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년전 1981년, 그때 나는 초혼에 실패한 스물다섯살의 이혼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일이지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말만 믿고 자세히 앞뒤를 가려보지도 않은 채 결혼을 한게 잘못이었다. 아직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려도 좋을 나이인 스물한살에 면사포를 썼던 나는 새 인생의 설계를 펴보지도 못한채 2년만에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때가 내 일생을 통틀어 가장 참담했던 시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살을 생각했고 불면증 때문에 재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님과 고향사람들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나는 서울로 올라가 친척이 운영하는 조그만 공장에 다니면서 꿈도 희망도 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2년여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이었다. 토요일이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너 빨리 좀 내려와야 겠다.』
『왜요? 엄마.』
『잔소리 말고 싸게 내려 오너라.』
전화에 익숙지 못한 탓인지, 어머니는 허둥지둥 전화를 끊어버렸다. 웬일일까. 아버지가 불편하신 것일까. 만약 아버지께서 건강을 잃게 되셨다면 순전히 내탓일 것이었다.
서둘러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光州)에 닿았을 때는 금성산(錦城山) 너머로 마악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따라 근처 다방으로 들어갔다. 다방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마땅한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나왔으니 선을 보라고 귀띔하셨다. 어머니의 이 갑작스런 이야기를 듣고도 나는 조금도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다시는 결혼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작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구릿빛 얼굴의 건장한 중년남자가 얼른 알아보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첫눈에도 그는 농부로 보였다. 그는 내가 마주 앉자마자, 마치 국민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책을 읽듯 단숨에 말했다.
『전 한달전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아이들이 많습니다. 다섯이나 됩니다. 열 살짜리 큰 아이로부터 연년생으로 딸이 셋입니다. 넷째는 아들인데 다섯 살입니다. 다섯째도 아들인데, 이 아이를 낳고서 아내가 산후가 좋지 않아 죽었습니다. 저는 서른 여덟살인데….』
뭐라구요? 하는 눈으로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한마디 해줘야 겠는데 얼른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냉랭한 시선과 부딪치자 그는 금방 풀이 죽었다. 무안을 당한 어린이처럼 한동안 쩔쩔매는듯 하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례했습니다.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처음부터 좋은 만남이 되리라고는 저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청휘청 어두워오는 거리로 나가버렸다. 힘없이 다방문을 밀치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문득 가슴이 싸아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내 곁으로 바짝 다가 앉으며 말했다.
『잘 생각해 봐라. 젊고 직업좋은 청년이야 왜 없겠니? 허지만 넌….』
『네. 맞아요. 나는 아이도 못낳는 병신이니까 안성맞춤이겠군요. 열 살, 아홉 살, 여덟살…줄줄이 다섯에다 늙은 시어머니가 계시고, 게다가 농사꾼이니 금상첨화가 아녜요?』
나는 그곳이 다방이란 것도 잊고 어머니에게 마구 소리치며 대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가 야속해서 따지고 대든게 아니라, 이렇게 돼버린 내팔자에 대해 탄식을 늘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화순(和順) 읍에서도 40리나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나에게 서울이란 도시는 무한한 꿈과 동경의 신천지였었다. 그러나 서울에 신접살림을 차린지 한달도 못되어 나는 서울 생활에 멀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나처럼 시골에서만 살아온 사람은 살 곳이 못되었다. 그렇더라도 남편이 곁에서 자상하고 포근하게 감싸주었다면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느편이었는가하면 소시민적인 불만에 가득찬 사람이었다. 게다가 의지마저 박약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아무일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의 술주정과 의처증에 시달리던 끝에 나는 첫아기를 유산했고 마침내는 그 후유증으로 영원히 아기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여자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달을 받게되었다.
내가 아기를 못낳게 될것이라고 하자 남편은 노골적으로 나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엷은 화장만해도 입에 못담을 욕설을 퍼부었다. 지옥같은 나날이었다. 끝내 나는 결혼 2년만에 이혼을 하고 말았다. 나로서는 무던히도 버텨온 셈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재혼이란 한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죽는날까지 독신으로 지낼 셈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을 보게 되었고, 그나마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고 나이 차이가 열세살이나 되는 중년의 농사꾼이 「마땅한 상대」라는 것이었다.
