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무살나던 해 겨울, 나는 가마를 타고 거제도 해안의 조그만 갯마을로 시집을 왔습니다.
10여호의 농어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마을은 가깝게 거제 해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날씨가 온화하여 사철 갖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시댁은 의성 김씨(義姓 金氏)의 종가인데다 시조부모·시부모·시누이 셋에 두 살 난 시동생까지 모두 열식구나 되는 대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농토는 고작 논이 8마지기, 밭이 두말가웃지기(5백40평) 뿐이었습니다. 논밭 모두 합쳐 10마지기 밖에 안되는 땅에 열식구가 매달려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한다지만 제사는 왜 그리 많던지…한달에 평균 한두차례는 제사를 모셔야 하고 봄·가을에는 시향(時享), 7월에는 묘소마다 찾아다니며 벌초를 해야 했습니다.
고초 당초보다 더 맵다는, 힘들고 고달픈 시집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아버님께서는 그때 망치리의 이장으로 마을 일을 보고 계셨는데, 매일 군청·지서· 직원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점심을 두세번씩 짓기가 예사였습니다.
게다가 이곳 풍습으로 남자들은 논갈이·벼베기·타작을 하는 외에는 나머지 농사일은 모두 여자가 해야 했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오밤중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부엌으로 들녘으로 팔랑개비처럼 쏘다니다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저뭅니다. 밤은 누구에게나 휴식의 시간입니다. 뙤약볕 아래 밭을 갈던 소도, 수레를 끌던 말도 밤이 되면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거나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낮의 피로를 푸는 시간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갯마을의 새댁에겐 밤이 차라리 고달프고 괴로웠습니다.
정말이지, 단 하루라도 밤이 되면 푸욱 쉬고 싶었습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행복하고 정겨운 밤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시할머님께서는 마치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시듯 그날 밤의 일감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삼이나 모시뭉치, 아니면 솜뭉치를 받아들고 호롱불 밑에서 길쌈을 하는 것이었는데, 온종일 집안팎 일에 시달린 끝이라 저녁숟갈을 놓고 나면 온몸이 나른하게 풀리면서 눈이 쓰리도록 졸음이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영(令)이라고 거역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과 모시는 손가락으로 껍질을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쪼개 올과 말은 다음 여러차례의 손질을 거쳐 베틀에 올립니다.
무명은 목화를 따서 씨아에 넣어 씨를 뺀 다음 활로 곱게 타서 솜을 만들고 이 솜을 비벼서 고치를 물레에 걸어 자으면 실이 뽑혀 나오는데, 이 실에다 풀을 먹여 곱게 다듬어서 베틀에 올려 베를 짜냅니다.
난생 처음 길쌈을 해본 나는 늘상 할머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너, 졸면서 실을 비볐구나. 그러니 올이 고르지 않지.』
『바디질은 천번 만번을 해도 세기가 골라야 하느니라. 그런데 마음속에 잡념이 생기니까 이처럼 올이 고르지 못한 것 아니냐!』
명주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최고급 옷감이었습니다.
봄·가을 두 철에 누에를 치는데 밭 언덕에 있는 뽕나무 몇그루로는 턱도없이 뽕이 모자라기 때문에 누에철이 되면 신새벽부터 산뽕을 따러 산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저녁 길쌈을 끝내고 시조부모님·시부모님 잠자리를 보살펴드린 다음 문간채의 우리방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일어나 맞으면서 손목이라도 한번 잡아주면 피로가 한결 가실 법도 한데, 남편은 나무칼로 팔을 베어가도 모르게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혹시라도 남편이 깰까봐 살며시 이불을 젖히고 들어가 남편의 등뒤에서 혼자 훌쩍이다가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래도 새벽 네댓시면 어김없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자마자 꽁보리를 절구통에 넣고 찧어 키로 까불고 체로 쳐서 고운 보리로 만든 다음 솥에 넣고 푹 삶아서 건져놓습니다. 이 삶은 보리를 쌀과 3대 7의 비율로 섞어 밥을 짓는데 시할머님·시아버님·남편·막내시동생 등 남자분들의 밥은 쌀이 많이 들어가게 푸고, 다음으로 시할머니·시어머니·시누이 순으로 쌀의 섞인 양을 줄여가며 밥을 퍼담다보면 언제나 내차지는 꽁보리밥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집오기 전에는 이렇게 까지 힘들고 고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섭고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여자란 옷고름에 참을 인(忍)자를 새겨놓고 살아야 하느니라. 하루에도 수십번씩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이 나라에 태어난 여자들의 운명인데, 그때마다 너는 눈물을 닦으면서 참을 인자로 가슴을 다독거리거라. 그러면 필시 장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라.』
그때 시아버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내가 건성으로 받아들였다면 오늘과 같은 복된 날이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쁘고 고된 하루하루가 쌓여 시집살이 일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해 봄에 남편에게 입영통지서가 나왔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제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남편이 입대한 후, 시아버님께서는 이장일을 그만두고 빚을 내어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많지도 않은 논밭을 모두 날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시할머님께서는 손자며느리를 잘못 들여와 집안이 망했다면서 걸핏하면 나를 구박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시집온 후로 밤낮없이 소처럼 일한 죄밖에 없는데 나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시아버님께서 타일러 주신 말씀대로 참을 인(忍)자로 가슴을 다독거리며 남편이 제대할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남편은 3년만에 재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3년전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거덜나자 그렇게 인자하시던 시아버님께서 매일 술만 드시더니 결국은 정신이상까지 생겼고, 남편은 남편대로 실의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분이 찾아와서는 부산에 일자리가 있는데 교제비로 3만원만 주면 남편을 취직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친정에 가서 아버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는 돈을 구하여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부산으로 떠난 다음 매일매일 들뜬 기분으로 남편에게서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연락이 오는대로 나도 남편을 따라 부산으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은 커녕 남편은 보름만에 까칠하고 파리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사기를 당산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다시 실의에 빠져 온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예삿일이 아니다. 쟤가 들어온 후로 일마다 되는게 없으니 결국은 집안살림을 망치고 말겠구나.』
시할머님께서는 또 제탓을 하셨습니다.
