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빈손으로 온다고 하지만, 나는 스무살이 다 되도록 내것이라고는 낡은 운동화 한 켤레뿐, 거처할 곳도 없는 뜨내기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다시 20년이 자난 지금, 나는 12만평의 목장과 과수원 4천5백평, 밭 7천2백평, 소형 자동차?트랙터?경운기?바인더 등 최신 농기계를 두루 갖춘 어엿한 목장주로 탈바꿈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제주도 애월읍에서 한라산 쪽으로 8km 떨어진 벽촌이다.
그러나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정경을 이루고, 여름이면 사방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푸른바다와 시원한 해풍, 가을이면 온산을 노랗고 붉 물들이는 단풍, 겨울이면 벌거벗은 나뭇가지마다 신비로운 눈꽃이 피어나는 아름답고 살기좋은 고장이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불행의 수렁으로 내던져졌다. 생후 18개월만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뒤이어 어머니마저 젖도 덜 떨어진 나를 남겨놓고 개가(改嫁)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 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났다.
제주도 사람이라면 몸서리를 치는 4?3 사태로 집과 가산을 송두리째 불태우고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며 겨우 국민학교를 마친 나는 12살 어린 나이로 먹고 살길을 찾아 부산으로 나갔다.
이발소?여관?식당을 전전하던 끝에 하루는 일본에 데려다 주겠다는 사람을 만나 밀항선을 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땅을 밟기도 전에 체포되어 강제송환되었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은 고등학생으로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차디찬 감방에서 회한과 좌절의 눈물을 흘리고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얼마든지 뜻을 세워 보람되게 살 수 있는데, 왜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복역을 끝내고 나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했을 때 내 나이는 스물한살이었다. 그러나 올데갈데 없는 떠돌이에게 전과자란 낙인은 타향살이를 더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내가 찾아갈 곳은 단 한곳 밖에 없었다. 고향이었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꺼려했던 나를 고향은 어머니처럼 인자하고 포근하게 받아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고향에 돌아오기만 하면 당장 결혼을 시키기로 단단히 작정을 하셨던듯, 나의 결혼을 서두르셨다. 나는 신부될 사람의 얼굴도 못본째 결혼식을 올렸고, 할아버지는 초가 한 채와 송아지 한 마리, 그리고 불모지이긴 하나 땅 1천7백평을 살림밑천으로 마련해 주셨다.
아내는 건강하고 부지런했다. 우리는 돌뿐인 땅 1천7백평을 개간하여 보리를 심고 배내기소를 길러 송아지를 아홉 마리로 늘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는 그동안 못다한 효도까지 합쳐 정성을 다해 모셨다.
마을노인들은 나를 기특하고 대견스럽다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날이었다. 하루는 마을 어른들이 부르신다고 하기에 마을회관으로 찾아갔더니 뜻밖에도 내게 이장을 맡으라고 하셨다.
이장이라면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학력도 능력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같은 중책을 맡을 수 있겠느냐고 극구 사양했으나 어른들은 이미 주민들과 결정을 보았으니 사양하지 말라면서, 반어거지로 마을살림을 내게 맡기셨다.
나는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질시와 모멸속에서 살아왔던 내게 마을을 이끌어 나갈 이장직을 맡기기로 한것은 나를 한사람의 인격자로 대우해준 것이었다.
나는 우리 마을의 오랜 숙원사업인 수도·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데다 마을 진입로까지 비좁아 겨우 마차나 다닐 정도였다.
때문에 비료나 농약을 사들여 오거나 농산물을 운반할 때에는 4km나 떨어진 아랫마을까지 마차로 실어 날라야 했다.
온갖 어려움속에서 수도·전기공사를 끝내고 4km에 달하는 마을진입로 공사까지 마치는데 2년 6개월이 걸렸다.
전기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을 하다말고 갈중의 (무명에 감물을 들인 작업복) 차림으로 도지사님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한 일이며, 소나기를 맞아가며 수렁속 같은 진창길로 흙짐을 져나르던 일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추억거리가 되었다.
마을의 숙원사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으나 동네일에만 매달린 탓으로 집안꼴은 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해도 힘겨운 일을 아내 혼자서 감당하느라 곱던 아내의 얼굴은 중년 아낙처럼 주름살이 많이 늘어났다.
그때 마침 금악이라는 곳에 축산단지를 조성하는데, 입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초지 3만평씩을 20년 상환조건으로 분양해주고 소구입자금도 50만원씩 융자해준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69년 10월이었다.
나는 마을어른들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장직을 내놓은 다음 아내와 함께 축산단지에 입주했다.
각오는 단단히 했지만, 금악단지는 한마디로 불모의 땅이었다. 제주도 사람이면 누구나 겁을 내는 마파람이 정면으로 불어닥치는 곳이었고, 토질은 습하면서 붉은 황토가 깔린 자갈밭이어서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제대로 자리지 못하는 곳이었다.
참으로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우리 부부는 버려진 이 불모지로 살림살이를 옮겨놓고 우선 축사부터 짓기 시작했다.
30평짜리 축사에 잇대어 방 한칸 부엌 한칸의 살림집을 짓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나는 융자금 50만원으로 임신된 소13마리를 사들였다. 당시에는 암소가 수소값의 절반밖에 안되어 큰 암소 한 마리에 3만5천원이면 살 수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단기간에 높은 소득을 올리려면 비육이 늦은 암소보다는 살이 잘 찌는 수소를 사들여 단기비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암소 사육을 모두 꺼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기소득보다는 우선 적정마리수를 확보한 다음 새끼를 내어 장기적으로 안정된 소득을 얻고 싶었다.