『엄마, 결혼은 엄마 아빠가 하는게 아니고 제가 하는 거예요. 어느때고 마음이 정리되면 하겠으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집에서 일주일을 보낸 다음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고춧가루·참깨·콩 등이 담긴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데 웬 낯선 아낙네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며칠 전에 만난 남자의 누님이라면서, 잠깐만 자기집에 들러가라고 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광주 나가는 길목이니 가는길에 들렀다 가라면서 막무가내로 사정했다.
나는 며칠전 다방에서 너무 차갑게 대했던게 마음에 걸렸던 참이어서 그러자고 했다.
그의 집은 강건너 마을의 안쪽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토방이 높은 큰 집이었으나 왠지 휑뎅그렁하니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방에 들어서니 허리가 활처럼 굽은 꼬부랑 할머니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남자가 말했던 어머니인가 보앗다. 방 한쪽엔 책가방 세 개가 나란히 놓여있고, 윗목에는 고만고만한 꼬마들 넷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랫목엔 갓난 아기가 분홍색 포대기에 싸여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멧새 몇 마리가 날아와 마루 끝에 앉아 안방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이 말라 부엌에 나갔더니 큰애인듯한 아이가 쪼르르 따라나와 물을 떠 주었다.
『너 몇학년이니?』
『4학년이에요.』
『그래? 이름은.』
『배미영이에요.』
『참 예쁘게 생겼구나.』
아이는 정말 귀여웠다. 까만 눈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단발머리를 흔들며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도 식힐 겸 뒤쪽으로 나갔더니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윽고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서울이 그렇게 좋습니까? 꼭 서울로 가야만 합니까?』
나는 아무말도 않고 덤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말인가 더하려다 말고 천천히 마당을 지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까지 대접받고는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나는 방을 나오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죄라도 지은것처럼 허탈한 얼굴로 앉아 계시는 할머니, 내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네 아이들의 또록또록하고, 순진한 눈망울들, 금방이라도 깨어나 울것 같은 갓난아기, 우유통, 기저귀 바구니…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일어설 수도,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안타까웠다. 일어서서 저 대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될텐데, 내가 왜 이러지? 나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야. 나가자 나가자… 나는 자신을 채찍질했지만, 여덟 개의 까만 눈동자가, 맥을 놓고 있는 듯한 할머니의 허탈한 모습이, 금방이라도 깨어나 울것같은 아기가, 자꾸 나를 붙들어 앉히고 있었다.
『뭐하니? 어서 가자니까. 저물기 전에 도착해야 할텐데 많이 늦겠구나.』
어머니가 의아한 눈으로 내 표정을 살피며 채근했다.
『엄마, 혼자 가세요. 난 여기 남겠어요. 갈 수가 없어요….』
『네가 왜 이러니? 왜….』
『엄마, 엄마가 말씀하셨죠? 뭐든지 필요한 곳에 있으면 비록 그것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아름답고 값진 것이 된다고요. 저도 그렇게 되겠어요.』
이렇게 하여 나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스물다섯살의 독신 이혼녀의 방황도 끝이 났다. 나는 한순간에 다섯 아이의 엄마, 꼬부랑 할머니의 며느리, 그리고 사십고개에 다다른 한 농사꾼의 아내가 된 것이었다.
어느새 훌쩍 1년이 지나갔다. 이듬해 봄부터 나는 들에 나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참깨밭에 김을 매다가 드문드문 난 깨를 풀인줄 알고 깡그리 뽑아버려 시어머님께 혼이 났었고, 보리를 베면서 보리보다는 손가락을 더 많이 베어 손가락 마디마다 반창고를 휘감고 다녀야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에서 살다가 어둑어둑해서야 집에 돌아오면 몸이 파김치가 되버린듯 했다.