나는 남편을 붙들고 울면서 사정을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해서든지 젊은 우리 부부가 잃었던 가산을 되찾자고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이집에서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남편은 나의 뜻에 따라 주었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남편은 땔나무를 하고, 나는 그 나무를 머리에 이고 2km나 떨어진 이웃마을에 가서 팔았습니다.
입술이 부르트고 발등이 깨지고 팔다리가 가시덤불에 할퀴어 핏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악착같은 생활을 4~5년간 계속하다보니 시아버님께서 진 빚도 다 갚게 되고 빚으로 넘어간 농토도 얼마간 되찾게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도 차츰 나아지고 잃었던 가정의 평화도 되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액운은 그냥 슬그머니 물러난게 아닌가 봅니다.
1968년 여름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남편은 식은땀을 잘 흘리고 밭은 기침을 자주했는데, 하루는 잠자리에서 기침을 하다 말고 검붉은 핏덩이를 토하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부산 결핵협회를 찾아가 진찰을 받아보니 폐결핵 중증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까닭없이 온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나의 그같은 모습을 보신 의사선생님께서는 너무 걱정말라면서 안심을 시키더니 치료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날부터 남편의 투병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결핵협회에서 일러준대로 내복약을 사서 시간을 엄격히 지켜 먹게 하고 항생제 주사는 내손으로 놓았습니다.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전염될 것을 우려하여 문간방을 치워 혼자 거처하게 하고 기초체력을 길러주기 위해 쇠고기며 보신탕을 끓여 옹달샘 안에 담가 놓고는 남편에게만 조금씩 덜어 주었습니다.
남편이 자리보전을 하고 눕게 되자 이제 집안일은 온통 내 차지가 되었습니다.
논으로 밭으로, 산으로, 나는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밭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남편을 보살피러 집에 들러야 하고 자다가도 두세차례는 깨어 일어나야 했습니다.
아이들과 시동생의 학비, 남편의 약값, 열식구의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나는 채소행상, 땔나무장사, 소작농사 등 아무 것이든 닥치는대로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편의 병세도 차츰 나아지고 집안형편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걸머졌던 빚도 모두 갚고 되레 농토도 일년이면 한 두 마지기씩 늘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결핵과 싸우기 10년 만에 남편은 완치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몸에서 그 지겹고도 끈질긴 병마가 완전히 물러갔다고 하자, 나는 그 순간 춤을 추며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습니다.
남편과 나는 새로운 희망에 불타올라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겁고 감사하기만 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남편은 다시 억척스럽게 농사일에 매달렸습니다.
우리 고장의 논은 모두가 산비탈의 계단식 논으로 한배미가 평균 50~60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손은 많이 드신 대신 소출은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남편과 나는 겨울이 되면서 합배미작업을 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좁은 논다랑이를 논두렁이 다 차지하여 쓸모가 없었는데 합배미를 하니 논관리하기가 수월하고 자연객토가 되어 땅심도 높이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975년엔가는 거제군내에서 벼다수확농가로 선정되어 군수표창과 상금 10만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 나이 47살. 돌이켜보면 힘들고 고달픈 인생역정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뿌듯한 보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동안 세 시누이를 모두 시집 보내고 시동생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대학원에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시조부모님과 시아버님께서는 10여년 전에 돌아가시고 올해 74세 되신 시어머님께선 허리를 다친 후로 거동이 불편하셔서 얼굴도 제가 매일 씻겨드려야 하지만 아직은 근력이 정정하셔서 오래도록 저희들이 모시고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면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 부부가 평생 처음으로 관광여행을 다녀올 계획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돈이 많아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물질보다는 목표했던 바를 하나하나 이루고 성취해가는 보람이 곧 살아가는 즐거움이자 행복이 아닌가 합니다.
옷고름에 참을 인(忍)자를 새기고 27년. 힘들고 고달픈 세월이었지만 참고 견뎌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고 숭고한 것인가를 나는 요즘 가슴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은 남보다 많지 않지만 그대신 나는 남다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종편집 : 1987/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