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의 황토밭은 황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시사철 먼동이 틀 무렵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농장을 한바퀴 휘 둘러보는 것이 습관이 된 나에겐 언제나 녹색의 대지일 뿐입니다.
작물이 자라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작황을 살피고, 요즘처럼 아무것도 심어있지 않은 철에는 어디다, 언제.
무엇을, 얼마만큼 심고 가꿀 것인지를 구상해 보는 것입니다.
골짝 골짝이 16만평이나 되는 밭을 두루 돌아다니다보면 어느새 해가 무등산(無等山) 너머로 두어 자 높이나 되게 솟아올라 있습니다.
지금부터 20여년전만해도 나는 거지나 진배없었습니다. 땅 한뙈기 없이 품팔이를 해서 그날 그날 입에 풀칠을 해가는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국민학교만 겨우 마치고 무작정 상경길에 올랐습니다. 그때가 1960년 4월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두닦이?껌팔이?신문배달?넝마주이를 해가면서 밤에는 속성중학을 다녔습니다. 잘곳이 없어 한데서 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자기도 하고, 공중변소 안에 들어가 벽에 기대선채 밤을 새운 적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2년 남짓 세월을 축내다보니 어린 소견에서도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다시 내고향 두메산골 나주땅으로 내려고 말았습니다.
집안 형편은 2년전이나 조금도 다를바 없었습니다. 동생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누렇게 뜬 얼굴에 배만 장군통만하게 불러 있었고, 부모님들은 나를 보시고는 반가움 보다는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걱정부터 앞세우셨습니다.
나는 배운것 없고 기술도 없으니 농사를 짓기로 했습니다. 땅은 머리 좋고, 재주많고, 지식과 교양을 두루 갖춘 사람보다는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괭이 한자루를 들고 집 옆의 야산 6백평을 개간해서 호박?참깨?밭벼를 심었습니다. 맨땅에 곡식이 잘 될리는 없었지만,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이것을 발판삼아 뻗어 나가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65년 겨울에 입영통지서가 나왔습니다.
나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66년 2월 입대하여 그해 10월 월남파병에 지원했습니다.
거기 가면 돈을 좀 모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는 것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돈이 모이면 기름진 땅을 사서 나도 여봐란듯이 농사를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돈을 모을 수 없었고, 「반탐」강(江)의 특공작전과 「자인통」전투에서의 전공으로 인헌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달고 68년 3월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와 동시에 나는 다시 험난한 세파에 내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험난하다해도 24시간 죽음과 어깨동무를 하고 지내야했던 월남전선 만큼이야 하겠느냐, 가진것 없고 배운것 없고, 기술도 재주도 없으니 오로지 나는 근문과 절약과 정직을 재산으로 살아가자고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다시 타관으로 나가 날품팔이?건축공사장인부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여 5백여만원이 모아지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어이 고향땅에서 농부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농군이 되어 평생 남의 농사만 지어오신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해 겨울, 나는 제주도가 고향인 지금의 아내와 중매 결혼을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무우바갓』라 하기도 하고, 서울이건 광주(光州)건 웬만큼 큰 상회치고 「김태근」이란 내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전국에서 무우를 가장 많이 심어(16만평) 매년 8t 트럭으로 2백50대 이상을 서울등 대도시에 출하하고 있습니다만, 내가 무우에 관심을 가진 것은 12년 전인 1975년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딱서니없고 무모하기 그지없는 짓을 그때 나는 저질렀습니다.
여태까지 뼈 빠지게 벌어 모은 돈5백만원에다 빚까지 2백만원을 내어 7백만원으로 무우밭 2만평을 밭떼기로 샀었는데, 시세가 폭락하는 바람에 1원 한 장도 못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자 새롭게 오기가 생겼습니다. 내손으로 무우농사를 지어 기어이 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듬해 봄, 나는 아내를 집에 남겨두고 동생 철수와 함께 집에서 70리쯤 떨어진 영암군(靈巖郡) 시종면(始?面)이란 산골로 들어갔습니다.