그래도 나는 고된 줄을 몰랐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이 골목 길에서부터 『엄마아』하고 부르며 우르르 달려와 매달리고, 다섯 살짜리까지 달려들어 어깨며 허리며 팔다리를 주물러 준다고 법석을 떠는 것이었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과수원에 매달려 지내야 했다. 동구밖에 70여그루의 그리 크지 않은 복숭아 밭이 있는데, 나는 한사코 말리는 남편을 따라 다니며 가지치는 법을 배웠다.
두엄도 내고 비료를 줘서 모심을 때쯤엔 열매를 솎아내고 봉지를 씌웠다. 모내기가 한창이어서 삯군을 사기 어렵기 때문에 남편과 둘이서 70그루에 봉지 씌우기를 다 끝내야 했다.
마지막 날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과수원에서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몸이 너무 약하시군요. 쉬시고 안정을 하셔야겠습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일하는게 즐겁고 재미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링겔 한 병 맞는 것으로 치료를 끝냈다.
그해 복숭아는 대풍이었다. 광주시내에 있는 농협공판장에서 우리집 복숭아가 가장 높은 값으로 팔리던 날, 남편은 다짜고짜 택시를 타라고 하더니 어느 다방 앞에서 내렸다. 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다방이었다.
『여보. 이게 모두 당신 덕택이야. 당신이 없었다면 과수원도 폐원이 되고 말았을거야. 고마워!』
남편은 복숭아 판매대금 2백32만원을 내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해 겨울이었다. 하루는 양치질 하는데, 욱하고 헛구역이 치밀어 올라왔다.
처음엔 뭘 잘못 먹었나 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만의 하나라도 임신이 될리는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미심쩍어 하루는 아무도 몰래 산부인과에 가보았다.
『임신이 확실합니다. 축하합니다.』
의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럴수가! 의사마다 임신불능이라고 했는데 임신이라니! 나는 이기적같은 일에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잃었던 여자를 찾은 것이었다. 초혼에 실패한 것도 결정적인 이유는 불임증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절망과 좌절 속에 보냈던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내아이를 갖고 싶은 간절한 소망과 함께 다섯도 많은데 하나가 더 불으면 어떡하나, 내가 아이를 낳으면 지금 아이들에게 소홀해질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십여일 동안이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끝에 다시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임신중절을 부탁했더니, 의사는 펄쩍 뛰었다.
『그 몸으론 중절수술이 안됩니다. 잘 보호해서 낳도록 하세요. 정 수술을 하고 싶으시면 남편되시는 분과 함께 다시 오세요.』
남편에게 얘기를 했더니, 극구 반대했다. 큰일날 소리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승렬이가 태어났다.
그새 4학년이였던 미영이는 중학교 3학년이 됐고, 꽤나 속을 썩이던 셋째 딸 향미도 6학년이 됐다.
미영이가 중학생이 되던 해 그러니까 84년 어버이날이었다.
뜻밖에도 『장한 어머니』로 선정되어 많은 학부형과 면민들의 축하속에 춘양여자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표창을 받게 되었다. 내가 장한 어머니라니, 쑥스럽고 부끄럽지만 내 아들 딸들이 나처럼 이곳에서 곱고 아름다운 꿈을 키워가기를 바랄 뿐이다.
누가 말했듯이 행복이란 역시 자기 자신의 자(**)로 밖에 잴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내게 애들많고 일복 많아 귀찮고 고통스럽겠다고 동정하는 투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지금까지 일과 아이들을 귀찮게 여겨본적이 없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덕분에 그동안 리어카 대신 경운기도 장만했고 탈곡기며 각가지 농기계, 자동 정미기도 마련했고, 작년 가을에는 논 8백평을 새로 구입하기도 했다. 부엌엔 싱크대도 놓았고 방마다 연탄 보일러도 묻었다.
이제 꽃샘바람이 잠잠해지면 동구밖 과수원에는 연분홍 복숭아 꽃이 만발하리라. 그때쯤이면 난 서울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을 초대할 작정이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여섯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완벽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내모습을 그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최종편집 : 1986/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