·보신용 등 최근 자연식품 붐과 함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참여해도 좋습니다.』
1주일여에 걸친 꾸준한 설득 끝에 우선 마을사람들 23명의 동의를 얻어 양식계를 조직할 수 있었다. 회장은 우리 마을 새마을지도자님께서 맡고 나는 총무일을 보기로 했다.
다음은 내수면양식 공동어업면허를 얻는게 문제였다. 수면면적이 1백ha 미만이면 절차가 간단한 조방어업면허를 내도 되지만, 우리마을처럼 저수지가 3백82ha가 되는 곳은 반드시 공동어업면허를 내야 한다는 것이 군청 담당자의 설명이었다.
갖춰야 할 서류만해도 셀수없을 만큼 많았다. 우선 저수지 전체의 측량 도면과 지적도·토지대장등본이 각각 2통씩 필요했고, 저수지를 관할하는 동진농지개량조합측의 내수면 사용동의서, 전북내수면개발시험장의 적지관정서가 필요했다.
다행히 공동어업 면허는 서류를 모두 제출하자 곧바로 나왔다. 전북제16호로 공동어업 면허증이 발급되던 날 우리 마을은 온통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 가물치 양식을 권장했던 나는 마냥 자축의 분위기에 들떠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서울·부산 등지의 큰 책방에 가서 민물고기 양식에 관한 서적은 있는대로 사 모으는 한편 내수면시험장과 가물치양식 경험자들을 찾아 다니며 양식요령을 새로 익혔다.
가장 어려운 것은 종묘어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물론 참고서에는 가물치의 부화에 대해 몇줄 간단히 언급되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부화에 성공했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그들은 부화방법이 무슨 전가의 비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체 가르쳐 주지를 않았다.
결국 실패를 하더라도 스스로 연구하고 실험을 하여 익히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동안 보아온 책과 여러곳을 찾아다니며 익힌 전문을 토대로 치어생산을 토대로 치어생산을 하기로 했다.
우선 30평크기의 산란못을 파고 온도 관리를 위해 대나무 골조를 세운다음 그 위에 비닐을 씌웠다.
버드나무 뿌리와 마대를 엮어 만든 어소(魚巢)를 곳곳에 적당한 간격으로 놓은 다음 산란능력이 있는 어미가물치 25쌍을 넣어 주었다. 암수의 비율은 1대2로 수놈을 더많이 넣어주었다. 그것은 가물치는 한번에 1만5천~2만마리씩 산란기에 4회에 걸쳐 알을 낳기 때문에 수정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산란못 곁에는 3백평 크기의 치어못을 따로 만들고 치어의 먹이인 물벼룩 등이 많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 계분등 완숙퇴비를 넣고 깊이 갈이를 한 후 따듯한 물을 넣어 주었다.
수온을 섭씨23도 안팎으로 맞춰주자 2일 후부터 부화가 되기 시작했다. 잘디잔 벌리같은 치어가 물위로 새까맣게 떠올라 꼬물고물 헤엄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벅찬 감격을 이기지 못해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내 손으로 가장 풀기 어렵던 숙제를 푼 것이었다.
치어의 산란과 부화에 성공하자 나는 주민들의 관심과 양식계원들의 호응도를 높이기 위해 가물치 출하작업을 공개하기로 했다.
작업을 공개하던 날은 아침부터 부산·광주 등지에서 트럭과 봉고차들이 몰려오고 면내의 기관장님들도 모두 구경을 나오셨다.
육성 못의 물꼬를 트고 나자 1백여평이 되는 양식장 바닥에는 펄쩍펄쩍 뛰는 가물치들이 마치 쏟아 부어놓은 것처럼 가득했다. 잠깐 사이에 2t, 값으로 따져 1천여만원어치를 건져냈는데, 양식장안의 고기는 별로 줄어든것 같지가 않았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기관장님들이며 동네 어른들이 내손을 붙들고 어깨를 두드리며 치하해 주셨다. 그후로 고창군청에서는 우리마을을 내수면양식 시범마을로 지정하여 군소득금고자금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우리마을 사람들은 가물치양식으로 적게는 1백만원에서 1천만원 이상의 농외 소득을 올리고 있다.
피아니스트가 되는게 꿈이었던 피아노학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요즘은 나와 함께 호숫가 양어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곱게 낙조가 드리운 양식장 수면 위로 첨벙하고 물장구를 치며 뛰어오르는 가물치를 바라보는 것이 음악보다 그림보다 더 즐겁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최종편집 : 1988/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