아내는 고생을 해도 함께 하겠다면서 따라 나섰지만, 당시 집에서는 어머님이 위장병으로 오래 고생하고 계셨기 때문에 내몸 하나 편하자고 아내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시종면에서는 정부에서 개간을 해놓았으나 아무도 경작하려는 사람이 없어 수십만평의 야산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쓸만한 땅 3만평을 5만원에 임대하고 중고 경운기 한대를 사서 잔솔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황무지를 갈아 엎기 시작했습니다.
농업용수는 커녕 먹을 물 한방을 구할 수도 없고, 물을 길러 가려면 길도 없는 잡초숲을 헤치며 십리길이나 오가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동생과 나는 그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3만평을 풀 한포기 없이 가라 엎었습니다. 우리형제의 손바닥은 물집이 생겼다가는 터지고 진물이 흘러 아물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이었습니다. 하루는 나이가 지긋하고 인자하게 생기신 수녀 한분이 찾아와서 황무지를 개간하느라 고생이 많다면서 여러 가지 도움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수녀님은 이웃 신북면(新北面)에 있는 까리따스 수녀원의 원장님이신데, 농사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신 분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이곳 농민들을 모아 영농교육을 해오신 분이었습니다.
나는 원장님을 찾아가 새로운 농사지식을 배우면서 석회와 퇴비를 듬뿍 뿌리고 무우씨를 파종했습니다.
무우는 우리들의 소망처럼 고르게 싹이 돋았습니다. 날씨도 순조로와 무우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어느덧 무우가 칼자루만큼씩 하게 자랐을 무렵입니다. 그때부터 가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창 크던 무우는 성장을 멈추고 한낮이 되면 잎이 빌빌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보는 내마음은 마치 내몸이 말라 비틀어지는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것같은 절망적인 심정이었습니다.
동생과 나는 미친듯이 물이 나오는 곳을 찾아 관정(管井)을 파고 면사무소에 가서 양수기를 빌어다 경운기 엔진에 걸고 물을 끌어올려 무우밭에 대주었습니다.
형제가 24시간 교대를 해가면서 꼬박 물을 퍼도 3만평이나 되는 무우밭에 충분히 물을 대기는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가물었던 탓인지 밤이 되면 기온이 0도 가까이 뚝 떨어져 겨울날씨처럼 추웠습니다.
우리 형제는 동네에 나가 짚단을 구해다 풀어놓고는 밤이면 짐승처럼 그 속에 들어가 잠을 잤습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우리는 서로 꼭 부등켜안고 오들오들 떨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처럼 고생과 정성을 쏟은 결과 그해 무우는 대풍을 이뤘습니다.
라디오에선 김장무우가 가뭄으로 큰 흉작이라고 매일같이 걱정스런 보도를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근동의 무우밭을 둘러보았더니 모두 불에 타버린듯 했습니다.
서울의 무우장사들이 날마다 수입명씩 떼지어 몰려와서는 자기들에게 팔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만, 나는 직접 무우를 기차에 싣고 서울시장에 출하하기로 했습니다.
하차 한간에 무우를 가득 싣고 용산역에 닿으니, 이게 웬일입니까. 상인들이 벌떼같이 몰려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운명의 여신이 드디어 내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해 모든 경비를 다 빼고도 5백만원의 순이익이 남았습니다. 그 돈으로 개간밭 1만평을 사들이고 또 3만평을 빌어 이듬해에는 4만평에 참깨와 수박을 심고 뒷그루도 다시 무우를 심었습니다.
무우처럼 수박도 큰 인기였습니다.
황토밭에 퇴비를 듬뿍 줘서 기른 것이라 맛이 월등히 좋았던 때문입니다.