어쨌든 나의 계획은 적중하였다.
이듬해 임신소 13마리가 모두 새끼를 낳게 되어 26마리로 불어낫고, 소값도 암소값이 차차 오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암소값이 수소값을 앞지르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소에만 매달렸다. 1년 3백65일, 일요일도, 명절도, 눈오는 날도 비오는 날도 없이 잠잘때나 식사할때를 제외하고는 소와 함께 생활했다.
그같은 생활에는 갈중의가 안성맞춤이었다.
굵은 무명에 땡감을 으깬 즙으로 물을 들여 만든 이 옷은 통풍이 잘되고 구겨지거나 때를 타지 않았다. 때문에 봄에 입은 옷을 겨울이 되기까지 세탁을 하지 않아도 항상 새옷 같았다.
바쁜 살림에 매일 세탁을 한다는 것도 여간 번잡스런 일이 아니어서 나는 갈중의 한 벌로 3년을 견뎌 낸 적도 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이었지만 날마다 틈만 나면 돌을 추려내고 땅을 자주 갈아엎은 다음 퇴비와 농용석회·용성인비를 사용했더니 차츰 기름진 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개량목초인 오차드그라스·톨페스큐·이탈리안라이그라스 등을 파종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모두들 고개를 내저었던 땅에서 목초가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더니 기존 목장의 초지보다 40일이나 빠른 3월 초순에 푸른풀을 마음껏 먹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우리가 뿌린 개량목초는 한대성 작물이어서 12월중순까지 소를 방목할 수 있었으므로 사료값과 관리비를 최소한으로 절약할 수 있었다.
72년에는 축산단지 대표와 새마을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나는 과학적인 양축법을 익히기 위해 단지 회원들끼리 수시로 모임을 갖고 서로 경험을 교환하는 한편 축산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했다.
또한 공공기금을 모아 단지 안에 가축 급수장?진드기 구제장을 만들고 단지 안길을 시멘트로 포장하였다.
소는 계속 불어났다. 수송아지는 팔아서 암송아지로 바꾸고 큰 소로 키워 새끼를 낳게 했더니 5년만인 74년에는 모두 1백14마리로 늘어났다.
이정도면 가히 기업축산이라고 할만한 규모가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우리집을 부러워했다.
소 시세가 좋아 소를 비육한 사람들도 웬만큼 재미를 보긴 했으나 그들은 10마리정도 밖에 되지 않아 나처럼 큰 소득을 올리진 못했다.
당시에는 전국 곳곳에서 축산붐이 일어났던 관계로 송아지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한해에 50~70마리의 송아지를 낳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단지내의 여느 농가보다 5~6배의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소가 자꾸 늘어남에 따라 3만평의 초지로서는 그많은 소를 제대로 방목할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나는 금악축산단지를 떠나 새로운 목장을 조성하기로 작정했다. 마침 고향마을인 어음 2리에 마땅한 땅이 나왔다기에 가보았더니 12만평짜리 야산이었다. 그정도 넓이에 초지만 잘 조성해 놓으면 큰소 60마리 정도는 충분히 기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저축해 놓았던 돈을 모두 찾아다가 그 땅을 사들였다.
지금은 땅값이 엄청나게 비싸졌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웬만한 야산이면 평당 20원 안팎에 거래되고 있었다. 때문에 소 한 마리를 팔면 1만여평을 사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값은 내리고 땅값이 올라 소 한 마리를 팔면 3백평도 장만할 수 없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땅을 마련한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새로 사들인 땅도 돌밭 황무지이긴 마찬가지였다.
방풍림을 심고, 자갈을 주워내고 땅을 갈아 엎고, 퇴비를 실어 나르느라 우리 부부의 손가락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갈라지고, 갈라진 틈으로는 피가 흘러 반창고로 동여매도 저녁때 쯤이면 흰반창고가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래도 대형 농기계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애월 단위농협에 들어 상의했더니 정부 지원자금 외에 필요한 돈을 모두 융자해주겠다고 하여 트랙터를 한대 구입했다.
우리 부부는 초지조성을 끝낼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래도 우리는 고된 줄을 몰랐다. 내 명의로 된 등기부며 토지대장에 떳떳이 오른 내땅을 갖는다는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
어음 2리, 고향마을로 돌아와서는 이웃 비육소 농가와 함께 비육소 작목반을 조직했다. 비육된 소를 일반 상인에게 넘기지 않고 우리가 직접 서울 천호동에 있는 축협공판장에 출하하여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도록 후회스러운 것은 일에만 매달리느라 아이들을 키우는데 지나치게 소홀히 한 점이었다.
올해 제주대학에 입학한 큰애 경이와 둘째 수민이는 어렸을 때 못먹인 탓으로 지금도 몸이 약하다.
79년에는 밭4천5백평을 사들여 밀감밭을 만들었다. 그동안 축산에만 의존했던 소득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감은 82년에 첫 수확을 보아 작년에는 생산비를 빼고 4백여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요즘들어 소값이 떨어져 얼마간 적자를 보았으나 밀감소독으로 다행히 그 폭을 메울수가 있었다.
이제 우리 목장에는 연하고 보드라운 풀이 융단처럼 푸르게 돋아날 것이다.
그러면 겨우네 축사에 갇혔던 소들이 너른 초원에서 힘차게 뛰놀게 될 것이다.
소값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20여년 동안 나는 이같은 고비를 수없이 많이 넘겼다. 가파른 언덕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평탄한 평원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서서히 송아지수를 늘려가고 있다.
투자는 항시 불황기에 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최종편집 : 1986/04/24]