역시 퇴비는 땅의 보약(報藥)이었습니다. 요즘 상업농이니 뭐니 해서 선별을 잘하라, 포자을 잘하라고 합니다만 이에앞서 퇴비를 많이 넣어 땅심을 높임으로써 공해를 입지 않은 청정채소를 공급하여 소비자의 인정을 받는것도 상업농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쨌든 이듬해에는 수박과 무우에서 7백만원을 벌어들여 다시 밭1만평을 더 장만했습니다.
해마다 이렇게 농초를 놀려 81년에는 10만평으로 늘어났습니다. 농장이 10만평으로 늘어나자 관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동생들 4명이 도왔지만 인부만해도 매일 수백명씩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82년에는 농장버스를 한대 사들였습니다.
모든 농작업을 기계회하기 위해 트랙터 5대를 비롯하여 포크레인?경운기?동력살분무기?파종기등 장비만 해도 2억원어치를 구입하고 채밭에 스프링클러 시설을 완료했습니다.
82년 나는 농사를 짓던중 가장 크게 실농(失農)을 했습니다. 수박값이 폭락하여 인건비도 건지지 못했는데, 연이어 무우시세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호남지방에서 1만평 이상 무우 재배를 하는 농가를 상대로 대책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날 회의장인 광주 무등산 중심사(重心寺) 계곡엔 1백50여명의 무우경작자가 모였습니다.
나는 요즘 무우시세가 폭락한 것은 과잉생산 때문이니 모두들 무우재배 면적의 3분의1씩을 갈아엎자고 제의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적극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그후로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이 결의는 흐지부지 결실을 못보았고 결국은 10만여평에 심어진 무우를 한개도 못팔고 밭에서 썩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1년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가꾼 무우를 트랙터로 갈아엎는 저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꼭 다키운 자식을 무덤에 묻는 기분이었습니다.
그해 아내마저 몸져 눕고 말았습니다. 병명은 관절염으로 진단이 나왔는데, 대학병원은 물론 용하다는 한의원까지 다 찾아다니고 양약(洋藥)과 한약?단방약을 두루 써보았으나 효험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세수도 내가 시켜줘야 할만큼 증세가 심해갔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술을 입데 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위장병으로 평생을 고생하시는 어머님의 병구완 하랴, 농투성이인 남편 뒷바라지하랴, 한몸을 열쪽으로 쪼개어 살아오다 병을 얻어 문밖 출입도 못하고 있는데, 그런 아내를 두고 내가 어찌 기름진 음식에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흥얼거릴 수가 있었겠습니다.
수박과 무우와 안팔려 크게 실농을 한다음 나는 그것이 단순히 과잉생산때문만이 아니고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인스턴트식품으로 국민들의 식생활습관의 변화에도 원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혼자만이라도 무우와 수박의 소비촉진운동을 펴나가기로 했습니다.
고려대학교류 유태종?박권우 교수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더니 KBS에 출연하시어 무우의 영양가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KBS에서는 여러 가지 프로를 통해 기회있을 때마다 무우가 건강영양식품이란 것을 대대적으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에 그치지 않고 6백여만원을 들여 무우?수박의 영양가에 관한 안내문이 인쇄된 책자용 비닐커버를 만들어 관공서와 각 은행의 객장에 무료로 배부했습니다.
이런 노력이 효과가 있었던지 이듬해에는 수박과 무우의 시세사 좋았습니다.
85년에 드디어 나는 목표했던대로 농장을 16만평으로 늘렸습니다. 그동안 세 동생도 결혼을 시키고 각각 3천만원 정도의 농장과 집을 마련하여 분사시켰습니다.
나는 그동안 동생들 몫으로 통장을 만들어 일년농사를 결산한 다음에 수익금을 나누어 동생들 통장에 넣어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내 농초에 내 농사를 지어보고 싶던 어린날의 소망은 이루었습니다. 전국 제일의 수박?무우농장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꿈도 이뤄진 셈입니다.
앞으로 남은 것은 우리나라 제일의 모범농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검소하고 근면함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 흙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행동으로 실천해 나갈 뿐입니다.
  [최종편집 : 1987/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